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55
455화
이안에게는 아주 기분 나쁜 사이렌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크르릉…!
홱 고개를 돌린 모로가 바짝 긴장한 듯 몸을 들썩였다. 같은 방향을 돌아본 이안의 미간도 절로 좁아졌다.
‘그래… 역시 넋 나간 것들만 있지는 않은 거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잿빛 하늘 저 너머. 새카만 그림자들이 새 떼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정확한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였지만, 하나하나가 꽤 크리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래도… 네가 뿜어내는 혼돈을 느낀 것 같은데. 친구.
요그가 느긋하게 속삭이는 가운데, 이안이 모로를 돌아보았다.
“다른 생존자의 기척은 안 느껴지냐?”
번들대는 눈으로 주위를 한차례 훑어본 녀석이, 몸을 돌리는 대신 긴 콧김만 뿜어냈다.
‘역시. 히케드는 안 떨어진 건가.’
속으로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곧바로 몸을 숙였다.
하긴. 히케드가 떨어졌다면 진작 마주쳤을 터였다.
어쩌면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그를 찾아내 깨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안이 그렇듯, 그 역시 이곳에서도 충분히 의식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냥 버리고 가자고. 어차피 부상도 심각해 보이는데.
이안이 세렌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는 사이, 요그가 속삭였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렌을 흙더미 밖으로 끄집어냈다.
흙이 잿더미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뿐만 아니라, 세렌 자체도 꽤나 무거웠으니까.
푸스스스-
축 늘어진 세렌의 전신에서 흙먼지가 흩날렸다. 곳곳이 부서지고 찌그러진 판금 갑옷. 한쪽이 완전히 찢겨 나간 안면 가리개가 너덜거렸다. 뻥 뚫린 구멍에서 흙이 우수수 쏟아졌다.
철크렁….
세렌을 내려 놓은 이안이 그녀를 바로 눕혔다. 찢겨 나간 안면 가리개 사이로, 흙을 뒤집어 쓴 세렌의 얼굴이 설핏 드러났다.
-호오…? 이래서 죄다 얼굴을 가린 건가.
요그가 재미있다는 듯 덧붙였다. 하지만 이안은 세렌의 얼굴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로의 옆구리를 툭툭 쳐서 주저앉게 하고는, 세렌의 겨드랑이 아래에 양팔을 밀어 넣어 그대로 들어 올릴 뿐이었다.
기- 아아아- 갸아아아-
하늘을 울리는 괴성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렌을 모로의 등에 밀어 올리며, 이안은 저 먼 상공을 돌아보았다.
넘실대는 잿빛 먹구름 아래. 새카만 것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열댓 마리쯤 되어 보이는 놈들은, 여전히 그림자에 휩싸인 것처럼 실루엣만 드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두 쌍의 크고 작은 피막 날개와 긴 꼬리. 뾰족한 발톱이 돋은 길쭉한 다리들과 머리에 넘실대는 여러 개의 촉수는 충분히 분간할 수 있었다.
-미룰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날 믿을 준비는 됐어, 친구?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여전히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전혀.”
이안이 곧바로 내뱉었다. 세렌의 하반신을 밀어 올려 모로의 등에 안정적으로 걸쳐 놓는 채였다.
뒤이어 손을 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해야겠지.”
믿는 건 요그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었다. 녀석 자신의 목숨도 걸려 있지 않은가. 적어도 최선을 다하기는 할 터였다.
크르릉….
모로가 콧김을 뿜으며 일어섰다. 셋이나 짊어지고 있어서인지 움직임이 둔탁했다. 넘실대는 갈기에 맺힌 보랏빛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사이, 이안은 이미 오른손을 아공간에 밀어 넣는 중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아공간을 더듬대는 와중에도 저 너머의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안이 덧붙였다.
“정말 너한테 모두의 목숨이 달린 것 같으니까.”
이제는 충분히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거리이건만. 저 촉수 달린 날것들은 여전히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애초에 저렇게 생겨 먹은 놈들인 것이다. 혹은, 이 연옥의 환경에 적응해 진화한 것이거나.
기아아- 기아아아아-
어쨌건, 한 마리 한 마리가 오거 정도의 크기는 되는 것 같았다.
물론 막상 싸워보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틈새의 괴물들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들판 너머를 배회하는 저 넋 나간 것들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 같이 가능하면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기절한 동료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부담스러운걸.
요그의 웃음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아공간에 넣었던 손을 빼냈다. 그의 손아귀에는 작은 두개골이 들려 있었다.
말라붙은 것 같은 거무스름한 색에, 일그러진 눈구멍이 네 개나 뚫린 기괴한 두개골이었다. 아래로 이어 붙은 작은 뼛조각들이 척추처럼 달랑거렸다.
암흑 성물.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
사아아아….
두개골 주위가 부자연스러운 어둠으로 물들었다. 주인인 이안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이안은 왼손 손바닥 위에 두개골을 얹었다. 일그러진 눈구멍들 너머에서 옅은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그 위로 활짝 펼친 오른손을 내밀며, 이안이 모로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 바짝 붙어.”
모로는 불안한 듯 콧김을 뿜으면서도 이안의 뒤로 다가섰다.
녀석의 보랏빛 안광은, 저만치의 날것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그사이 이안의 팔뚝을 미끄러지듯 기어간 요그가, 오른손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혼돈을 아끼지 말라고. 친구.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 역시 꿈틀대는 보랏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쿠구- 쿠구-
정수의 혼돈력을 완전히 개방한 것이다. 그의 양손에서 보랏빛 파장이 번진 순간, 요그가 휩쓸리듯 두개골 위로 떨어져내렸다.
그대로 파장을 타고 미끄러진 녀석이, 눈구멍 속으로 쑥 파고들었다.
솨아아아…
눈구멍 너머의 보랏빛이 삽시에 선명해졌다.
이안은 혼돈력을 멈추지 않고 뿜어냈다. 체감될 정도로 성장한 혼돈의 정수가, 심장처럼 맥동하며 쉴 새 없이 혼돈을 토해냈다.
두개골을 감싼 어둠이 넘실대며 짙어졌다. 그 한복판, 네 개의 눈구멍만이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쩍, 쩌적-
눈구멍 주위로 혈관 같은 균열들이 새겨지고, 삽시에 두개골 전체로 번져 나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하지만 이안은 자신의 암흑 성물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기아- 아아- 갸아아아-
그의 시선은 날아드는 새카만 괴물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몇백 미터 남짓까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검은 안개를 두른 듯한 두 쌍의 피막 날개. 뾰족한 발톱이 돋은 길쭉한 다관절 다리들. 두족류의 그것과 닮은 넘실대는 촉수들.
눈조차 없는 놈들은, 촉수 사이로 듣기 싫은 괴성을 토해내며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시발….’
육감이 경고를 보내고 긴장감이 정수리까지 치솟았지만, 이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개골에 혼돈력을 밀어 넣고 있는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고작해야 뒤로 조금 물러나는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저것들의 속도를 봤을 때, 전력 질주라도 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을 터였다.
쩍- 쩌적-
그 사이, 보라색 균열은 두개골을 넘어 인근의 공간까지 번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안의 시야 안까지 밀려들 정도였다. 집중력 특성이 활성화된 이안의 눈에도, 번지는 속도가 빠르게 느껴졌다.
기- 아아아-
하지만 그건 하강하는 날것들도 마찬가지였다.
피막 날개를 젖히듯 뒤로 세우고, 머리에 달린 촉수들을 어느새 앞으로 뾰족하게 내뻗는 채였다.
놈들의 형상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채울 찰나, 거미줄 같은 균열이 그 앞을 뒤덮었다.
콰장창창-
균열이 일제히 부서지며 쏟아져 내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날것들의 형상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라지고, 그 너머의 보랏빛이 이안의 시야를 뒤덮었다. 세상이 앞으로 홱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 바로 다음 순간.
“……!”
모든 감각이 일제히 되돌아왔다.
내리막 한복판에서 급정거한 듯한 느낌에, 이안은 양팔을 휘저으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카가각…!
장화 밑창을 타고 단단한 판석의 감촉이 전해졌다. 판석은 앞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전신에서 잿빛 수증기가 스멀스멀 번지고, 이안은 손에 쥐고 있던 두개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쩍… 쩌적…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비스듬한 오르막 위. 허공에 유리가 깨진 것 같은 커다란 균열이 빛나고 있었다. 그 한복판의 보랏빛이 불길하게 넘실대며 어두컴컴한 장내를 밝혔다.
균열은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가장자리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이안은, 그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크르렁…!
뒤편에 선 모로가 당황한 숨소리를 토해내며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도 이안이 느낀 것과 같은 감각에 휩싸였던 것이리라.
그리고 녀석의 안장 위. 디아나에게 포개듯 얹어져 있던 루시아가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콰당탕탕-
허공에서 녀석을 낚아챈 이안이 등으로 착지하며 바닥을 굴렀다. 루시아의 목과 등을 꼭 껴안은 채였다.
바닥이 기울어진 덕분에 몇 번 나뒹군 것만으로도 멈춰 설 수 있었다.
잿빛 수증기가 루시아의 전신에서도 번지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품에 안긴 루시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루시. 정신이 들어?”
상반신을 일으키며 이안이 속삭였다. 등 뒤의 보랏빛이 빠르게 잦아드는 가운데, 루시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올려다본 것도 잠시.
“…신기한 꿈을 꿨어요.”
녀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가면 위로 드러난 눈매가 슬며시 휘어지는 채였다.
이안의 입꼬리도 설핏 말려 올라갔다.
“재미있네. 나도 그랬는데.”
이안을 올려다보는 루시아의 눈매가 조금 더 휘어졌다. 둘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눈만 마주보았다.
“아, 아아… 아아악…!”
앞쪽에서 발작적인 비명이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디아나…!”
홱 고개를 돌린 루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멈춰 선 모로의 안장에서, 디아나가 발작하듯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악…! 오지마…! 안 돼!”
비스듬한 바닥에 떨어진 그녀가, 전신에서 잿빛의 수증기를 뿜어내며 나뒹굴었다.
“제, 제가 가볼게요…!”
루시아가 튕겨 오르듯 일어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오, 오지마…! 시발…! 저리 꺼져-!”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구는 디아나는,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당장 무기를 뽑아 날뛰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건만.
“디아나! 나예요…! 괜찮아요!”
루시아는 양팔을 내저으며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 사이, 이안도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안장 위에서 발작하듯 몸을 꺾던 세렌이 모로의 반대쪽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크렁…!
바닥에 추락한 그녀는, 디아나와는 달리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팔다리를 기괴한 방향으로 꺾으며 꺽꺽대는 숨넘어가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토해낼 따름이었다.
-기껏 구해 놨더니….
이안의 뇌리로 나른한 속삭임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엄청난 속도로 작아지는 균열 한복판에, 둥둥 뜬 암흑 성물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세렌의 옆에 주저앉았다. 활처럼 꺾인 허리를 무릎으로 억지로 누르고, 치켜든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채였다. 척추가 부러지거나 질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임시 조치였다.
-아, 그래…. 그 짐승의 혼돈에 오염됐군….
덕분에 세렌의 한쪽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 곳곳에 핏줄처럼 번진 잿빛이 일렁이고,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채였다.
역시. 곧 죽거나 변이될 게 분명했다. 혀를 찬 이안이 손바닥을 그녀의 흉갑에 얹었다.
‘…안 되네.’
하지만 혼돈의 정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탐내기엔 보잘것없는 혼돈인 것이리라.
이안이 잠시 갈등하는 사이.
-반대로 해 보는 게 어때, 친구?
요그가 느릿느릿 속삭였다.
…그게 되나?
곧바로 의미를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그 와중에도 눈동자가 다시 보라색으로 물드는 채였다.
쿠구- 쿠구-
그의 손바닥에서 번진 혼돈력이 삽시에 세렌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한순간 그녀의 경련이 더 격렬해졌다.
“컥… 커헉…!”
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전신에서 잿빛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입에서 죽은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혼돈이 세렌을 침식하던 이나스 커글의 혼돈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 계속해…. 잘하고 있어….
균열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장내에 어둠이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덜그럭. 두개골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요그의 잠들 듯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그럼 그 녀석의 근원을… 완전히 네 혼돈으로 물들일 수 있을 거야.
“…뭐?”
이안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