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29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29화
* * *
황태수는 국장실을 둘러봤다. 명색이 관리국의 국장실이라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볼품없었다.
장식품이라고는 책상에 있는 화병이 전부다.
“식기 전에 드시죠.”
“아, 예.”
“요새 불경기라던데 사업은 어떻게 잘되십니까?”
“장사꾼들이 불경기 입에 담는 건 IMF 때나 쌍팔 년도 때나 똑같죠 뭐.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고 삽니다.”
“맞는 말씀이네요.”
“이건 무슨 차입니까? 녹차는 아닌 것 같고 보이차인가?”
“우롱차입니다.”
“우롱차…… 설마 절 우롱하시려고 우롱차를 내오신 건 아니겠죠? 하하하!”
“…….”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명섭.
박장대소하던 황태수는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터뜨렸다. 이거 아무래도 괴물2한테 옮았나 보다.
“여긴 관리국입니다. 농담 따먹기 할 생각으로 오신 거라면 아무래도 여의도가 낫겠군요.”
“잠깐 농담 좀 한 건데 사람 무안하게…… 원하시는 용건만 간단히 하고 가겠습니다.”
“그러시죠.”
“전사자 유족들에게 위로금을 기부하고 싶습니다.”
“어째서죠?”
“뭐가요?”
“기분 나빠하진 말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황태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황 사장님은 기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 같습니다. 혹시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겁니까?”
“다른 목적이요?”
“예를 들면 곧 있을 총선이라든지…….”
“아, 그러고 보니 곧 총선이구나. 모르고 있었네요.”
능청을 떠는 건지 정말 몰랐던 건지…… 이명섭은 의아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의회에 입성할 목적이 아니라면 그가 왜 기부를 한단 말인가?
“황 사장님이 이 기부를 목적으로 뭘 하든 전사자들의 명예만 해치지 않는다면 상관 안 합니다. 하지만 대답은 듣고 싶군요. 어째서 기부를 하시려는 겁니까?”
“어떤 대답이 듣고 싶으신지는 모르겠는데 뭐 굳이 대답을 드리자면…… 천국 가려고 이럽니다.”
“예?”
“누가 그러더군요. 착한 일 하면 천국 간다고. 그딴 게 있는지 없는진 난 잘 모르겠는데 밑져야 본전 같아서.”
이명섭은 실소했다.
“용건만 간단히 하시자더니 서론을 너무 길게 하신다. 서론은 여기서 커트하고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전사한 분들이 스물여섯 분인가요? 대전이랑 부산에 계신 분들까지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한 분당 30억씩 기부하죠.”
“3억이요?”
“30억이요. 0 하나 더 붙은 30억.”
“……농담하시는 겁니까?”
“천하의 관리국 국장 앞에서 농담할 간 큰 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농담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들어 보니까 국가에서 보상금이랍시고 지급하는 금액이 꼴랑 2억이라면서요? 그걸 누구 코에 갖다 붙입니까?”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진심입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누가 기부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해 주십쇼.”
“익명…… 말입니까?”
“네.”
“굳이 왜……?”
“왜,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딸 잡은 손이 딸 잡은 것도 모르게 해라. 뭐, 그런 거죠.”
* * *
-……이에 대해 국세청은 ‘그 어떤 기업과 개인도 800억에 달하는 금액을 현찰로 기부하기는 힘들다’라고 밝히며 범죄와 연관됐을 가능성과 함께 자금 추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런 국세청의 발표에 시민들의 비난은 쇄도하고 있습니다. 최영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장년의 기자가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기자가 한 시민에게 이에 대한 사견을 물었다.
-800억이 큰돈이긴 하죠. 범죄와 연관됐을 가능성도 물론 있을 수 있고요. 그런데 어떤 범죄자가 미쳤다고 800억을 기부해요?
그 말과 함께 화면이 바뀌며 또 다른 시민이 카메라 앵글에 잡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국세청 논리라면 크리스마스 때마다 주민센터나 보육원 같은 곳에 큰돈 든 봉투 놓고 가는 키다리 아저씨들 전부 잡아다가 세무조사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당장 작년 크리스마스때만 해도 광안동 주민센터에 3억 놓고 간 키다리 아저씨도 있었는데요. 안 그래요?
시민의 반문과 함께 다시 화면이 돌아왔다. 차분한 모습의 아나운서가 말했다.
-모두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의 평화주의자 간디가 남긴 말과 함께 뉴스 끝마치겠습니다.
-부당한 법률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그 법률 위반에 대한 체포는 더한 폭력이다.
“돈이 존나 많은 놈인가.”
정적이 감돌던 사무실.
과도로 사과를 깎아 먹던 고형건이 TV를 보며 툭 말을 내뱉었다. 그에 김시현이 화답했다.
“존나 많다 못해 아예 썩어 넘치나 본데?”
“그래도 존나 대단한 새끼긴 하네. 아무리 돈이 썩어 넘쳐도 난 800억 선뜻 기부 못 할 것 같은데. 안 그러냐?”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소파에 누워 자는 척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황태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악질 범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악질 범죄자? 800억이나 기부했는데?”
“그러니까 더 악질 범죄자죠.”
사각사각-!
사과를 깎아 한 입에 베어 문 고형건이 반문했다.
“말이 왜 그렇게 되냐?”
“형님들…….”
“부장님.”
“아, 부장님들. 생각해 보십시오. 부장님들한테 800억 있으면 뭐 하시렵니까?”
“글쎄. 만져 보질 않아서 상상이 안 간다.”
“저 같으면요. 일단 초호화 요트 사서 해운대에 띄우고 람보르기니도 딱 하나 장만해 가지고…… 시계도 에? 롤렉스로다가 딱! 차고, 클럽에서 골든벨도 존나게 울리면서 놀 것 같지 말입니다.”
“음…… 다른 건 몰라도 요트 띄우는 건 마음에 드네.”
“그렇죠? 근데 저 새끼 보십쇼. 800억을 현찰로 기부했다잖습니까. 분명 더러운 일 하던 새끼일 겁니다.”
“하긴……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합법적으로 800억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바로 그겁니다! 아마…… 킬러거나 인신매매꾼이거나 아무튼 온갖 더러운 일 다 하는 악질 새끼였겠죠.”
“그런데 그런 새끼가 왜 800억을 기부해?”
“무교인 사람이 종교 가질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언젠데?”
“죽기 직전이랍니다. 특히 나쁜 짓 오지게 한 새끼들은 백이면 백 종교 갖는대요.”
“저 새끼도 비슷하다?”
“예. 뒈질 때 되니까 800억짜리 천국행 티켓이랍시고 끊어 놓는 거죠. 그게 아니면 왜 익명으로 기부했겠습니까, 굳이? 1, 2억도 아니고 800억이나 되는 돈을요.”
“듣고 보니 또 그러네. 나 같으면 존나 자랑질하고 다닐 것 같은데.”
“그러게. 진짜 뒤가 구린 놈인 건가?”
고형건에 이어 김시현까지 자신을 의심하자, 자는 척하고 있던 황태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줏대가 없어, 줏대가! 어? 고추 떼, 이 자식들아!”
“안 주무셨슴까?”
“자다가 존나 조용해서 깼다, 이 새끼야! 그리고 장 대리 너 이 새끼야. 네가 봤어?”
예의 직원이 몸을 움찔거렸다.
“네가 인마, 저 양반이 나쁜 짓 해서 돈 번 거 봤냐고, 이 자식아!”
“그,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그럼 인마! 착한 일 한 사람 착한 일 했나 보다…… 하고 말아야지, 뭔 놈의 의심이 그렇게 많아? 너 그래 가지고 회사 생활 하겠냐?”
“…….”
“그리고 고 부장, 너 이 새끼 대.”
“갑자기 전 왜…….”
“너 이 새끼야, 내가 자기 전에 TV 끄라고 했냐, 안 했냐?”
“……했슴다.”
“그런데 껐어, 안 껐어?”
“……안 껐슴다.”
“그럼 대야 돼, 안 대야 돼?”
“대야 됩니다.”
“그래, 대야지. 근데 오늘은 장 대리 네가 대라.”
“예? 제, 제가 말입니까?”
“그럼 네 앞에서 내가 고 부장 마빡 후리리?”
평소에는 잘만 하면서…… 구시렁거리던 장 대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 그럼 대.”
장 대리가 주눅 든 채 다가와 머리를 댔다.
빠악!
“자, 복창한다. 저분은!”
“저, 저분은!”
“존나게 착한 분이다!”
“존나게 차, 착한 분이다!”
“저분은!”
“저분은!”
“위인이시다!”
“위, 위인이시다!”
“저분처럼만 살자!”
“저, 저분처럼만 살자!”
복창이 끝나자 황태수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눈치껏 세 사람이 슬금슬금 사무실을 나섰다.
* * *
트빌론의 눈초리가 길게 찢어졌다.
“모두 말인가?”
그의 물음에 카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아무래도 그는 힘의 원천을 잃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카달란의 말에 거대한 원탁에 둘러 앉은 아르코누스들이 술렁였다.
“……맙소사.”
“카달란, 확실한 겁니까?”
“마계에서의 힘을 잃지 않고 차원을 통과할 순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대부분의 천신들이 천기를 잃게 되는데 말입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
카달란은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힘을 잃었다면 아무리 마신이라도 드래곤 셋을 단시간에 해치울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전의 일들을 봐도 그렇고요. 그는…… 힘의 원천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 마신 그자가 지구에 있는 것도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인데 그 힘을 그대로 갖고 있다니.”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아르코누스들의 모습에서 천신장들의 위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마물들 사이에서도 특히나 혐오하고 천박하다 업신여기는 고블린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당연했다.
수천 년 전.
마신은 태초 이래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던 마계를 통일했다.
각지에 흩어져 제각각 살아가던 군주들을 굴종시켰고 그들에게서 영혼과 충성을 맹세 받았다.
그리고 수백 년 전.
천계를 순환하는 천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천기의 소멸은 천신의 소멸을 의미했다.
천신들은 방법을 강구했고, 우연히 타 차원에 위치한 지구가 천계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거란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지구로의 이주를 택했다. 하지만 모두가 찬성한 건 아니었다.
이 원탁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세라엘.
세라엘은 지구의 희생을 담보 삼을 순 없다는 주장을 했다. 소멸을 택하자는 뜻이었다.
많은 천신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신들은 합치된 뜻을 따르지 않는 세라엘을 아르코누스의 지위에서 박탈시키고 연옥에 가뒀다.
연옥은 탈출이 불가한 감옥이었다. 적어도 세라엘이 탈출하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었다.
천신들의 사고는 편협했다. 설마 세라엘이 스스로를 타락시켜 탈출할 거란 생각은 못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세라엘은 타락을 택했다. 그리고 마계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천신들은 천기가 소멸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계에서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천신들은 세라엘을 잡고자 마계에 잠입했다. 그리고 세라엘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금방 발각되었다.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뜨린 셈이었다. 마족과 천신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승기는 천신들이 잡았었다.
그 덕에 인간계와 중간계에서는 이 전투를 천신들의 승리로 알고 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마신이 나타나자마자 전세는 역전됐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에 의해 전장의 판도가 뒤집힌 것이다. 수많은 천신들이 그의 손에 소멸됐다.
우여곡절 끝에 전투는 끝이 났고 다시금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 나갔지만 천신들은 아직 그때의 전투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런 마신이 마기를 조금도 상실하지 않은 채 지구에 있다?
천신들로서는 놀랍고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말 많은 고블린들처럼 입을 놀려 대던 아르코누스들의 입을 잠재운 건 트빌론이었다.
탕탕!
원탁을 내리치자 이목이 트빌론에게 집중됐다.
“방법이야 다시 찾으면 되는 일.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기를 온전히 갖고 있다지 않습니까?”
“마기를 온전히 갖고 있다 해서 약점이 전혀 없진 않을 겁니다. 안 그런가, 카달란?”
한 차례 주저하던 카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