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89
489화
꽈지지직-
전신을 꿰뚫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그 와중에도 팔뚝을 움켜쥔 손아귀를 떨치듯 털어낸 이안이, 그대로 움켜쥔 안면을 패대기쳤다.
-잘… 했어. 친구….
요그의 속삭임과 함께, 단말마 같은 울림이 전신으로 번졌다.
동시에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누군가 잡아챈 것처럼 의식이 튕겨 나갔다.
다음 순간 암전된 시야가 눈부시게 점멸하고,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 감각이 되돌아왔다.
쿠구- 쿠구-
세상이 핑핑 도는 와중에도 혼돈의 정수가 토해내는 울림과 몸속을 휘몰아치는 정체 모를 신성이 선명해졌다.
진흙 속에 산 채로 파묻힌 듯한 답답함이 뒤를 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안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온 힘을 다해 밀어젖혔다.
꽈드드득- 철퍽-
진흙 같은 벽을 뚫고, 이안이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지독한 한기와 현기증 탓에, 추락의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와중에도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창 만큼은 비현실적으로 또렷했다.
“콜록… 우웩…!”
갓 태어난 것처럼 널브러진 채, 이안은 보랏빛 점액을 게워냈다.
완료 창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발작하는 듯한 정수의 울림은 물론, 혼돈을 불사르는 신성 역시 여전히 또렷했다.
“—-!”
뒤에서 대기를 찢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고개도 들지 못한 상태에서도, 이안은 비틀대는 거대한 보랏빛 괴물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와 분리된 대마족의 육체였다.
아마도 그가 만들어 냈을 구멍이 몸통 한복판에 뻥 뚫린 놈은,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
아가리만 남은 머리가 뭉개지는 와중에도, 놈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안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기까지 했다.
다시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 팔을 휘저었지만, 팔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흐물흐물하게 흘러내렸다.
놈의 두 다리와 몸통, 꿈틀대던 촉수들도 형태를 잃고 허물어졌다.
솨아아아아-
비명이 바람 빠지듯 잦아드는 가운데, 녹아내린 대마족의 육신이 보라색 수증기로 화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널브러진 채 숨만 몰아쉬고 있는 이안의 전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대가 자욱해지고 있었지만, 그는 눈길은커녕 일어서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쿠구- 쿠구-
혼돈의 정수가 여전히 발작하듯 울부짖어 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이 의식을 집중한 건 놈이 아니었다. 몸속을 휘몰아치며 빠져나가려 하던 정체 모를 신성.
그는 그것의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개 같은 짓을 벌였으면….’
다행히도 신성은 순순히 그의 인도에 따라 방향을 바꿨다. 몸 바깥이 아니라, 그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발작하듯 뿜어져 나오는 혼돈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벌도 같이 받아야지.’
밀려든 신성이 혼돈의 정수를 뒤덮은 건 바로 거의 동시였다. 쿠궁, 정수가 단말마 같은 울림을 토하는 가운데,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고통이 이어졌다.
눈앞이 하얘진 건 착각이 아니었다. 어지럽게 산란 되는 빛이 한순간 그의 시야를 가득 뒤덮었다.
솨아아아-
신성에 휩쓸린 정수가 고요해지는 가운데, 이안의 전신에서 보라색과 반짝이는 빛이 뒤섞인 수증기가 자욱하게 번져 나왔다.
퀭하니 풀려있던 그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우웩…! 콜록…!”
양손으로 땅을 짚고 상반신을 일으킨 이안이, 속에서 치솟은 피를 왈칵 토했다.
불길한 보랏빛과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빛이 뒤섞인 피였다.
지금 그의 전신에서 번지는 수증기처럼, 모래에 닿은 순간부터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이안은 신성의 일부가 자신의 전신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퀘스트 완료창 역시 비로소 선명해졌다. 분명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기 전에 닫아버렸건만.
받은 적 없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에 받은 또 다른 퀘스트가 완료된 것이리라. 심지어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다. 창을 닫자 곧바로 또 다른 완료창이 이어진 것이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확인 창을 닫았다.
보상은 물론 궁금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그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한 건 고개를 치켜든 직후였다.
“이안 님…!”
얼굴이 피범벅이 된 루시아.
자욱한 수증기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오던 녀석은,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몸을 날려 그를 끌어안았다.
이안은 거부하지 않고 녀석을 마주 안았다.
“다행이에요…! 다시는… 다시는 뵐 수 없게 되는 줄 알았다고요…!”
이안을 으스러질 듯 껴안은 루시아가 내뱉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목소리였다. 녀석을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이안이 읊조렸다.
“…미안하다. 루시.”
“아니에요. 그건… 이안 님이 아니었으니까….”
루시아가 고개를 저으며 내뱉었다. 이안이 녀석의 등을 토닥일 찰나, 눈물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도 사과드릴 게 있어요… 이안 님이 빌려주신 성혈… 멋대로 써 버렸어요….”
비로소 신성의 정체를 깨달은 이안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사과할 일이 아니야. 덕분에 정신 차리고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잘했어.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며 훌쩍대던 루시아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곧이어 억눌린 탄식이 번졌다.
“디아나….”
“…디아나?”
이안의 미소가 굳어졌다. 대답한 건 루시아가 아니었다.
-깜빡… 했네. 우리가 큰… 사고를 쳤어. 친구.
뇌리에 번진 힘없는 속삭임에, 미간을 좁힌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일렁이는 수증기 사이를 뚫고 한 줌의 검은 연기가 쏜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곧 형태를 갖춘 요그가 그의 팔뚝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티잉-
평소와 달리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채였다. 반사적으로 한 손을 뻗은 이안이 녀석을 붙잡았다.
-…나도, 대가를 치른 것 같고.
꿈틀대며 손가락 사이로 기어나온 요그는, 다시 예전처럼 작아진 상태였다.
기만의 가면을 사용한 후유증은 아닐 터였다. 아마도 꿈에서 말했듯,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 정수에게 힘을 빨아 먹힌 것이리라.
녀석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결과겠지만, 어쨌건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디아나… 디아나에게… 가야 돼요….”
요그가 손가락에 힘없이 감기는 사이, 이안의 품에서 벗어난 루시아가 비틀대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을 뿐이었다.
육체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리라.
“…가자. 어디인지 알려 줘.”
그녀를 번쩍 안아 들며 일어선 건 이안이었다.
아직도 현기증이 남아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육체는 조금도 지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 전투를 다른 몸으로 치른 덕분일 터였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고작 그 정도로 녹초가 되기에, 그의 육체는 지나치게 튼튼했다.
이안이 자신의 혼돈이 만들어 낸 안개를 뚫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사이.
“이쪽… 이에요. 조심하셔야 돼요. 이 앞에, 유사가 있어요.”
힘없이 한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며 루시아가 속삭였다.
이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주위와 달리 아주 단단해 보이는 일대를 이미 눈에 담고 있었다.
디아나가 먼저 빠진 덕분에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리라.
“디아나가 그렇게 된 건 저 때문이에요…. 저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면, 혼자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을 거라고요. 디아나를 데리고 가야 해요. 이안 님. 여기에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루시아가 눈물을 흘리며 읊조렸다. 이안은 대답 대신 슬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아를 아끼기 때문인지 그의 부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건 그녀가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켰다는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 해요. 아니… 고향을 그리워했으니까. 고향에 묻어줄 거예요. 반드시….”
루시아가 혼잣말처럼 읊조릴 찰나,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무의미한 짓에…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어차피 귀쟁이는 곧 죽을 거야… 그리고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루시아는 물론, 이안의 미간도 좁아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간 낭비라니요? 디아나는 우리 친구라고요…! 요그에게도 그렇-”
“디아나가 아직 살아 있다고?”
이안이 눈물을 흘리며 토로하는 루시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 와중에도 걸음을 점점 더 재촉하는 채였다. 요그가 힘없이 혀를 찼다.
-필멸자들이란…. 그래… 아직 영혼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어. 내가 새긴 주문도. 하지만 곧이야. 그 녀석의 생명이 꺼지는 게 느껴져.
또 한 번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도, 루시아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주위를 두리번대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찾았다.”
의문을 끝맺을 새도 없이, 루시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그녀의 눈매가 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디아나…!”
사막 한복판에 널브러진 요정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대마족에게 팽개쳐진 자세 그대로였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주위의 모래가 거무스름하게 변한 건, 그녀가 흘린 피를 머금어서일 터였다. 하늘을 보고 누운 터라 왼쪽 등허리의 구멍은 보이지 않았지만, 설핏 드러난 우측 허리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디아나…! 정신 차려요… 제발… 디아나….”
속도를 줄인 이안이 허리를 숙이자, 그대로 뛰어내린 루시아가 엉금엉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절절한 애원에도 디아나는 꿈틀대지조차 않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은 루시아가,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얹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면을 천천히 벗기는 채였다.
“디아나….”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하고 눈이 탁 풀린 요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겉보기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녀의 볼에 손을 얹으며, 루시아가 허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디아나. 정말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든-”
“작별 인사는 잠시 미뤄 둬.”
그녀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때였다. 반대편으로 돌아온 이안이 몸을 숙이고 있었다.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든 루시아의 시선이, 이윽고 그의 손에서 멈췄다.
“……?”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이안의 손에,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유리병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할 필요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병의 내부에는 별빛처럼 반짝이는 황금빛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주 귀한 보물이 분명했지만, 이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밀봉된 마개를 열었다.
입구에서 흐릿한 황금빛 연기가 번지는 사이.
“…너무 늦은 게 아니면 좋겠는데.”
나지막이 읊조리며 손을 내민 이안이, 디아나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황금빛 액체를 흘려 넣었다.
금빛 액체가 남김없이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어리둥절하면서도 망연자실하게 지켜본 것도 잠시.
“……!”
곧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루시아의 눈이 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디아나의 목덜미에 황금빛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핏줄이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얼굴을 향해 번져나갈 뿐만 아니라, 아래쪽의 혈관들도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갑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몸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이게… 대체….”
황금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변한 디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읊조린 루시아의 시선이, 이윽고 옆으로 돌아갔다.
차마 눈에 제대로 담지도 못하던, 옆구리에 뚫린 구멍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아아아…
어느새 그사이로도 황금빛이 번지고 있었다. 내부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지만, 황금빛은 가상의 혈관을 그리듯 실처럼 번져나가는 중이었다.
그건 환부 주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자리를 따라 황금빛이 맺히더니, 조금씩 꿈틀대며 간격을 좁히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효과가 있나 보네.”
디아나의 얼굴을 뚫어질 듯 응시하던 이안이, 비로소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전히 황금빛이 선명한 가운데, 조금씩 선명해지는 숨소리를 들은 것이다.
-좀 전에 한 말은 취소하지… 시간 낭비가 아니었네….
요그가 힘없이 속삭이는 가운데, 이안은 긴장이 풀린 듯 땅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대체 뭔가요?”
“위대한 분이 주신 선물이지.”
텅 빈 유리병을 들며 대답한 이안이, 병을 쥔 손을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아니라 남에게 쓰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