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29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9화
심사위원들은 금방이라도 ‘그럼 너희, 래빈이가 다 잘못했다는 거야?’ 같은 대사를 칠 분위기였다.
그러니 말을 잘 골라야 했다.
‘상황 수습이 아니라 그냥 사실 나열처럼 들려야 된다.’
“네. 래빈… 이가 편곡이 가능하니까 편곡자님과 상의해 줬고, 편곡 방향은 저희가 다 같이 의견 내서 정했습니다.”
“…!”
김래빈이 움찔거렸다.
‘넌 입 열면 안 되고.’
다행히 류청우가 곧바로 치고 들어왔다.
“맞습니다. 말씀 주신 문제도 저희가 다시 한번 다 같이 이야기해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래서 팀전 당일에는 최고의 무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
살렸다.
나와 류청우는 눈치껏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은 여러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질책할 타이밍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다행이었다.
“그럼 지금 편곡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다른 팀보다 시간적으로 굉장히 뒤처질 거예요. 할 수 있겠어요?”
“해내겠습니다. 우리 할 수 있지?!”
“네!”
“할 수 있습니다!”
눈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놈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대답을 흐리진 않겠지.
다행히 이번에는 트롤러도 정신 차리고 힘차게 대답했다.
심사위원 영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런데 이 시간 제약 속에서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점, 결과는 여러분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 꼭 알고 계셔야 해요.”
“맞아. 바꾼다고 꼭 지금보다 좋아지리란 보장은 없어.”
그렇다고 안 바꿔서 무대가 별로면 ‘왜 피드백 받고도 안 바꿨지?’ 같은 반응이 나오겠지.
그리고 ‘도전정신이 없다’는 식의 분량이 들어갈 테니, 사실 의미 없는 말이었다.
결국, 뭘 하든 결과에 맞춰서 과정이 편집되고 평가되는 것이다.
참가자들 모두 암묵적으로 아는 사실이기에, 팀에 군기와 긴장감이 깃들었다.
“예. 명심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류청우의 대답이 상황을 끝마치는 것 같은 그때,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마이크를 든 원곡자였다.
“아 예…. 말씀하세요.”
심사위원들은 갑자기 끼어든 원곡자에게 약간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원곡자는 그윽한 눈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의 무대에는… 곡이 가진 힘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
이야기 다 끝난 판에 뒤늦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은은하게 당황한 사람들을 두고 원곡자는 계속 입을 털었다.
“이 곡은,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와 열정을 불어 넣어줘야 하거든요? 근데 여러분, 잘생기고 춤 잘 춘다고 그게 전해지는 게 아니에요.”
“…….”
아, 예…….
“저희 활동할 때는, 진짜 그 느낌을 주려고 했거든요. 여러분 지금 좀 유명해졌다고 그런 곡에 대한 예우를 잊으면 안 돼요.”
아직 데뷔도 못 한 오디션 프로 참가자들한테 저런 말까지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나.
애들 후려치는 꼰대 발언을 조언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자아도 좀 비대한 것 같고.
하지만 저놈 반응도 편집에 들어갈 테니 신경 써야 한다는 게 골 아픈 지점이었다.
안 그래도 편곡 대안을 쥐어 짜내야 하는데 저 헛소리까지 참고해야 하나.
짜증 났지만 반박해 봐야 ‘불쌍한 무명 아이돌 원곡자’에게 곡 뺏는 그림만 나오니 다들 순순히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뭐…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 * *
다른 팀들까지 모두 중간평가 피드백 끝난 후, 마침내 편곡 재토의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트롤러가 우물쭈물 김래빈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미안해….”
“…….”
저거 카메라 앞에서 사과하게 둬도 되나?
하기야 이미 팀 단위 커버는 쳐놨으니, 본인 실수 수습은 알아서 할 일이긴 했다.
김래빈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편곡을 도맡은 건 사실이고.”
사실 ‘아니 X발 니가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요’라고 대답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어쨌든 류청우는 둘 모두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끝냈다.
“고생했다. 얘들아, 우리 준비되면 바로 편곡 얘기 다시 해보자.”
참고로 여기서 ‘준비’는 제작진의 카메라 세팅이었다.
“네!”
막간의 자투리 시간에 참가자들은 기합이 든 상태로 잠시 흩어졌다.
중간평가가 아슬아슬했던 탓에 썩 표정들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끝에서 수습이 된 탓인지 아직 희망이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대안이 나와야 그 희망도 쓸모가 있단 말이지.’
딱 보니 이거다 싶은 편곡 방향을 생각해 낸 놈도 없고, 그냥 말하다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같았다.
가진 거 없이 행복회로 돌리는 중이란 뜻이다.
‘앞날이 썩 밝진 않군.’
“저기, 박문대 형.”
“어, 네.”
구석에 앉아서 혼자 머리 좀 굴려보는 중에, 김래빈이 말을 걸어왔다.
‘의왼데.’
지난 사흘 동안도 별로 대화해 본 적 없는 놈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애초에 사흘간 누구랑 떠든 적이 거의 없었다.
연습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놈의 잡담을 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어쨌든 김래빈은 엉거주춤 옆에 꿇어앉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뇨. 뭘.”
아까 트롤러 말 잘라줬다고 고맙다는 거겠지.
“그런 상황에서 다른 분이 도와주신 건 처음이라…….”
역시 그랬군.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김래빈 입장에서도 걱정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팀에 적응을 못 해서 싸우는 분량이 들어가면, 여론 상 회복 불능 선고가 뜰까 봐.
‘어쩐지 너무 저자세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구구절절 이야기가 흐른다.
“제가 지난 1차에 이어서 팀워크가 결여됐다는 평을 또 받을까 봐 많이 고민했는데, 박문대 형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 역시 팀원으로 제일 먼저 팀워크 좋은 분을 영입했던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
설마 박문대를 맨 처음 픽업한 게 ‘팀-워크’ 때문이었단 말인가.
질문해 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예. 팀원들을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우해 주시는 걸 봤습니다. 물론 가창력도 훌륭하셨고요.”
“……어, 그래요. 고맙습니다.”
방송에서 편집으로 박살 나 놓고 또 방송 내용을 믿었다는 점이 아주 독특한 놈이었다.
그것도 초반에 오지게 사회성 없게 편집된 박문대의 팀워크 능력을 믿다니…….
정말 놀랍다. 차라리 큰세진을 뽑았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아, 거긴 또 류청우랑 리더 역할이 겹쳐서 안 뽑았나.’
나름대로는 기준이 있나 보지.
황당해하고 있자니, 김래빈이 또 말을 걸었다.
“아, 형. 편하게 말씀하셔도 전 괜찮습니다.”
“…음, 그래.”
뭐, 등수 높은 놈이랑 말 터놓는 건 나쁠 게 없었다.
나는 순순히 대답하다가, 지금 상황에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편곡 말인데, 혹시 뭐 생각하는 거 있어?”
“…사실, 좀 곤란한 상황이긴 합니다.”
김래빈의 잘 나가는 양아치 같던 인상이 좀 누그러지며 우울한 표정이 됐다.
“다시 편곡에 들어간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얼마나 고쳐야 할지도 문제니까요.”
이미 맞춰서 다 연습해 놓은 탓에 얼마나 건드려야 마감일을 맞출지 모르겠다는 말이군.
“많이 고치면 안 될 것 같은데… 지금 수정사항이 너무 중구난방이라 통일성이 없어서 뭘 손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특별히 아이디어도 없고 뭘 고칠지도 못 정하겠다는 뜻이군. 나랑 똑같았다.
김래빈은 한번 성토를 시작하니 멈출 수 없다는 듯이 줄줄 걱정을 중얼거렸다.
“원곡자분의 조언도 반영해야 할 텐데, 사실 ‘용기와 열정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그건… 진짜 그렇지.
조언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이돌이 무슨 쌍팔년도 미국만화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용기와 열정을 어떻게 불어넣냐.’
“……?”
잠깐. 방금 뭔가… 깨달은 것 같은데.
나는 직전의 생각을 복기해 보다가, 이상한 아이디어 하나를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아이디어가… 이 상황과 딱 들어맞았다.
원키를 그대로 써도 소화할 수 있도록 편곡이 가능한 컨셉 아이디어.
이미 연습한 응원단 컨셉의 안무를 많이 안 고쳐도 되고, 심지어 그놈의 ‘용기’와 ‘열정’도 잡을 수 있다.
어쩌면 기가 막힌 해결책인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너무 과해.’
그랬다. 그냥 과한 게 아니라, 유치찬란해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럼 안 고치는 것만 못했다. 누구 하나만 잘못해서 무대에서 마가 떠도 그대로 숙연해질 게 분명했다.
어?
“…아니지.”
“저, 형?”
“잠깐.”
나는 김래빈의 되물음을 일단 무시했다.
대신 마침 자투리 시간이 끝나서 슬슬 돌아오는 팀원들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상태창!’
그리고 빠르게 팀원들의 스테이터스를 훑었다.
“……!”
다른 능력치는 몰라도, ‘끼’ 능력치는 전부 B- 이상이었다.
참고로 B등급에 들어섰다는 것은, 메인 포지션으로 써 먹을만한 수준의 능력치라는 말이다.
과연 등수 높은 놈들만 모인 팀답다.
‘이건… 되겠는데?’
어쩐지 심사위원들이 철 지난 응원단 컨셉을 별로 안 까더라.
“래빈아. 편곡 말인데.”
“예, 예?”
나는 당황한 김래빈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를 일단 뱉었다.
“예……?”
김래빈은 처음에는 더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부가설명이 붙을수록 점점 침착해지더니, 곧 삼백안을 번쩍번쩍 빛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도 반응이 좋았다.
“자, 잠깐만요.”
김래빈은 연습실 한 편에 설치된 건반으로 달려가더니, 뭔가를 뚝딱뚝딱 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본 김래빈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특성 : 마에스트로(A)]: 필요한 건 작은 계기일 것이다.
영감을 받을 시, 창작 속도 +120%
“…….”
선아현도 그렇고, 역시 상태창 금수저가 따로 있다.
‘다른 놈 특성을 복사해 오는 기능은… 없나? 웹소설에서 보면 자주 나오던데.’
한탄하고 싶었지만 일단 할 일을 해야 했다. 나는 얼른 상태창을 불러왔다.
그리고 남은 포인트를 ‘끼 스탯’에 투자했다.
이걸로 나도 B-에 진입한 것이다.
‘좋아. 수치는 맞췄고.’
“문대야, 래빈이 왜 갑자기 건반으로 갔어?”
다가온 류청우가 건반을 뚱땅거리는 김래빈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박문대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컨셉 아이디어를 냈는데,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무슨 아이디어?”
“변신 히어로물이요.”
“…!?”
혼란스러운 류청우의 뒤에서, 차유진이 옆 사람에게 속닥거렸다.
“변신 혀로물이 뭐예요?”
경연 날짜까지 닷새 남은 시점이었다.
* * *
그리고 닷새 후 경연 당일.
의 2차 팀전이 진행될 무대 세트 건물 앞은 인산인해였다.
방청객의 숫자가 많이 늘어난 건 아니었다. 단지 치솟는 시청률과 화제성 지수 덕분에 앞에서 배회하며 소리라도 들어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막방도 아닌데 벌써부터 슬로건이나 포토 카드를 나눠주는 사람도 심상찮게 보였다.
‘와, 장난 아니네.’
한 여성이 어수룩한 몸짓으로 인파를 피해서 입장 줄에 섰다.
친구의 부탁으로 함께 방청객 신청을 넣었다가 본인만 당첨된 것이라, ‘그냥 가지 말까?’ 고민하다가 겨우 자체 휴강을 하고 온 사람이었다.
‘요새 워낙 유명하니까.’
물론 이 선택에는 ‘제발 우리 문대 어떻게 하는지만 좀 알려줘’라며 눈물과 밥으로 호소한 친구의 부탁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까지 좋나…?’
그녀도 SNS에서 금갈색 머리를 한 박문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제법 매력적이었으나, 저 정도로 좋아할 만큼 잘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밥도 얻어먹었으니 눈여겨 봐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드디어 건물 안으로 입장했다.
방청이 끝난 후 친구에게 박문대의 사진을 구걸하는 미래는 상상도 못 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