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68
468화
“그게 이 목소리의 이름이라면… 예. 들립니다.”
멍하니 대답한 세렌이, 이내 머리를 돌려 루시아 쪽을 돌아보았다.
“…동굴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다소 불확실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대체 어떻게….”
루시아가 낮은 탄성을 흘리는 가운데, 그들의 뇌리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아무래도… 네 혼돈에 반사된 파장을 수신하나 본데, 친구. 일종의 메아리처럼 말이야.
이어진 속삭임에, 루시아와 세렌의 시선이 다시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그의 견갑 위에 기어 올라간 요그에게로.
-흥미롭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거든.
내가 무슨 송신기라도 된 건가.
이안은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세렌의 성흔에 스며든 그의 혼돈이 만들어낸 예상치 못한 부작용인 건 분명했다.
“요그… 그 뱀은… 대체 뭡니까?”
세렌의 더듬대는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마수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커다란 눈을 마주 본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내 사역마요. 보다시피.”
“사역… 마라고요…?”
충분한 설명이 될 줄 알았건만.
되묻는 세렌의 눈매는 오히려 어리둥절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눈이 커서인지 표정 변화가 더 극명하게 느껴졌다.
“언어를 구사할 정도의 지성을 가진 마물을 사역마로 길들이는 건… 불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요. 사실, 이런 마물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지금에서야 알게 되긴 했습니다만….”
…그런 설정도 있었나.
이안은 이내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하긴. 생각해보면 모로는 물론이고 본래의 늪지의 원한도 딱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가.
그 이상의 존재는 사역마가 아니라 권속이나 하수인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리라.
-넓게 보면 너도 그 황태자의 사역마라고 할 수 있어, 반편아.
요그의 비웃음 섞인 속삭임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보랏빛 혀를 날름댄 녀석이, 흑요석 같은 눈으로 세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평범한 존재가 아닌 건 사실이지. 나는 너 따위가 감히 이름을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야.”
말을 자른 이안이, 그대로 오른쪽 어깨를 일별하며 덧붙였다.
“닥쳐.”
-네가 원한다면.
요그가 키득대면서도 선선히 입을 다물었다. 그저 보랏빛 혀만 날름대는 채였다.
…당분간은 이 뱀 새끼 입단속까지 신경 써야 되게 생겼네.
내심 혀를 차면서도 다시 세렌을 마주 본 이안이, 여전히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내뱉었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소?”
그의 우묵한 눈을 마주 본 것도 잠시.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질문이었군요.”
이윽고 세렌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설명을 요구할 자격도, 성자 대행께서 말씀해 주셔야 할 의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말투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과하실 필요까진 없소. 궁금해한 게 죄는 아니니까.”
“솔직히… 그럴 만한 상황이기도 했고요.”
루시아가 넌지시 덧붙였다. 이안이 그렇듯, 그녀 역시 이 흑사자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이리라.
물론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라는 것도 그녀에게 호의를 품은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또 한 번, 견문을 넓히게 되었군요.”
세렌이 조금 머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동시에 묘한 이질감이 드는 미소였다.
-네가 살아남은 것도 내 조언 덕분이니까. 앞으로 알아서 잘 모시라고. 반편아.
요그가 거만하게 덧붙였다. 놀란 듯 눈을 깜빡인 세렌이, 뒤이어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그랬나요…? 그렇다면…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요그….”
사역마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어색한 것이리라. 물론 그녀와 달리, 이안의 입가에는 실소가 스치고 있었다.
‘하여간 말장난은….’
세렌의 성흔을 혼돈으로 물들이라 속삭인 것도 저 녀석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가 찬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주 예의가 바르네. 좋아…. 그런 의미에서 하나 알려주자면…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어진 느긋한 속삭임에, 세렌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내 속삭임이 들린다는 건, 지금 너는 그 황태자가 아니라 이안의 권속에 더 가깝다는 의미거든. 실제로도 네 원래 주인과는 전혀 공명할 수 없는 상태잖아?
“……!”
세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동공이 뾰족하게 솟는 채였다.
-그러다 영영 네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요그가 키득댔다. 오히려 그렇게 되길 바라는 듯한 말투였다.
세렌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건 물론,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지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묘한 적막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그럼 결국….”
디아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완전히 뒤로 돌아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는 중이었다.
“…이젠 나만 빼고 전부, 저 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네.”
요그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원한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귀쟁아.
루시아가 녀석의 속삭임을 그대로 전달했다. 놀랍게도 잠시 갈등한 디아나가, 이내 잡념을 떨치듯 고개를 털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린 것 같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다시 루시아에게로 돌아갔다.
“이제 설명해 줘, 루시페르. 어딜 지나가도,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 그게… 말이에요….”
그제야 멈칫한 루시아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굳어져 있던 세렌도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뱀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정작 녀석이 한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네가 들은 그대로야.”
내뱉은 건,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온 이안이었다.
“내가 품은 혼돈이 너무 커서, 그놈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는군.”
“…비단 야나르 타쉬의 권역을 침범하지 않더라도요.”
루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디아나가 멈춰 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과 모로가 뒤따라 걸음을 멈춘 가운데, 인상을 잔뜩 구긴 그녀가 읊조렸다.
“잘못 들은 거길 바랐는데…. 그럼… 비교적 안전한 경로 같은 건 없단 얘기잖아.”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녀석의 추측대로라면.”
“하… 시발….”
눈을 질끈 감은 디아나가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탄식했다.
팔과 어깨는 축 처져 있어서, 체념이라는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뭐, 좋게 생각하자고.”
이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젠 재고 따질 것 없이 사막을 빠르게 가로지를 생각만 하면 되잖아.”
“…….”
디아나의 축 처진 어깨가 한차례 들썩였다. 감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였다.
“…이나스 커글을 토벌할 때에도 느꼈습니다만.”
세렌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왜 성자 대행께서 초인이라 불리시는지 알겠군요. 이토록 의연하고 대범하시다니…. 전하를 뵙는 것 같았습니다.”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말투였다. 묘한 눈으로 이안을 잠시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비록 이런 몰골이 되었습니다만,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군요.”
“내 권속이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인 건 아니길 바라겠소.”
이안이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세렌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제 충정은 오로지 전하의 것입니다. 그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자 대행.”
“게다가 어쩌면,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일지도 몰라요.”
루시아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이안 님의 존재를 눈치채더라도, 놈이 권역을 벗어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부키키아가 그렇다면서요.”
-글쎄. 군침 도는 먹잇감을 그냥 둘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긴, 아무리 봐도 먹을 게 풍족해 보이진 않거든.
이어진 요그의 속삭임에는, 물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디아나가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뒈질 상황이라면….”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적갈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그 아래의 검은 황야.
“…발악이라도 해 봐야겠지. 지금까지 그랬듯이.”
읊조린 그녀가 그 한복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말과 달리,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피식 웃은 이안이 모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일 찰나.
“그런 의미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세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조금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들썩였다.
“이제, 저를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모로의 안장 앞에 결박되어 있었다. 그녀를 바라본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아직 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실 것 같은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목이 조금 뻐근하긴 합니다만….”
“흠.”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이 모로에게 다시 눈짓을 보냈다.
콧김을 뿜은 녀석이 마저 몸을 돌렸다. 이안이 그 옆으로 나란히 따라붙으며 덧붙였다.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소만.”
“……?”
세렌이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대마족, 야나르 타쉬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오?”
“……!”
***
사각- 사각-
모로가 검은 언덕으로 접어들었다. 녀석이 내딛는 걸음마다 우수수 모래가 흘러내렸다. 이 언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구였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내뱉은 세렌이, 성큼성큼 앞서가는 디아나를 따라 멀어졌다.
안장에 앉은 이안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그녀의 모습은 빈말로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었다. 검푸른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있었고, 전신 판금 갑옷은 곳곳이 뜯겨 나간 상태였으니까. 멀쩡한 부분들도 온통 찌그러져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덜걱대는 게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칼도 없어서, 디아나의 소검을 한 자루 빌려 허리춤에 달고 있었다. 그녀가 쥐면 비수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칼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언덕을 오르는 걸음걸이는 아주 가벼워 보였다.
어제만 해도 한쪽 다리를 조금 절뚝대더니. 고작 몇 시간의 야영을 거친 후로는 그런 기색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길잡이 보조를 자처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확실히… 인간의 회복력은 아니네.’
밥도 나만큼 조금 먹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문득 낮은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보니 그녀만 대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육포 한 조각과 물 한 모금만 마시는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디아나 역시 놀라울 정도로 적은 양의 식량과 물을 소비했다.
거기다 루시아 역시, 성혈을 품에 넣은 뒤로는 사도 본연의 체력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심지어 모로마저도 그랬다. 녀석은 지난 며칠간 먹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때때로 이안이 혼돈력을 밀어 넣어 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지금 모래 언덕을 오르는 녀석의 걸음에서는 지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방해만 없다면… 정말 남은 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사막을 가로지를 수 있을지도.’
물론 그건 순탄한 여정이 끝까지 이어질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안은 그런 기대는 애초에 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실 그는, 틈새를 벗어난 순간부터 내내 영문 모를 묘한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 여겼지만, 아직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사막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방향을 수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디아나 경.”
언덕 정상에 선 요정과 반마족이 가까워졌다. 그녀들은 주위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다음 경로를 토론하고 있었다. 황토를 흩뿌린 것 같은 적갈색 하늘을 열심히 두리번대는 채였다.
-무의미한 짓을 열심히도 하네.
요그가 심드렁하게 속삭였다.
녀석은 지금 모로의 정수리 갈기 위에 똬리를 튼 채였다. 모로가 때때로 짜증스럽게 고개를 털었지만, 녀석은 미끄러지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지루한 여정의 소소한 재미로 삼는 것이리라.
‘…저 녀석 머릿속도 좀 털어야 하는데.’
녀석의 맨들맨들하고 작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안이 슬며시 입맛을 다셨다. 의도치 않게 세렌과 속삭임을 공유하게 되면서 뒤로 미루게 된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어쨌건 그녀는 히케드의 기사가 아니던가.
함께 목숨 건 전투를 치르기까지 했지만, 이안은 여전히 히케드가 끝내 적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지 않았다.
그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뒤로 기울어져 있던 안장이 바로 선건 그때였다.
“와….”
안장 앞에서 루시아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안의 망토를 머리까지 두른 녀석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듯 앉은 채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도 비로소 다시 시야를 돌렸다.
적갈색 하늘 아래. 수많은 사구가 파도처럼 넘실대는 검은 바다가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