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55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55화
“과연. 그렇게 진행됐군요.”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단을 보았다.
여기는 이 녀석의 원룸이고, 나는 귀가하는 대로 이 녀석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청려 선배님과 그런 기묘한 협업 체제를 구축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놈은 제법 침착한 척하지만 사실 대단히 몰입한 상태다. 자기가 따라온 음료수 마시는 것도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하게 듣더라고.
“하지만 청려 선배님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군요.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원이라니. 이론상으론 보안이 완벽하잖습니까.”
“…….”
“물론 오피스텔을 선뜻 내놓은 것은 시험하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한동안은 협조적이지만 비굴하지 않은 선을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해 보이는데요.”
왜 나보다 네가 더 열심히 분석하는 것 같냐.
나는 거의 축구 경기 중계하듯 내 상황을 중계하는 녀석을 어이없게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멍청한 선택은 안 한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잘 곳 마련해 줘서 고마웠고.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나갈 거야.”
“과연 신속하시네요. 알겠습니다.”
역시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놈답게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동안 내가 양심 없이 어린애 재산을 좀 뜯어먹긴 했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찰나, 녀석이 악수를 받으며 약간 어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낼 곳이 아니더라도 조력은 해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저한테 연락하실 이유가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거참. 끝까지 한결같은 녀석이다.
“무슨 소리야.”
나는 일부러 의아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넌 관계자잖아. 아지트에 관계자가 오는 건 당연하지 않냐.”
“…!”
“호출할 때 시간 되면 와라.”
“그러죠.”
안 신난 척하긴.
일이 없어도 돈 생겼으니 가끔 불러다가 밥이나 먹여야겠다.
‘뭐, 길진 않겠다만.’
나는 여전히 이곳 청려에게 딸린 시스템 중심부에 잘 접속해서, 그 기묘한 단말을 잘 분석 중이었다.
전처럼 우악스럽게 빨리하지 않는 건 최대한 안정적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가 또 시스템에 잠식되면 답 없지.’
청려와 정보 거래를 한 덕에 시간도 벌었으니 더 안정적이다. 게다가….
[심야의 마에스트로가 당신의 심신 안정을 기원합니다.]뭘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저 녀석들 덕분에 몸 상태도 꽤 괜찮아진 상태다.
‘초조해하지 말자.’
쓸데없이 재난영화 등장인물처럼 설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더해서 이젠 대충 이… 괴상한 채팅방식 소통법을 알겠다.
‘실시간은 맞는데 좀 어긋나기도 하고, 표현이 오묘해서 해석이 좀 필요하고.’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당신에게 인내를 요청합니다.]이건 분명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뜻이다.
이 녀석들이 미국에 있던 나를 서울로 날려 보내는 미친 짓을 해냈다는 걸 고려하면… 어쩌면 날 현실로 부를 방법을 찾아낸 걸지도 모르겠다.
‘꽤 괜찮아졌군.’
무일푼으로 개쓰레기 같은 몸 끌고 불법으로 도넛 튀기던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살만하지 않은가.
‘죽으라는 법은 없군.’
나는 피식 웃으며 짐이랄 것도 없는 옷 몇 벌을 싸는 걸로 이사 준비를 마쳤다.
주단은 배웅을 나와서도 한 번 더 질문 폭격을 때렸다.
“어떤 필름에서 어떤 활약을 보이는지도 중요할 텐데, 스스로의 연기력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시죠? 미래에서도 배우 활동을 하셨다면 이해합니다만.”
“…….”
음, 배우인 멤버가 거의 나 대신 연기를 해주고 있지.
[집중하는 천재 배우가 당신을 지켜봅니다.]고맙다.
“연기력은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것 같고, 필름도 이미 결정됐다.”
“호오.”
이건 이미 청려에게 들었다.
-괜찮은 영화가 하나 개봉하는데, 그걸 해요.
“LeTi가 투자한 명절용 영화에서 비중 작은 조연.”
본래 이 역할을 맡을 놈이 나중에 성추문까지 터지니, 그걸 일찍 소속사에 찌르고 추가 촬영으로 날 대신 넣을 생각인 것 같았다.
확실히 ‘밀어주기’는 할 모양이다.
“적절하군요. 과연.”
대중적인 정석 코스라며 주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데뷔하면 예명을 사용한다고 하셨죠. 어떤 방식으로 지으실 겁니까?”
“…….”
“애너그램이라는 방식은 어떠실지.”
“음.”
미안하지만, 이미 정해놓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고결한 마음가짐의 무용수가 당신을 그리워합니다.]“박문대로 할 거야.”
그게 맞다.
* * *
[만족하지 않는 아이돌이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특성 : 추진력]카메라로 둘러싸인 촬영장.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숨결이 입 밖으로 샌다.
그런 삶을 아는가?
너무나 간절해서 절대 만족할 수 없고, 그래서 내 모든 사고와 행동이 그 목표를 주축으로 자전하는 삶.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보다 더 벅차도록 크고 강렬한 야망이 몸을 지배한다.
쪽잠을 자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반복 연습하면서 괴리감을 느껴도 괜찮다.
스스로 합리화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든 이 고통을 납득하기 위해 계산하지 않는다. 스트레스에 머리가 타오르지 않는다.
그런 건 여유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부스러기가 어떻든 아무렇지도 않다. 오로지 목표만 찬란히 빛난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걸 꿈이라고 부른다.
“…….”
이게 이세진이 경험하는 삶일 것이다.
“컷!”
감독의 소리와 함께, 나는 물에서 나왔다.
“후욱,”
사람 얼어 죽을 겨울 날씨에 익사하는 각본을 만든 이 새끼를 죽이고 싶다는 감정은 손쉽게 제어할 수 있다.
“고생했어.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지?”
“예.”
나는 타올을 몸에 두르고 조촐한 분위기에서 촬영장을 걸어 나왔다.
3주, 최대한 개빡치지 않고 이 뜬금없는 신인 배우의 삶에 집중하고 싶다고 대놓고 외치니 가호가 내려왔고….
효과는 탁월했다.
큰세진의 가호는 최장기간 끈질기게 내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보상처럼 돌아오는 체력.
‘후우.’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내 몸 상태는 격렬한 연습 직후 정도로 안정되었다.
고통은 없고, 체력 간당간당한 건 쉽게 감출 수 있다는 뜻이다.
‘컨디션이 좋다.’
나는 머리를 털며 고개를 여기저기 꾸벅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했습니다.”
싸가지 없는 새끼에겐 할 말도 안 하게 되니까.
청려랑 합의했던 정보를 뽑아오려면 싹싹한 척이라도 해야 밑밥을 깔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대충 먹혔지.’
몇 건 이미 뽑아오긴 했거든.
-감독이 선호하는 홍보 방식.
-시나리오 작가의 현장 평판.
-주연 배우의 버릇.
다만 대충 라인업 보면 알았겠지만, 다 미시적인 질문이다. 청려 입장에선 별 쓸모 없거나 이미 알 확률이 높다는 거다.
즉, 뭐 이런 건 다 시험 삼아 물어보는 거고 녀석이 진짜 노리는 큰 건 따로 올 거라는 게 정설이지.
‘청려 놈이 연기 판에만 정보원이 없을 리가 있냐.’
아이돌은 종합 엔터테이너 성격이 강하니 태생적으로 예능에 나가야 했는데, 그건 홍보를 위해 예능에 나가야 하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VTIC이 연기를 안 해도 서로 교차점이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LeTi에 자기 사람을 쫙 깔아놓은 청려가 이쪽 소식을 모를 리가 없다.
‘속내가 따로 있겠지.’
나는 대충 짐작하면서 수건에 머리를 털어냈다.
촬영장 분위기는 썩 좋진 않았다. 아무래도 본래 배우가 성추문으로 날아가서 추가 촬영하는 마당이니까.
설 연휴에 맞춰서 개봉한다던 일정도 날아갔으니, 언제 개봉하냐로도 말이 나와서 현장 사기가 별로인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뭐, 덕분에 말을 못 가리고 흘리는 사람이 많아진 건 편했지만.’
무명에, 추가 투입된 나는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촬영장 외곽에서 나타난 사람이 내게 커피를 건넸다.
“아이고 추우시겠다. 좀 드셔요.”
“감사합니다.”
물론 현장 스탭은 아니다. 이름값도 없는 나한테 이렇게 잘 대해줄 리가 있나.
“집으로 가실 거죠?”
“네.”
이 사람은 LeTi 사람이다.
아직 나에게 전속 매니저는 없지만, 신인 매니지먼트팀에서 이렇게 촬영 때에는 사람을 붙여줬다.
그리고 오늘 나온 이 직원이 한 첫 번째 일은, 내 예명을 검색해서 나온 검색 엔진 페이지를 쓱 내미는 것이다.
얼굴 사진이 들어갈 칸에 지난번에 찍은 프로필 컷이 딱 들어가 있었다.
“건우 씨, 프로필 공개됐어요~”
“…예.”
“아, 예명으로 불러야 하는데! 입에 잘 안 붙네요.”
그리고 하하 웃는 직원을 보고 나는 짧게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검색 페이지로 향했다.
[류문.]이게 내 예명이다.
……그래. 박문대는 까였다, X발.
-…박문대? 진심이세요?
짧고 냉정한 대응과 함께 기각된 것이다. 짬이 없으니 설득 테이블에 올리지도 못하더라고.
‘그 이름으로 아이돌 활동도 잘만 했는데.’
그래도 눈치껏 잘 구슬리니 ‘사장님께 말씀은 드려보겠다’라면서 윗선에 윗선으로 말이 올라간 것까진 괜찮았다만… 결과가 이거다.
-단어 하나 정도는 넣어보겠다고 사장님께서 많이 고민하셔서….
……그렇게 내 예명은 류문으로 결정되었다.
‘아무리 봐도 중2병 걸린 브이로그 위튜버 같은데.’
실화냐.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아무리 예명이 X 같아도 받아들이는 게 기획사에 들어간 놈들의 숙명 아니겠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류씨라는 점이다. 아마 여기서 열심히 데이터 팔고 있던 류건우가 봐도 풍산 류씨 친척이겠거니 할 것이다.
‘소 뒷걸음질로 어떻게 잘 얻어걸리긴 했군.’
다만, 내가 이렇게까지 성실히 배우 활동을 지속하자 팝업에 슬슬 이런 문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요한 명단의 사격자가 의아해합니다.] [Supermassive Black Hole이 당신의 꿈을 궁금해합니다!]흠. 아무래도 내 노선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집중하는 천재 배우가 분노합니다!]가끔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진정해라.’
다 생각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겪는 모든 일이 이 녀석들한테 중계되는 건 아닌가 보다. 내가 청려의 시스템에 접속한 것도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아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구체적인 걸 다 알았다면…. 음, 아니다. 오히려 더 난리가 났을 수도 있겠군.
‘아무튼, 걱정은 말라고.’
내가 최대한 안전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녀석들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나는 그렇게 촬영을 끝마쳤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청려로부터 ‘도움말’ 스타일로 호출을 받았다.
-정보 요청.
-네가 촬영한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중 하나.
여기까진 양심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말에 없어졌다.
-그 사람의 약점에 대한 모든 것.
“…….”
갑자기 난이도가 훅 뛰었는데.
-기간은 좀 길게 줄 테니,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오는 게 좋겠어.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그게 쉽게 되면 모든 배우가 다 골로 갔지.
애초에 난 그 사람이랑 같이 촬영한 적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한 컷 정도.
‘게다가 보통은 영화 망하면 다시 볼 일이 없지.’
그리고 이 영화는 거의 망조가 들었다는 게 현장의 분위기였고 말이다.
“…흐음.”
그러나,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왜 이렇게 청려가 당당히 나오는지 말이다.
나는 턱을 문질렀다.
이 영화.
하이스트 영화, 케이퍼 무비라고도 불리는 ‘네임드 범죄자들이 모여서 보물을 훔치는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이 필름이.
어마어마하게 히트한다는 것을.
그리고 히트 조짐이 보이는 순간, 영화는 황급히 추가 홍보에 들어가게 된다.
-해보지.
다시 몇 주 후.
영화는 결국 비수기에 투입되어 빠르게 개봉되었다.
* * *
[박문대(ㅁ_ㅁ+) : 큰 그림을 그리는 중.]“Nope.”
“그리지 마.”
“아 박문대 제발.”
도트 박문대를 보던 사람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박문대가 큰 그림을 그려서 자기 안위가 제대로 고려된 적이 있냐고…!’
갈비뼈 나간 채로 솔로 무대하기부터 시작해서 멤버 대신 철골 처맞기로 완성되는 그의 행보를 모두 익히 경험했다.
지는 것, 손해 보는 것, 멍청한 행동을 더럽게 싫어하고 계산속도 밝은 녀석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배우로 활동하는 것까지는 분명 사정이 있겠거니 했지만,
그래서 다들 빠르게 합의했다.
“선수를 처야 해.”
박문대가 현실로 돌아오겠다고 무리한 짓을 하기 전에 먼저 데려오는 것이다.
“혹시, 지금 문대 체력 상태가… 어떨까요?”
“잠시만요.”
큰달은 입을 깨물며 박문대의 체력 게이지를 보았다.
‘거의 초록색에 가까워.’
체력은 절반 넘게 넉넉히 차 있었고, 박문대가 피곤으로 절어서 고통스러워하는 표시도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이세진 님의 후원이 컸어.’
가호를 오래 쓴 만큼 에너지 회복량도 상당했던 것 같다고 큰달은 추측했다.
그래서 이젠 정말 목전이었다.
“이제 아현 님만 드리면, 바로 시도해도 될 것 같아요!”
“…네.”
선아현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밍만 오면, 그는 바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은 늦지 않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