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88
488화
“……!”
눈을 치켜뜬 루시아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었다.
붉게 아른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촉수에 꿰뚫린 디아나의 모습이 각인된 것처럼 선명하게 새겨졌다.
“컥….”
정작 디아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한순간 뻣뻣하게 굳어진 채, 치켜뜬 눈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녀의 좌측 등허리부터 우측 옆구리를 관통한, 어른 팔뚝만 한 굵기의 보랏빛 촉수.
뿌득… 뿌드득…
붉게 물든 촉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디아나를 관통한 채로 위로 떠올라, 그녀를 유사에서 뽑아낸 것이다.
바들바들 떨리는 디아나의 몸이, 활처럼 뒤로 젖혀진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쿨럭… 꺽….”
디아나의 가면 사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축 늘어진 백금발을 끈적하게 적셨다.
그 와중에도 음미하듯 루시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비로소 천천히 입을 벌렸다.
쩌저적…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가 기괴할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그사이에도 촉수를 따라 떠오른 디아나의 몸은, 이제 이안의 머리 위에 있었다. 미소 짓듯 네 개의 눈을 가늘게 뜬 이안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쩍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는 디아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진 핏물이 그 사이로 사라지는 가운데.
“꺽… 끅….”
경련하는 디아나의 모습이 루시아의 동공에 가득 찼다.
“…안 돼.”
루시아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물든 건 그때였다.
동시에 망토 자락이 펄럭이며 치솟고, 활짝 편 그녀의 양손에서 새하얀 불길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루시아가 양팔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
새하얀 불길이 용의 숨결처럼 뿜어져 나갔다.
주위로 안개처럼 번지던 혼돈이 단숨에 증발하고, 불길에 휩쓸린 이안의 몸이 한순간 휘청댔다.
그 와중에도 불길이 몸통 한복판에 집중되는 건, 디아나까지 태워버리지 않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콰르르르륵-
이윽고 광기의 성화가 잦아들었다. 손을 내뻗은 루시아가 피를 왈칵 토하며 비틀댔다. 그 와중에도 희게 물든 눈은, 증발하듯 흩어지는 불길 사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
몸 곳곳에 새하얀 불꽃이 이글대는 이안 호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르르…
그는 가죽 표면이 타르처럼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건 넘실대는 촉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몸 곳곳에 일렁이는 새하얀 불꽃은 아직도 그의 몸을 녹이고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다지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이성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았지만.
“크르르….”
어쨌건 그는 다시 턱을 닫으며 루시아를 돌아보고 있었다. 헐떡대며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루시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래요… 차라리….”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흰 불길이 아른거렸다.
“차라리… 나부터 죽여요….”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보랏빛 안개가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그의 몸 곳곳을 태우던 성화가 잠기듯 사그라들었다. 디아나를 관통한 촉수가 휙 호선을 그린 건 거의 동시였다.
철퍽-
모래 위로 떨어진 디아나가 맥없이 널브러졌다. 그녀는 가늘게 경련할 뿐,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붉게 물든 옆구리의 구멍에서 피와 내장 조각들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솨아아-
보라색 안개를 두른 이안은, 이미 허공을 가르며 루시아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널브러진 디아나를 돌아보던 루시아의 눈매가, 울듯이 일그러졌다.
“아아아아아-!”
망토가 치솟듯 너풀대고, 그녀가 다시 양손을 내뻗었다. 새하얀 불길이 이안에게로 뿜어져 나갔다.
넘실대는 보라색 안개 사이로 이안의 손아귀가 설핏 드러난 건 거의 동시였다.
콰과과과과과-
자욱하게 번진 보랏빛 안개가 새하얀 불길을 대신 뒤집어썼다.
불길이 좌우로 넘실대며 흩어졌다. 안개 역시 증발하듯 흩어지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이안을 멈추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보다 성화가 잦아드는 게 더 빨랐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루시아가 양팔을 툭 떨궜다. 그녀의 코와 입 주위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새하얀 신성 역시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흐릿했다.
사아아….
하지만 넘실대는 보랏빛 안개 너머, 이안의 안광은 여전히 평온했다.
오히려 흡족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루시아가 토해낸 분노와 슬픔. 그리고 광기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이.
자욱한 안개가 넓게 번지면서, 그 사이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이안의 전신이 드러났다.
여전히 아주 느긋하게 루시아에게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하….”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루시아의 표정이, 문득 평온해졌다.
체념한 것 같기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마력을 머금고 넘실대던 불사자의 두건 망토가, 그녀의 몸을 가리며 착 가라앉았다.
그 아래의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듣고 계시다면, 죄책감 가지지 마세요.”
그녀의 시선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네 개의 안광을 여전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광이 슬며시 가늘어지는 가운데, 입꼬리를 설핏 말아 올린 루시아가 덧붙였다.
“절 죽이는 건, 이안 님이 아니니까.”
동시에 그녀의 망토 자락 좌우가 위로 솟아올랐다. 루시아가 양팔을 치켜든 것이다. 다가올 처형을 기다리듯이.
이안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촤악-
동시에 촉수 한 가닥이 화답하듯 뻗어 나왔다. 하지만 디아나에게 그랬듯 루시아의 몸을 관통하지는 않았다.
스으윽-
오히려 아주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망토 위로 칭칭 감았다.
망토 표면에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리고 루시아의 눈동자에도 여전히 신성이 맺혀 있었지만, 촉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
촉수에 딸려 올라가면서도, 루시아는 여전히 이안의 안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흡족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쩍- 쩌적-
동시에 그의 턱이 점점 벌어졌다.
좀 전과 달리, 이빨들이 잇몸 속으로 파고들듯 작아지고 있었다.
루시아를 산 채로 삼키려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쩍 벌어진 아가리 너머로 보랏빛 심연이 부드럽게 꿈틀댔다.
“…….”
루시아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점점 가까워지는 심연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쩍 벌어진 아가리가 그녀의 바로 앞까지 가까워진 순간.
펄럭-
축 늘어져 있던 망토가 한순간 살아있는 것처럼 너풀댔다. 망토 자락에 가려져 있던 팔이 드러나는 사이, 루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빌린 건 돌려드릴게요.”
그녀의 손아귀에는 작은 목함이 들려 있었다. 표면에 아주 정교한 문양들이 새겨진, 성혈함.
“……!”
만족스럽게 가늘어지던 이안의 눈매가 꿈틀대는 가운데, 루시아가 온 힘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쉬아악-
그녀의 손을 떠난 성혈함이, 그대로 쩍 벌어진 보랏빛 심연 너머로 사라졌다.
영겁 같은 찰나. 그 너머에서 무지개 같은 빛이 번졌다.
이안의 네 안광이 일그러진 건 거의 동시였다. 일곱 가지 색은 삽시에 하나로 합쳐져 새하얗게 물들었다.
“—-!”
찬란한 빛을 토해내는 이안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절규가 터져 나왔다.
***
그는 끝없는 어둠 속을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아주 따듯하고 고요한. 동시에 안락한 어둠이었다.
‘…….’
몽롱한 와중에도, 그는 이 낮잠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랐다. 그만큼 달콤하고 평화로웠다.
사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감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평화는 이번에도 그리 길지 않았다.
“……?”
분광기로 반사한 듯한 형형색색의 빛이, 삽시에 어둠을 물들이며 눈부시게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감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어둠을 뒤덮으며 산란 되던 빛이 삽시에 하나로 뒤섞였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고, 뒤이어 고장 난 형광등처럼 명멸했다. 아주 불쾌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변화였다.
“말했잖아. 무모한 계획이었다니까.”
옆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멸하는 세상 한복판, 보라색 눈의 소년이 그의 옆에서 함께 유영하고 있었다.
“…요그?”
“다행이네. 날 기억하고 있다니.”
소년, 요그가 씩 미소 지었다.
“영혼이 아예 곤죽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말이야.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잖아?”
이안의 뇌리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단편적인 기억들이었다.
적갈색으로 일렁이는 답답한 어둠. 뾰족한 가시와 산성 액. 몸을 찢어발기는 촉수들. 휘몰아치는 암녹색 궤적들과 뻗어 나가는 뿌리들. 밀려들던 달콤한 혼돈과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그리고, 어둠.
“방해받고 싶지 않겠지. 알아. 나도 방금까지는 그랬으니까. 영혼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야.”
그 사이를 비집고, 요그의 느긋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네 혼돈은 영악해. 너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고. 네 영혼을 부수거나 흡수하려 드는 게 아니라, 네가 가장 원하던 걸 제공할 줄 누가 알았겠어? 평화와 휴식 말이야.”
재미있다는 듯 키득댄 녀석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친구. 이제 그 부질없는 미련은 버리는 게 어때? 루시가 만들어 준 기회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루시….”
읊조리는 그의 뇌리로 붉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를 가진,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가 떠올랐다.
그녀와 닮았지만 훨씬 더 성숙하고 날카로운, 흉터가 많은 또 다른 얼굴이 뒤를 이었다.
“그래. 지금 이게, 그 녀석에 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기회거든.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따끔한 기회지.”
검은 털의 수인. 은발의 요정. 주근깨 가득한 청년과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 동글동글한 난쟁이 소녀와 곰이 후려친 것 같은 흉터가 새겨진 험상궂은 얼굴까지, 번쩍임 속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의식은 점점 더 명료해지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뭐, 이대로 계속 잠들어 있던가. 방해가 오래가지는 않을 테니까. 곧, 루시도 우리와 하나가 될 것 같고 말이지.”
“…하나가 되다니?”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과 함께, 이안이 물었다.
요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 혼돈도, 너만큼이나 루시를 좋아하는 것 같거든. 이 와중에도 죽이지 않고 살려두고 있을 만큼. 권속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거겠지. 그렇게 되고 나서도, 우리가 알던 그 귀여운 녀석일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
이안이 말을 잘랐다. 멈칫한 요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네 의지가 필요하지. 아주아주 강한 의지 말야. 물론 지금은 그런 게 아니라도….”
거드름을 피우듯 내뱉은 요그가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너를 도와줄 조력자가 곁에 있지만.”
평소와 달리, 이안은 생각도 의심도 하지 않고 곧바로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을 마주 움켜쥐면서, 요그가 미소 지었다.
“드디어 나를 믿어주다니. 감동적인걸.”
동시에 요그의 몸이 명멸하는 빛의 한복판으로 화살처럼 뿜어져 나갔다. 그건 녀석의 손을 쥔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번쩍이는 빛이 이안의 시야를 가득 뒤덮고, 뒤이어 무수히 많은 빛의 직선으로 화했다. 손아귀의 감각만이 선명할 뿐, 어느새 요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뻗어 나가는 직선 너머, 보랏빛으로 넘실대는 심연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
그 너머에서 분노와 고통에 찬 포효가 어렴풋이 메아리쳤다.
그게 자신이 토해내고 있는 비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구름이 걷히듯 보랏빛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익숙한 광경이 드러났다. 잿빛의 사막과 넘실대는 촉수들. 그리고 눈 부신 빛.
“—-!”
다음 순간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동시에 몸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비명과 함께 빛을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신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고, 등에 돋아난 촉수들이 발작하듯 넘실댔다.
“……!”
그사이에 칭칭 감긴 형체를 확인한 순간,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루시아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출렁대는 촉수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온 얼굴이 피범벅이긴 했지만,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였다. 아마도 몸을 감싼 불사자의 두건 망토 덕분이리라.
몸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이안은 루시아를 감싼 촉수를 멈추려 했다.
“—-!”
그의 입에서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가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느슨하게 풀어지던 촉수가 다시 허공을 가르며 루시아의 몸을 칭칭 감쌌다.
혼돈의 의지일 터였다. 이안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이리라.
-나도… 도와주지… 친구…
그때, 요그의 속삭임이 번졌다. 아주 흐릿하고 억눌린, 고통을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대답 대신 촉수에 의식을 집중했다.
쿠구-! 쿠구-
불현듯 정수의 고동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넘실대는 촉수들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루시아를 움켜쥔 촉수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촉수가 스르륵 벌어지고, 녀석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안 님?”
바닥을 나뒹군 루시아가, 불현듯 읊조렸다. 그의 입이 쩍 벌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
분노와 고통이 뒤섞인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팔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면서 루시아에게 다가가려 했다. 움찔댄 건, 이안이 반대로 멈춰 서려 했기 때문이었다.
‘샴쌍둥이가 이런 느낌인가…?’
하나의 몸을 두 개의 머리가 통제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보랏빛 안개가 주위로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두 의지가 육체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친구….
요그의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녀석의 조언이 무슨 의미인지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몸속을 태우는 듯한 고통과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으니까.
이 신성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정수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날 벗으라고.
요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했잖아…? 넌 지금, 혼돈과 융합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방법을 알려 주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왼손을 움직여 자신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가면을 썼으니 다시 벗으면 된다는, 단순하고 본능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어둠에 잠긴 시야가 번쩍이며 명멸하는 가운데,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꾸드득….
뾰족한 손끝이 얼굴 가장자리를 파고들었다. 정수의 울림이 선명해지고, 그의 입에서도 분노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냥 계속해. 내가… 맞춰주지….
이안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였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저 손아귀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럴수록 그의 손이 점점 더 깊숙이 박혀 들었다.
꽈지직….
몸속을 태우는 듯한 감각만큼이나 선명한 고통이 느껴졌다. 동시에 반대쪽 손이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누군가 본다면 아주 괴상한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고 여길 터였다.
팔뚝이 조금씩 으스러지고 있었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한 고통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건,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었다.
“—-!”
정수의 절규가 전신을 울리는 가운데,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안면을 뜯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