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79
479화
불길은 삽시에 구체의 형태를 이루며 응축됐다. 크기는 작아졌지만 더 밝은 빛을 내뿜는 채였다.
‘이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루시아의 손바닥 위에 안정적으로 일렁이는 화염구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만 해도 신성과 마력을 따로 사용했건만. 지금 만들어진 화염구에는 신성력과 마력이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이나스 커글과 싸우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발전한 건가.’
이안 역시 마력에 혼돈을 섞어 사용하긴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이었다.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굳이 표현하자면 신성 주문이라 불러야 할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루시아의 재능과 마경의 특수한 환경이 더해져 만들어진 한시적인 경지이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서 신성 마법사라는 특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중첩 시전까지 가능한 마법사지.’
게임에선 고위 비전을 익히고서야 가능해지는 일이 아니던가.
새삼 재능의 격차를 느끼며,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크르릉…!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모로가 불쾌한 듯 콧김을 뿜는 가운데, 이안이 루시아의 정수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의욕은 알지만, 우리 목표를 잊지 마. 루시. 따라붙을 것 같은 놈들만 처리하자고.”
“그럴 거예요. 걱정마세요. 지금 이건, 일종의 연습이라고요.”
대답하며 루시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붉게 일렁이는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제 가면 좀 벗겨 주시면 안 될까요? 깜빡 했어요.”
“어렵지 않지.”
그대로 손을 뻗은 이안이 루시아의 가면 양쪽에 달린 고정쇠를 풀었다. 느슨해진 가면이 목덜미로 흘러내리자, 살짝 말려 올라간 루시아의 입술이 드러났다. 씩 이를 드러낸 녀석이 덧붙였다.
“이제야 좀 숨 쉬기가 편하네요. 마력도 잘 느껴지고요.”
마력 보충까지 해가면서 싸우겠단 건가.
이안이 피식 웃는 그때, 안장의 기울기가 완만해졌다. 어느새 일대에서 가장 높은 모래 언덕의 정상에 다다른 것이다.
루시아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
이안도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적갈색 먹구름이 자욱한 하늘과 새카맣게 이어진 사막 저 너머.
잿빛의 사막이 경계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한순간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대가 다소 낮아 보이기도 했다. 반대로 경계를 따라 검은 사구들이 감싸듯 이어지고 있어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어쨌건 정말, 거의 다 왔네.’
이안은 아주 느릿느릿 넘실대는 잿빛의 바다를 차근히 바라보았다. 물론, 죽음의 사막을 관찰할 여유가 있는 건 그뿐이었다.
“제기랄….”
다른 일행들의 시선은 언덕 아래를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마물들의 물결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죄다 모래 아래에 모습을 감추고 있거나 보호색을 띄고 있어서, 우글대는 모래의 해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행의 앞에 펼쳐진 공간을 완전히 삼켜버리려는 듯한 물결이었다. 심지어 예상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우측 대각선을 보고 있으라고, 루시. 그쪽이 제일 빠르니까.
모로가 콧김을 뿜으며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가운데, 요그의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긴장은커녕, 오히려 묘한 기대마저 느껴졌다.
“…다음은 좌측이야. 어쩌면 저쪽이 더 빠를지도 몰라.”
디아나가 빠르게 덧붙였다. 이안의 귀에만 들릴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요그에게 하는 말이라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귀쟁이가 다음은 좌측이라는군.
곧바로 이어진 속삭임을 들으며, 이안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 너머, 맹렬하게 달려오는 다리 여섯 달린 검회색 도마뱀이 눈에 띄었다.
요그가 말한 가장 빠른 놈이리라.
‘꽤 큰데.’
머리 한복판에 돋아난 뿔과 기다란 잔상을 그리는 적갈색 안광을 응시하던 이안이, 육감을 따라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웬 가시가 마구 돋아난 바퀴가 굴러오고 있었다. 물론 진짜 바퀴는 아니었다.
‘뭐, 가시 콩벌레 그런 건가.’
이안이 이런 느긋한 생각이나 할 수 있는 건, 물론 앞에 앉은 신성 마법사를 믿기 때문이었다.
루시아는 연신 뇌리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화르르….
그저 양손의 화염구를 유지한 채, 언덕 아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녀석이 이미 완전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염구 아래, 활짝 펼친 손의 손가락 끝이 움찔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루시아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오른손을 내뻗은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쉬학- 콰르르-
그녀의 손바닥에서 고요하게 이글대던 화염구가 유성의 꼬리 같은 잔상을 남기며 뿜어져 나갔다. 언덕으로 들어서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를 지나치는 궤적이었다.
키에엑-!
그 사실을 눈치챈 듯, 바실리스크가 참고 있던 포효를 토해내며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쏜살같이 날아든 화염구가 허공에서 폭발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아앙-!
후끈한 열기와 함께, 사방으로 눈부신 불티를 흩뿌리는 채였다. 이안의 눈에는 불꽃놀이처럼 보이는 불씨들이 내달리는 바실리스크와 그 주위로 쏟아져 내렸다.
키아아아-
전신에 불씨로 뒤덮인 바실리스크가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위로 새카만 모래가 치솟았지만, 놈의 전신에 옮겨 붙은 주황색 불꽃들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들어갔다.
화르르르-
그리고 그건 주위에 흩뿌려진 다른 불씨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모래를 지글지글 녹이며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성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진 것이다. 불씨에 담긴 신성이 다하기 전까진 꺼지지 않고 타들어 갈 터였다.
‘지옥불이 따로 없네.’
이안의 입가에 다시 한 번 헛웃음이 스쳤다. 백린탄처럼 터지는 화염구라니.
이나스 커글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신성 주문은 일반적인 주문과는 전혀 달랐다. 가장 기초적인 하위 마법이 고위 마법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지 않는가.
키에에엑-
어쨌건, 뒤따라 밀려드는 마물들의 추격도 광범위하게 저지할 수 있을 터였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바실리스크뿐만 아니라, 그 뒤편으로 밀려들던 것들도 다급하게 방향을 틀고 있었다. 한데 뒤엉켜 나뒹굴면서 불바다 한복판으로 나뒹굴고 있기도 했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겠지만, 모로가 지나칠 정도만 시간을 벌어도 충분할 터였다.
화르르르- 콰앙-!
그사이 루시아는 이미 왼손의 화염구도 내던진 상태였다.
이안은 눈부신 폭발이 터져 나오고서야 좌전방 일대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불꽃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바퀴처럼 굴러 오던 놈이 불꽃에 휩싸인 채 튕겨나가고 있었다.
둥글게 말았던 몸이 펼쳐지면서, 가시가 잔뜩 돋아난 등 갑주 아래로 꿈틀대는 수많은 다리가 드러났다.
‘참, 죄다 개성 넘치게도 징그럽게 생겼네.’
어쨌건 루시아의 전략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내달리는 모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불바다 옆을 지나쳤다.
“좋아….”
루시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과 달리, 녀석은 이미 지나치는 불바다 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손바닥 위에 다시금 화염구를 만들어 내면서, 전방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이.
-멋지군. 하지만 좀 더 즐겨 보자고, 루시. 다음은 다시 오른쪽이야. 제압만 하지말고, 아예 터뜨려 보자고.
요그가 키득대며 속삭였다.
어쨌건 루시아가 만들어 내고 있는 난장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안의 미간이 슬쩍 좁아지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속지 마.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까, 흥분할 필요 없어.”
“걱정마세요. 이안 님. 전 지금 아주 침착해요.”
이안의 속삭임에 곧바로 대답하며, 루시아가 그를 흘깃 돌아보았다. 불그스름하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슬며시 휘어졌다.
“즐겁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이안의 입가에도 옅은 실소가 번졌다. 하긴. 루시아는 이나스 커글 토벌 이후로 전투에 제대로 참여한 적이 없지 않던가.
내심 몸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성흔이 신성으로 가득 찬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으리라.
“네 즐거움까지 막을 수는 없지.”
이윽고 내뱉은 이안이 앞쪽을 턱짓했다.
“지금처럼만 해.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미 그러고 있는 걸요.”
더 해사하게 미소 지은 루시아가 앞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오른손을 떨치듯 내뻗는 채였다.
화르르- 콰앙-! 콰아앙-
눈부신 폭발이 연신 검은 사막을 밝혔다. 내달리는 모로의 앞길을 열어주는 이정표처럼 보일 정도였다. 폭발은 그 크기도 대상도 매번 달랐지만, 결과만큼은 늘 같았다.
키아아아- 캬아아아-
온갖 마물들의 비명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한복판을 내달리는 모로는 단 한 번도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흥분조차 가라앉은 듯, 질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긴장이 무색해진 건, 가면 쓴 요정과 머리에 뿔이 돋아난 흑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어느새 철퇴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세렌이, 문득 허탈한 탄식을 흘렸다. 목숨 건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구경만 하다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비로소 뇌리를 스쳐서였다.
“…옛날 생각 나네.”
그녀의 앞에서 디아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이 와중에도 주위를 연신 두리번대고 있었다. 출렁이는 백금발을 바라보며, 이안이 되물었다.
“옛날이요?”
“전쟁이 한창이던 때 말입니다.”
눈길도 주지않고 대답한 디아나가, 반대편 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뒤늦게 거들먹대며 나타난 주문쟁이들이 꼭 저랬죠. 물론 지금 루시페르는 혼자서 몇 명 몫을 해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
세렌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힐긋 그녀를 일별한 디아나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전투 마법사를 본 일이 별로 없으신가 보군요.”
“저는… 뒤늦게 합류한 원정군이었습니다.”
세렌이 조금 머쓱하게 내뱉었다. 그녀는 흑사자 중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전장에 다다르기도 전에 세상에 어둠에 잠긴 겁니다.”
“…태자 전하께 구원받은 운 좋은 후발대 중 하나셨던 거군요.”
디아나가 알 것 같다는 듯 내뱉었다. 묘한 웃음기가 섞인, 다소 거만한 말투였다. 하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세렌은 선선히 고개만 끄덕였다.
“예. 제 목숨을 전하께 바치기로 맹세한 것도 그때입니다.”
“그 뒤로도 주문 쟁이들을 볼 일이 없진 않으셨을 텐데요.”
“…저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시간은 다른 법이죠. 제가 다시 전하를 찾아 뵈었을 때는… 이미 많은 마법사들이 죽거나 미쳐버린 뒤였습니다. 물론 남은 마법사들도 있긴 했습니다만….”
세렌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허공에서 폭발한 화염구가 주황색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인상적인 광경을 본 적은 없군요.”
“뭐, 기절해 계신 동안 더한 일이 있긴 했었는데.”
“예…?”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디아나가, 다시 주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어쨌든, 루시페르가 대단한 건 사실이에요. 고작 하위 주문만으로 몇 명 몫을 해내고 있으니까.”
“…저게, 하위 마법이라고요?”
세렌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디아나가 건성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믿기 어렵지만. 아마도.”
“맙소사….”
세렌이 다시 한번 경악성을 흘렸다. 디아나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때때로 요그의 속삭임이 거슬린다는 듯 눈매를 꿈틀대며 주위를 두리번댈 뿐이었다.
그녀가 돌아보고 있는 게 상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세렌이, 이윽고 덧붙였다.
“그런데, 계속 뭘 그렇게 찾고 계신 겁니까?”
뒤쪽을 돌아보던 디아나의 시선이 멈춘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가면 너머의 눈매를 구긴 그녀가 이윽고 덧붙였다.
“저것들.”
“……!”
그제야 세렌도 홱 뒤를 돌아보았다. 우글대며 따라오는 마물들의 물결이 새삼스럽게 시야에 가득 펼쳐졌다. 놈들이 만들어낸 모래 먼지와 불바다가 토해낸 연기가 상공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날개를 활짝 펼친 실루엣들이 흐릿하게 드리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마물의 존재를 상기한 세렌이 탄식했다.
“와이번…!”
“그냥 계속 사각지대에 숨어만 있길 바랐는데. 괜한 기대였네.”
흐릿하게 일렁이며 따라붙는 실루엣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읊조린 디아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요그. 루시에게 전해. 와이번들이 따라붙고 있다고.”
“그럴 필요 없어.”
“……!?”
불쑥 번진 이안의 목소리에, 눈을 끔뻑인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루시는 지금처럼 계속 전방만 담당해도 돼.”
어느새 허리를 편 이안이 뒤편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갈색 마력이 일렁이는 눈으로.
“저런 귀찮은 것들을 상대하는 건 보조 주문 쟁이의 역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