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015
1014
“프로아 왕국….”
알렌 국왕은 타이칸의 제안에 그 이름을 되뇌었다.
삼촌.
알렌 국왕은 지난번 에서의 인연으로, 지크를 삼촌이라며 믿고 따랐다.
그래서 내전으로 인해 국토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도 프로아 왕국에 원조를 보내는 등의 은혜 갚기를 잊지 않았었다.
그러나….
“프로아 왕국은 본국의 요청에 응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타이칸 총사령관.”
알렌 국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며칠 전 우리의 상황이 그나마 좋을 때도… 프로아 왕국은 침묵했습니다.”
알렌 국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주일 전 이 막 쳐들어왔을 때, 알렌 국왕은 프로아 왕국에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프로아 왕국은 키예프 왕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 현재 국왕 전하께서 부재중이십니다. 그래서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프로아 왕국의 국왕 직무 대리인인 미켈레는, 그렇게 말하며 키예프 왕국의 요청을 거절했던 것이다.
미켈레 입장에서는, 국왕인 지크의 승인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없기도 했고.
“한 번만 더 도움을 요청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타이칸이 재차 알렌 국왕에게 건의했다.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국왕은 절대로 우리를 저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인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뭔가 사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국왕이 부재중이었다지만, 지금은 돌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연락이라도 해보십시오. 지금은 오직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알렌 국왕은 타이칸의 강력한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프로아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물론 수도인 오데사가 포위당한 상황인지라, 이제 와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딱히 실효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말라 죽거나 순순히 항복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마지막으로 연락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
한편, 지크는 중간계로 복귀하자마자 브륜힐트와 베르단디를 만났다.
“고생하셨어요, 여보.”
“아바마마! 보고 싶었사옵니다!”
브륜힐트와 베르단디는 지크를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뭉클!
지크는 그런 사랑스러운 처자식을 바라보며 감정이 차올라서, 마음속이 시큰해졌다.
마왕이 되는 바람에 중간계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아빠랑 같이 점심 먹을까? 우리 딸?”
지크가 베르단디를 안아 들며 물었다.
“네에!”
베르단디는 얼굴 보기도 힘든 아버지가 같이 점심을 먹자는 이야기에 크게 소리쳐 대답했다.
잠시 후 지크는 브륜힐트와 베르단디를 데리고 오랜만의 점심 만찬을 즐겼다.
그런 다음에는 늦가을의 선선한 공기와 함께 티타임을 갖기 위해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향긋한 차와 달콤하고 고소한 베이커리들을 즐기던 중.
“전하를 뵙습니다.”
미켈레가 다가와 지크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전하. 잠시….”
“나중에.”
지크는 미켈레가 보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거의 2주 만에 프로아 왕국에 복귀해서 브륜힐트 그리고 베르단디와 더불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데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보, 가보셔도 돼요.”
브륜힐트가 지크에게 말했다.
“아뇨.”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음으로써, 거절의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지금은 싫어요.”
“하지만….”
“이거 먹어봐요. 맛있어요.”
지크는 브륜힐트의 접시 위에 자신이 먹던 케이크 한 조각을 올려주며, 말을 돌렸다.
“기다리겠습니다.”
지크의 행동에 담긴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던 미켈레는 조용히 물러났다.
‘지금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지크는 가족과의 소중한 티타임을 충분히 즐길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로부터 2시간 뒤.
“무슨 일이야?”
지크는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던 미켈레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하. 키예프 왕국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키예프 왕국? 알렌이야? 아니면 타이칸이야?”
“둘 다입니다.”
“음.”
지크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신성동맹?”
“맞습니다.”
미켈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전쟁인가.”
지크 역시, 마우레키온 제국이 정신없는 틈을 타 이 크나큰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겨울인데.”
지크는 요즘 들어 부쩍 싸늘해진 밤바람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겨울이 오기 직전이었다.
눈발이 날리는 뉘르부르크 대륙.
이제 언 땅에 뜨거운 피가 쏟아지리라….
“피가 많이 흐르겠어.”
“예, 전하….”
미켈레가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단 하루도 전쟁이 멈출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본국의 상황은?”
“신성동맹의 경제 보복으로 인해 자금 흐름이 좋지 못합니다. 단, 식량을 비롯한 비축 물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쳐날 정도입니다. 못해도 10년은 거뜬히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양입니다.”
“그래? 알겠어. 앞으로도 식량이나 물자는 걱정하지 마.”
“예?”
“조만간 마계에서 공물이 올 거야.”
“마왕이 되셨단 보고를 전해 받긴 했는데, 설마….”
“마계 제5구역과 6구역이 우리 식민지야. 메타트론이 다스리는 제7구역은 우리 동맹이고.”
“……!”
“마계라서 실질적인 전력에 보탬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물자는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어. 추진하던 사업들 계속하고, 자금도 계속 풀어. 어차피 돈은 넘치니까.”
미켈레는 지크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놀라서,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왕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마계의 특정 지역들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릴 줄이야….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전하?’
미켈레는 지크의 불가사의한 업적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지크가 입을 열었다.
“지금 키예프 왕국이 위험하다, 이거지?”
“예, 전하. 이미 일주일 전에도 긴급히 도움을 요청해왔는데, 전하께서 부재중이시라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상황이 어때?”
“수도 오데사까지 포위당한 상태입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3일입니다.”
“알겠어.”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준다고 해.”
“그럼 지금 즉시 워프 게이트를 준비하겠습니다. 오스칼 총사령관에게 전군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고 키예프 왕국에 파견을….”
“아니.”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군대는 안 보내.”
“예?!”
미켈레는 지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 귀를 의심했다.
도와준다고 해놓고 군대를 보내지 않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일단 대기만 시켜 놔. 근데, 파병은 계획에 없어.”
“자세히 설명을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중에.”
지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꾸벅꾸벅 조는 베르단디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
같은 시각.
“총사령관 각하.”
타이칸은 급히 찾아온 통신병에게 보고를 받았다.
“프로아 왕국에서… 본국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 내용! 내용이 어때?”
타이칸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통신병을 바라보았다.
“프로아 왕국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합니다.”
“오오!”
타이칸은 기대하던 답변이 받게 되자 환호했다.
프로아 왕국.
이제는 명실상부한 강국의 반열에 오른 신흥 국가.
게다가 뉘르부루크 대륙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또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가 다스리는 국가.
그런 강국이 지원해주겠다고 하니 타이칸이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 하오나….”
그런데 막상 통신병의 얼굴은 어두웠다.
프로아 왕국이 도와준다는데,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답변이 조금 미묘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타이칸은 그런 통신병의 기색을 읽어내고는 얼굴을 굳혔다.
어째 원하던 대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도움을 준다는 병력의 규모가….”
“군단급이 아니라 사단급이라고 하던가?”
“아닙니다.”
“그럼 연대급?”
“아, 아닙니다.”
“그럼?”
“단, 두 명이랍니다….”
“뭣이…?”
타이칸은 제 귀를 의심했다.
현재 키예프 왕국은 수도인 오데사가 포위되어 풍전등화의 위기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군단급도 아니고 사단급도 아니고 연대급고 아닌, 단 두 명의 지원군만 보내겠다니….
이건 키예프 왕국을 조롱하는 꼴밖엔 되지 않았다.
“지크 너 이 새끼….”
타이칸은 지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으르렁거렸다.
“그냥 못 도와주겠단 말 한마디면 될 걸… 꼭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모욕을 줘야만 했던 거냐….”
사실 타이칸의 입장에선, 지크가 도움을 거절한다고 해도 탓할 수가 없었다.
지크는 과거 당시에도 알렌 국왕을 도와주었고, 당시 강대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침공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니 지크가 이번에 도움 주기를 거절한다고 해서 야속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원군을 고작 2명만 보내겠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냥 거절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조롱이나 다름없는 짓을?
“지크… 너 그렇게 안 봤는데….”
그래서 타이칸은 믿었던 지크가 그렇게 나오자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타이칸은 지크를 상대로 분노하는 대신에, 완전히 체념해버렸다.
욕하는 데 낭비할 힘도 없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이 공격해올 테니, 지금은 최후의 저항을 위한 공성전을 준비할 때였기 때문이다.
***
다음 날 오전.
키예프 왕국은 의 침공에 맞서 결사항전의 자세로 버티기에 들어갔다.
왕실뿐 아니라 수도 오데사의 신민들 역시 항복보다는 결사항전을 선택하자는 여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기에,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의 대가는 참혹했다.
펑! 퍼엉!
끝도 없이 쏟아지는 포탄.
“으악!”
“으아아아아아악!”
“키, 키예프를… 위하여… 커헉!”
동이 트자마자 시작된 전투는 점심때가 다 되어서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헉, 허억….”
타이칸은 성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른 새벽부터 지금까지 단 1분 1초도 쉬지 못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들을 처치하러 다녔더니, 진이 다 빠졌던 것이다.
후들후들!
오죽하면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의 근육에 경련까지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일신의 이름으로!”
“창조주의 징벌을 가하리라!”
“이교도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조리!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의 병력들은 그 끝을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 정도였다.
그들은 죽은 아군의 시체를 밟으면서 성벽을 기어오를 정도였으니,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오늘 저녁까지 버티는 게 불가능할지도….’
타이칸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래도 3~4일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측에서 병력 손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몰아붙이니, 오늘을 넘기기도 힘들 것 같았다.
‘아아,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
그렇게 타이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절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였다.
“야, 뭐 하냐.”
누군가 타이칸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설마 벌써 지친 거냐?”
“뭐야.”
타이칸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너, 너어…!”
지크.
그가 햄찌와 함께 성벽 위에 걸터앉은 채 씩 웃고 있었던 것이다.
“너 뭐야? 니가 왜 여기 있어? 지원군 못 보낸다면서…?”
“내가 언제 지원군 못 보낸다고 했냐?”
지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명 보낸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서, 설마… 그 두 명이란 게 너랑 햄찌를 말하는 거냐?”
“아니?”
지크가 고개를 저었다.
“얘는 명이 아니라 마리고.”
지크가 햄찌를 가리키며 말했다.
“캬아아악! 주인 놈 돌았냐! 햄찌 마리 아니다! 캬아아악! 누굴 축생 취급하냐!”
햄찌는 지크가 자신을 가축 취급하자 화가 잔뜩 나 털을 곤두세웠다.
“또 한 명 더 있다. 아, 걔도 명은 아닌가? 개인가?”
“도대체 뭔 소리야?”
“보면 알아, 쨔샤.”
지크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타이칸은 지크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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