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64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64화
도움말을 호출한 후.
청려는 우상의 화신을 마주한 채, 깊은 정적 속에서 응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응답’은 기어코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다만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언뜻 도움말의 채팅 팝업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홀로그램 창은 몇 번 깜박거렸으나, 곧 글리치가 수없이 튀더니 사라졌다.
마치 그를 스쳐 지나가 버리기라도 한 듯이.
“…….”
청려는 다시금 도움말을 호출…….
[기다려.]우상의 화신이 선언했다.
청려가 그것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그렇기에 무시하고 다시 부르려던 순간.
퉁.
낯선 소리에, 마주 보고 서 있던 두 인영이 같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바닥이 검은 수면으로 변한 오피스텔, 그 복도 너머에 있는 중문을 열고 사람이 나온다.
“……!”
검은 머리의 인영.
키가 크지만 체격에 비해 말랐고, 준수한 용모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이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직전에 청려의 앞에서 탁자로 쓰러졌던 바로 그 사람이었으니까.
배우로 데뷔한 류건우.
그가 방금 호출했던 당사자.
“도움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청려를 보았다.
그리고 청려는 깨달았다. 어딘지 인상이 달랐다.
눈이 부드러웠다.
금방이라도 피로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냉철한 이성이 엿보였던 인상은 거기에 없다.
대신 온화하고 건전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현관을 넘어 복도를 걸어왔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
그때.
-그쪽이 아니라 이쪽인데.
단단한 미성이 치고 들어왔다.
검은 머리 남성의 뒤로 한 명이 더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밝은 염색모가 흔들리며 문지방을 넘는다.
소년 같은 인상의 금발 남성.
박문대가 웃었다.
-불렀냐.
낯익은 건조한 표정 위로 시원한 미소였다.
움직임과 말투.
청려는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이쪽이 도움말이다.
[모습이 돌아왔네요.]-어.
박문대는 ‘여긴 네 놈이 GM능력으로 만든 심상 세계라 그냥 너한테 익숙한 모습이 구현된 거 아니냐’라는 말을 생략했다.
대신 우상의 화신에게 손을 까닥였다.
-다 끝났다.
[…….]시스템이 더 먼 과거로 가서 네 GM 능력도 사라지기 전에.
……무엇보다, 박문대 자신이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이 순간이 오길 버텼기 때문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돌아가자.
우상의 화신, 신재현은 피식 웃었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국이 닿는 곳마다 수면 위로 포물선이 퍼졌다. 맞은편에 선 청려의 발끝에 닿을 때까지.
“…….”
청려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 도움말을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넌 누구지.”
박문대는 청려를 바라보았다.
-형. 우리 시간이….
-알아.
사실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은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씩 웃었다.
-네 라이벌 그룹 멤버.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 움직임을 보며, 청려는 처음으로 상대의 옷차림을 의식했다.
편하게 일상생활에서 쓰기엔 과하도록 반짝이는 액세서리와 긴 워커. 잘 세팅된 금발.
그리고 흰 셔츠에 광택이 있는 검은 레더팬츠를 걸친 그 차림새는 청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무대 의상.
‘아.’
청려는 문득 깨달았다.
아이돌의 차림새였다.
-또 보자.
그렇게 세 인영은 나란히 현관문을 열고 과거에서 나갔다.
“후.”
박문대는 숨을 내쉬었다.
검은 현관문 너머, 다시 환상적인 의 석양이 펼쳐진 심상 세계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그는 신재현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안 됐지만 후배님의 라이벌 선언을 기억하진 못하겠네요. 내가 정보를 지웠으니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후배님, 그러니까… ‘도움말’과 연관된 건 모조리.”
그가 과거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것에 GM의 권한을 마지막으로 행사했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남겨두기엔 워낙 정신 나간 상황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재현의 선택은 타당했다.
‘그래봤자 어차피 여긴 가상세계나 시스템 내부의 데이터겠지만.’
박문대는 무심코 그것을 육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음? 아뇨. 과거가 맞는데.”
“…??”
“그러니까 괜한 변수가 생기는 것보단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는 편이 낫잖아요.”
박문대가 충격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진짜 과거였다고?’
청려를 만나고, 주단을 만나고, 얼토당토않은 예명으로 배우 데뷔까지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진짜 일어났던 일이라고?
‘맙소사.’
머리가 아찔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침착하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어차피 청려의 기억에서 다 지웠다지 않은가.
‘게다가 재시작하면 내가 했던 짓은 다 없던 일이 되는 거고.’
약간 허무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신재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은 하지 못해도 무의식에는 남겠죠. 아주 특별한 회차였을 테니.”
“…!”
그래서 다시 몇 번이고 재시작을 반복하다 보면, 그 무의식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발전의 힌트가 될 것이다.
티홀릭에 대해서도.
주단에 대해서도.
“흠, 살짝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
질주하는 비행기의 방향 조종레버를 아주 살짝만 톡 건드려도 뻗어나가는 항로가 달라지듯이.
“…….”
‘그런 건가.’
박문대는 청려의 특성, ‘감정’이 왜 과거 S에서 지금의 A로 떨어졌는지 그 이유를 지금 깨달은 것 같았다.
청려는… 때론 자신을 판단을 재고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시간이 지나며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주단의 멤버 기용 같은.
“더 현명해지겠군.”
“그렇죠.”
신재현은 빙긋 웃었다.
“결국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그룹을 만들기 위해 성공할 것 같아도 재시작하는 습관도 생기지만.”
“…….”
“후배님을 만나서 그만두잖아요?”
어련하겠냐.
박문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과거의 스스로를 본 감상은?”
“눈으로 확인하니까 새삼 알겠네요.”
“재시작 연타할 수 있을 때보다 그만둔 지금이 낫다는 걸?”
신재현은 박문대를 표정 없이 응시했다.
그러나 곧 피식 웃었다.
“맞아.”
“…….”
박문대도 마주 씩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결 마음이 편한 얼굴로 거실 밖 풍경을 지켜보던 큰달이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제 곧 도착할 거예요!”
“그래.”
박문대는 숨을 들이쉬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그 너머에서 보이는 것 같았다.
* * *
맨 처음 잡은 것은 단단한 손이었다.
“형.”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청우 형.”
나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안도와 기쁨, 약간의 벅참이 녀석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그리고 비명과 환호, 신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열렬한 환영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
“아.”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냐고!”
“모, 못 돌아올까 봐, 무서웠어…!”
퍽. 퍽퍽.
등으로 사정없이 주먹과 손날이 쏟아진다.
‘살려줘.’
도로 쓰러지겠다.
물론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 녀석들이 다 지독히 걱정했기에 이런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진짜…….”
“…….”
나는 기쁘게 그것을 견디기로 했다.
“박문대, 몸에 이상 없어? 지금 확인해 봐.”
“흠, 멀쩡해.”
네가 때린 곳만 아프다. 나는 큰세진에게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진지하게 대꾸해 줬다.
배세진이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렸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얼음물이라도 부어보려고 했는데.”
“…….”
그전에 깨서 다행이군.
“무, 물! 문대야. 물 마셔…!”
“아!”
솔직히 그다지 목이 마르진 않았으나, 나는 얌전히 선아현이 내미는 물을 마시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30분.
해가 슬슬 질 무렵이었다.
그리고 몸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쓰러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게 확실했다.
‘다행이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게 맞아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녀석들이 어떻게 가호를 준 건지 궁금했지만…….
“당장 병원부터 가보는 게 좋겠는데요.”
“그러자.”
“…….”
아무래도 내가 할 일이 많은 것 같으니 일단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나마 침착한 얼굴인 차유진이 내게 ‘당을 보충해라’라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며 내민 사탕이나 받아들었다.
과연 아닌 척 눈치 빠르고 침착한…….
“형, 저 개인 privacy 완전 존중해요. 하지만 형의 SF 것들은 예외예요. 우리는 공유해야 해요.”
“…….”
“이건 비상 상황을 위해서예요.”
오냐.
나는 일제히 말을 멈추고 돌아본 녀석들을 향해 기꺼이 사실을 공유했다.
진실.
“나한테 이제 SF 것들 자체가 없어. 다 끝났거든.”
“……!”
말하는 것 자체가 짜릿했다.
물론 반응은 이랬지만.
“Really??”
“……또 이러고 이상한 일 벌어지면 그때 가서 다른 소리 하려고?”
“문대야. 테스타 걸고 맹세할 수 있니?”
거참 못 믿네.
“어, 진짜로요.”
나는 사탕을 입에 까 넣었다.
사과 단맛이 입안에 번졌다.
“그거… 다 버리고 왔거든요.”
이제 내게 시스템은 없다.
파편도, 상태이상도, 조종도.
그리고 쓸데없는 시스템 사용에 대한 강박도 사라졌다.
가열 차게 숙주를 이용해 먹던 시스템은, 이제 깨끗이 없었다.
나는 씩 웃으며 사탕의 맛을 음미했다.
“이제 활동만 열심히 하면 돼요.”
“…!!”
큰달이 내 말이 사실인 것을 몇 번이나 인증하고 나서야 녀석들은 빡침과 기쁨 속에서 이 사실을 인정해 줬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드디어 숙소로 돌아온 나는 내 침대를 찾았다.
‘그리웠다, X발.’
나는 손으로 내 인형을 주무르며 태블릿 PC를 들어 올렸다.
“형의 침대를 제 여분 침대라고 착각했다가 논리적으로 이상하다고 느끼는 경험은 정말 오싹했습니다!”
“……미안하다.”
진심이다.
룸메이트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 후, 나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인터넷을 모니터링했다.
-문댕댕… 암튼 나는 아닌 듯 모음 (동영상)
-영업합니다 박문대 전설의 롤더다 50초 직캠 보고 가세요
테스타 박문대는 거기 잘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잊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도 듣긴 했으나, 내가 돌아오자 그 증상은 씻은 듯이 없어졌다고 한다.
‘다들 애초에 그런 일이 발생했던 걸 인지하지 못하게 됐군.’
물론 나를 자연스럽게 없는 취급하던 기록들을 볼 때는 솔직히 소름이 돋기도 했다만.
-테스타 6인 제발 이대로 영원하자
동시에 안도감도 들었다.
이렇게 끝나지 않도록 잘 돌아왔다는 거니까.
내 자리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는 작업한 곡 데모를 듣다가 형의 부재를 눈치챘습니다. 지극히 넓은 음역, 그리고 표현력 좋은 음색 덕에 해당 곡을 소화할 수 있는 누군가의 특징을 떠올리기 용이했…….”
“래빈아.”
“예?”
“고맙다.”
“…??”
나는 김래빈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리고 모니터링 이후에는 테스타의 단체 예능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다른 멤버 녀석들도 건물 붕괴 때만큼 빡 돌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탐탁지 않은 얼굴이던 큰세진 놈마저도 그냥 평소처럼 굴었다.
‘내 심신 안정을 배려해 주는 건가.’
대신 간식거리나 가져와서 내 옆에 앉고는, 대충 드러누워서 같이 TV를 시청했다.
가장 최근의 테스타 자체 컨텐츠를.
[이세진 : 아 제발 양궁의 신이시여.] [류청우 : 하하하.]화면에서는 테스타가 다트를 던지고 있다. 해외 길거리에서 웃기는 분장을 한 채 공연할 곡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안에는 나도 있다.
[이세진 : 으아아아아!!] [차유진 : 양궁 신! 양궁 신! ohhhhhh!] [박문대 : 형 혹시 원거리 공격은 다 잘하는 건가요.]류청우가 다트의 정중앙을 맞히며 무려 ‘작년 빌보드 1위 곡’이라는 어마어마한 곡 키워드를 따낸 다음, 내가 날짜를 정하기 위해 다트를 던졌다.
그리고 명곡을 골랐다.
귀신 들린 듯 속삭이는 중독적인 코러스가 유명한 곡으로, 배신한 애인을 잡아다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패기가 넘치는 음산한 곡이었다.
근데 이걸 캐롤 버전으로 불러야 한다.
[이세진 : …….] [류청우 : …….] [차유진 : 문대 형 운 진짜 없어요.] [박문대 : 그런가 봐.]“으하하핫!”
[박문대 : (감미롭게 니를 죽이러 가겠다고 노래 부르는 중)] [배세진 : 이 노래를 캐롤로 만드는 데 성공할 줄이야…….] [김래빈 : 감사합니다!] [배세진 : (칭찬이 아니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게 된 사람)] [배세진 : …가, 감사하긴.]“크흡.”
언제나처럼 웃기고 편안했다.
어떻게 된 게 멤버 한 녀석 한 녀석이 다 개성이 넘쳐서는 누가 누군지 다 보였다.
[선아현 : 그럼 제가, 루돌프 할게요…!] [PD : 본인이 꽃사슴이니까?] [선아현 : ! (깨달음)]“진실이지.”
“그래. 부끄러워할 것 없어. 아현아.”
“가, 감사해요…….”
그걸로 좋았다.
나는 그날 밤까지 테스타의 활동을 돌아보았다.
…재밌었다. 정말로.
테스타는 그 후 며칠, 멤버 간의 조율 끝에 잠깐 부수적인 대외 활동을 멈추고 연습을 하며 쉬었다.
내가 과거에 갇혀 지내는 동안 혹시 잊어버렸을지 모를 안무나 감을 되찾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내로 회복한다.’
나는 이를 갈고 회복했고, 그러는 중 올해의 끝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전에 맞이할 날이 있었다.
12월 15일.
바로 박문대의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