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11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11화
스티어 이세진.
개명하지 않은 배세진.
과거 마약 유통 혐의로 재판을 받고 항소했던 그 사람의 기억이, 지금 내가 파헤치는 시스템 속에 있었다.
‘…침착하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때, 시스템이 일종의 백업처럼 지난 삶의 기억을 저장해두는 것 같긴 했거든.
‘몇 번이나 스티어 시절 기억이 돌아오는 걸 이미 봤는데 이제 와서 놀랄 리가 있겠냐.’
나도 전에 시스템을 때려잡으면서 회사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기도 했고 말이다.
문제점은 이거다.
‘내가 대화를 해도 괜찮은 상황인가?’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대화가 가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였다.
평소였다면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갔을 확률이 높다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
몸까지 바꿔서 시스템에 강제 접속한 상황이란 말이다.
‘이대로 넘기면 X신이지.’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 봐야 이득이다.
-이세진 : 누구냐고 물었잖아.
마침 녀석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주변에 있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다.
‘…….’
그래.
나는 단말에 접속한 것처럼 정보 덩어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 큰달이 ‘박문대’에게 메시지를 보내듯이 천천히 글자를 보냈다.
저쪽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부터.
[저는 지금의 당신과 같은 그룹인 멤버입니다.]그 순간, 벼락이라도 떨어지는 것처럼 즉각 답장이 왔다.
-이세진A : 스티어?
그리고 한동안 데이터는 응답이 없었다.
마치 사람이 뜸을 들이듯이 꽤 존재감 있는 공백이 들어찬 후, 겨우 답변이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이세진A : 류청우?
‘…….’
엄밀히 따지면 그중 두 글자는 대충 맞다고 쳐줘야 하나.
그리고 여기서부터 설명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칼 같은 답장이 한발 먼저 도착했다.
-이세진A : 난 이제 스티어가 아니야. 그리고 스티어가 새 멤버를 영입한 적은 없고.
-이세진A : 같은 그룹이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구체적으로 정체를 밝혀.
‘…!’
이놈, 생각보다 상세하게 상황을 알고 있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나올 수 있을 만큼 배경지식이 있다는 건데.’
이상한 일이었다. 탈퇴하고 법정 싸움까지 간 마당에 이전 그룹 소식? 보통 신경도 쓰기 힘든 법이다.
그런데 이런 디테일까지 알고 있다는 건, 본인이 자체적으로 따로 찾아봤다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그 부분을 찔렀다.
-이세진A : 너부터 대답해.
단단하군.
도리어 때보다 덜 예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경계심은 그 이상이지만, 기본적으로 잘 동요하지 않는 것 같다.
‘흠.’
그렇다면 괜찮겠다.
나는 솔직하게 상황을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전 스티어가 아닙니다.]-이세진A : 뭐?
[지금 형은 스티어가 아니라 테스타라는 그룹으로 데뷔했거든요. 저는 그 그룹 소속입니다.]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해 봤다.
‘굳이 메시지 형태일 필요는 없지.’
언어로 정제하는 대신, 내가 건네주고 싶은 정보를 통째로 전송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상황에 관한 정보.
단말에 접촉한 채로 의식을 집중한다.
-이세진A : ‘형’? 그게 무슨….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정리할 것도 없이 날 것 그대로 단말에 흘러 들어갔다.
-이세진A : !!
‘믿기 힘든 이야기니까, 이게 차라리 효율적이다.’
압박감이 심했지만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아슬아슬한 선까지 정보를 넘긴 후, 단말에서 의식을 뗐다.
그리고 ‘이세진A’는 다른 답장 없이, 내가 보내는 정보를 가만히 받아들이고만 있는 것 같았다.
소화하듯이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이세진A : 그러니까.
-이세진A : 내가 다른 그룹으로… 데뷔했다고.
답변이 돌아왔다.
‘잘 통했군.’
내가 혀를 깨물 뻔하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집중력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예.]-이세진A : 그럼… 지금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데?
[그룹으로 잘 활동하고 계시죠. 그리고 어머님 성으로 개명하셨습니다. 배세진으로요.]녀석이 그룹을 탈퇴할 만큼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혈연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었다는 뜻이었다.
침묵이라기보다는 여백에 가까운 공란이 이어진 뒤에야 답변이 돌아왔다.
-이세진A : 잘살고 있는 거네.
상당히 담담한 반응이었다.
[열심히 살고 계시죠.]-이세진A : 나도 나태했던 적은 없어. 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른 거야.
‘…….’
나는 약간 갈등하다가, 대놓고 묻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모르는 척하는 것도 웃길 테니까.
[형은 자신이 잘살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마약 의혹에 엮여서 커리어를 말아먹고, 항소하며 버텼던 전 아역 배우 출신, 전 아이돌.
-이세진A : 꼭 그런 건 아니야. 날 믿었던 사람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니까.
-이세진A : 하지만 믿지 않았던 사람이 대다수였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
‘침착하군.’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심적으로 고통스럽다는 것이 드러나거나 물어본 나를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 아닌가.
하지만 ‘이세진A’로 표기되는 스티어 배세진은 동요 없이 단단한 어투를 구사했다.
‘애초에 데이터라 동요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디테일한 대화의 느낌이 전달될 리가 없지.
내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이세진A : 아무튼 알았어.
-이세진A : 이 대화는 그럼… 이미 이 상황에서 탈출한 내가 꾸는 꿈 같은 건가.
[꿈이요?]-이세진A : 그래. 내가 기억일 뿐이라면 이렇게 너랑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흥미로운 가정이었다.
‘확실히… 지금 배세진은 자고 있겠지.’
그 배세진의 의식을 바탕으로 이 스티어 배세진의 기억이 정보 덩어리에서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다…라.
그럼 지난 스티어 사례들과 바탕 원리는 똑같군.
‘어쨌든 자기가 기억일 뿐이라며 당황하지 않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스티어 배세진이 상당히 꼬인 인간일 것이라 예측했다. 아역 때부터 뭐 하나 제대로 풀린 일이 없이 아주 환경이 자신을 나락으로 꼬라박았지 않은가.
‘사람이 X발 그런 일을 겪고 당연히 성격이 파탄 나지.’
그러나 지금 대화 중인 이놈은… 차라리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같은 면모가 있었다.
[억울하진 않으신가요.]-이세진A : 억울했지.
-이세진A : 하지만 억울해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고.
이런 면들이 말이다.
아주 단단했다.
게다가 녀석은 역으로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세진A : 지금 상황이 안 좋은 것 같던데.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 대답할 테니까.
상상 이상으로 협조적이었다.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빠르게 질문을 뽑아내려던 순간….
‘흠.’
더 좋은 발상이 떠올랐다.
이 정도로 침착하고 멘탈이 견고하다면, 차라리 이 방법이 낫겠군.
[혹시 이건 어떠신가요.]나는 내 제안을 설명했고, 이세진A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곧 흔쾌히 대답했다.
-이세진A : 그래. 그게 좋겠어.
오케이.
나는 즉시 녀석의 단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시스템에서부터 뜯어내기 시작했다.
압박이 몸을 휩쓸었다.
* * *
야밤, 테스타의 숙소.
거의 손톱을 물어뜯을 만큼 불안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큰달은 마침내 기다리던 팝업을 받았다.
[지금 시스템에서 나왔어]“…!!”
바로 시스템에서 나온 테스타 박문대의 연락이었다.
드디어!
‘다행이다!’
큰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닦아낸 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외쳤다.
“이제 몸 도로 가져가세요. 아니, 시스템 절대 다시 들어가지 마세요, 일단!”
[잠깐만. 몸은 내일 아침까지만 이대로 있었으면 하는데, 괜찮냐.]“…?”
[할 일이 있거든.] [그쪽으로 간다. 좀 자고 있어.]“…??”
그리고 큰달은 엉겁결에, 몇 분 후 소리도 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테스타 숙소에 잠입하는 류건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
[자고 있으라니까.]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테스타 박문대.
류건우의 몸에 다시 들어간 그의 형은 다른 멤버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인 듯 입을 열지 않고 고요히 답변했다.
그리고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가며 말했다.
‘무, 무슨 준비요?’
류건우 얼굴이 표정 없이 고요하게 큰달을 쳐다보며, 팝업을 띄웠다.
[대화.]시스템 속에서 했던 스티어 배세진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혹시 다른 사람과 직접 대화해 보시고 싶은 생각 있나요.
-이세진A : 좋아.
그리고 한 시간쯤 후.
그 대화는 실제로 이루어지게 된다.
* * *
류청우는 자신을 흔드는 손에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맑지 않았고, 방은 어두웠다.
‘아직 새벽인 건가.’
그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억지로 깨워지는 것에 큰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다.
몇 년이나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연예계에서 일하려면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숙소인데 모르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순 없었다.
“…!”
안경을 쓴 냉막한 인상의 남성.
그 외관은 어딘가 자신과 닮아 있었다.
“누구….”
“류건우.”
“아.”
기억해야 하는 이름이다.
그는 순간 잠이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류건우, 테스타 박문대가 자신의 이전 삶이라고 밝혔던 사람.
‘그리고 내 친척.’
그는 조용히 자신에게 손짓했다.
“…?”
“따라와.”
류청우는 일단 반발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따라 이동했다.
목적지는 맞은편 방.
바로 박문대와 김래빈의 방이었다.
“혀, 형님.”
“Oh.”
이미 깨어난 듯, 김래빈과 차유진의 모습이 스탠드 불빛 속에서 보였다.
그리고 인선을 본 순간 류청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훅 돌았다.
‘우리뿐이구나.’
전부 스티어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긴장의 수위를 높였으나, 티 내지 않고 약간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
“저…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잠깐 몸을 바꿨어.”
그런 게 가능한지 여부를 물어볼 것도 없이, 류청우는 그가 테스타 박문대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긴 했다.
어투, 눈빛, 제스처, 보폭 같은 것들이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기 몸을 원래 박문대였던 사람이 쓴다고 했었지.’
대강의 상황 설명까지 떠올리자 류청우는 일단 이 사태를 인정했다. 어차피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도 없었으니까.
좀 의심스럽고 어색하긴 했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표출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대신 테스타의 리더였던 류청우답게 대꾸했다.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이렇게 형을 다시 보니까 신기하긴 하지만…. 그것보단 안전이 중요하잖아.”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맙고.”
류건우는 정답지를 고른 듯이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데 다시 보는 건 아니지.”
태연하게 말이 꺾인다.
“넌 류건우를 기억 못 하니까.”
“…….”
류청우는 동요하지 않고 대응했다.
“음, 시간이 너무 흘러서 잠깐 못 알아봤나 봐. 미안.”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류건우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넌 내가 ‘류건우’라고 대답하니까 아차 하던데.”
“…!”
실수했다는 듯이.
한마디로, 류건우를 못 알아본 것 자체를 의식한 것이다.
신경 쓴 거짓말이니까.
“류건우가 기억난다고 했던 거, 정말이냐.”
“…….”
침묵이 흐른 후.
류청우는 곧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보니까 영상이 있더라. 왜 최근 날짜로 이전 가족 여행을, 그것도 기억도 안 나는 친척을 중심으로 저장한 걸까 의아했거든.”
테스타 류청우가 박문대의 부탁을 받아 류건우를 찾아보던 시절.
그는 박문대가 알아봤던 자신의 가족 여행 비디오 속 ‘류건우’의 장면을, 혹시 쓸데가 있을까 싶어서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억해 뒀는데… 물어보니까 무심코 생각나서 말한 거야.”
고의가 아니었다는 차분한 설명.
충분히 설득력 있었으나, 류건우는 넘어가지 않았다.
‘테스타 류청우의 폰 갤러리를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본 거군.’
그리고 이곳에 정착하기 쉽게, 일부러 기억난다고 대답했다는 것까지 도출해 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기만적으로 느껴졌다면 미안해.”
류청우는 테스타 류청우답게 유순히 사과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부드러운 말투에 김래빈이 움찔거리는 것도 봤다.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할까 봐 경계가 날카롭게 서는 양가적 감정.
‘어쩔 수 없지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류청우는 다소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사과를 들은 류건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만적이란 생각은 안 해.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류청우는 짧게 안도했으나, 곧 류건우의 폭탄선언을 듣게 되었다.
“사실 여기서 내가 할 말은 별로 안 중요하거든.”
“…?”
“대리인으로 나온 거라서.”
그리고 그는 허공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그 사람 말을 전달한다.”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으나, 거기엔 그가 시스템으로부터 ‘뜯어서 상태창으로 구현한’ 새로운 메시지 팝업이 있었다.
-이세진A : 오랜만이다.
“나는 이세진이야. 스티어였던 이세진.”
그는 메시지 팝업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싸늘한 침묵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지금 무슨,”
“예…?”
되묻는 스티어 멤버들의 말을 뚫고, 류건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건. 전달할 말이 있기 때문이고.”
-이세진A : 너희가 내 생각을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 다른 건 말할 생각 없어.
-이세진A : 하지만 하나는 말해야겠어.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게 있어서.
류건우는 이세진A의 메시지 팝업을 보며, 또박또박 그 내용을 전달했다.
“나는 승소했어.”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충격받은 듯 멍한 얼굴의 사람들 사이, 스티어 배세진은 류건우의 입을 빌어 선언하듯이 말했다.
“2심에서도 불복해서 상고했고, 대법원까지 간 마지막 3심에서… 승소했어.”
메시지가 또박또박, 선언했다.
-이세진A : 그러니까 스티어는 마약 그룹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