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30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30화
* * *
성직자들은 하루에 다섯 번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새벽과 아침, 점심과 저녁, 그리고 밤.
이건 성직자들만이 갖는 일종의 특권이기도 했다.
율법에 따르면 성직자가 아닌 이들은 하루 두 번 이상 기도를 올릴 수 없게 되어 있다.
박연은 비록 신심은 돈독했으나 성직자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율법에 따라 하루 두 번만 기도를 올렸다.
아침과 밤.
그건 지구에 와서도 바뀌지 않는 일과였다.
사위가 칠흑에 물든 깊은 밤.
박연은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신들을 상징하는 푸른 구슬 서른 개를 엮어 만든 카디스라는 이름의 묵주였다.
“자비롭고 자애로우며 너그러우신 신들이시여. 신들의 종 벨테브레이가 신들에게 고합니…….”
박연은 기도를 올리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번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박연은 여태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신의 선(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신의 선에 대한 번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번민 속에서 기도를 올릴 순 없는 노릇.
오늘도 어제처럼 박연은 맥없이 묵주를 내려놨다.
마음 한구석에 신들에 대한 의심의 맹아가 싹튼 기분이었다.
감히 불순한 생각을 하는 본인에게 박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학밖에 없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박연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달빛에 의지한 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발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에 긁혀 피가 나도, 뾰족뾰족한 덤불 속에 생채기가 나도.
그는 정처없이 걷기만 했다. 왠지 이렇게 자학을 하며 걷다 보면 해답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그때.
“……!”
박연은 눈을 부릅떴다. 지난번처럼 아주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희미한 기운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신성력…….’
이건 분명 신성력이었다. 저번에 카라누스에게서 느꼈던 신성력보다 훨씬 짙고 순수한 기운이었다.
이번에도 자아를 잃은 드래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운은 점점 농밀해졌다. 기운의 근원지에 도달했을 즈음.
“벨테브레이.”
등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박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천신…….’
천신이었다. 짙은 신성력 하며, 순백의 새하얀 날개까지…… 천신이 분명하다. 멍한 표정으로 천신을 바라보던 박연이 고개를 조아렸다.
“신들의 종 벨테브레이가 신의 영광을 받습니다.”
“반갑군요, 벨테브레이. 제 이름은 카달란이라고 합니다.”
“영광입니다, 카달란 님.”
“벨테브레이, 당신께 모든 신들을 대표해 그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카달란에게서 느껴지는 선기와 신성력과 따스함에 박연은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번민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사이 카달란이 입을 열었다.
“신들은 벨테브레이 당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지키길 원하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렸던 박연.
그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달란에게선 여전히 따스함이 느껴졌다.
* * *
“확실한 건가?”
트빌론이 카달란에게 물었다. 상기된 표정의 카달란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믿음이 깊은 자로다.”
“과연 그래 보였습니다.”
트빌론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맺혔다. 신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인간은 그들에게 있어 언제나 큰 기쁨이다.
“일이 한결 쉬워지겠군요.”
또 다른 아르코누스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헤르페테론이었다.
“다행이지요.”
“다만…….”
“왜 그러십니까?”
“용사께서 일을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답은 카달란이 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카달란 님,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전지한 것이지, 모든 세계에 대해 전지하고 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방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용사께서는 천성검을 들 수 있는 분입니다.”
헤르페테론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성검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던 태초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태초의 기운은 창조란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태초의 기운은 모든 걸 창조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그 기운을 일부 머금고 있는 천성검으로 비록 창조를 할 수는 없을지라도 파괴는 가능했다.
거대한 산을 겨눠 벤다면 거대한 산이 두 동강 난다.
대해를 겨눠 벤다면 바닷물이 잘린다.
높은 창공을 겨눠 벤다면 하늘이 찢긴다.
이게 바로 천성검이 머금고 있는 태초의 기운이었다.
태초의 일부이기도 한 천신들은 자연히 천성검을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천신들이 천성검을 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천기가 약한 헬로트온들 중에서 일부는 천성검을 다루기는커녕 들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천신들도 들지 못하는 천성검을 들 수 있단다.
헤르페테론으로서는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원탁의 다른 아르코누스들도 같았는지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다.
“과연 신탁이 내려진 용사답군요.”
“골칫거리 데이카란투도 그 용사께서 해치웠다지요.”
“그래도 천성검을 들 수 있을 줄은…….”
모두가 감탄하는 가운데 트빌론이 물었다.
“다룰 수도 있던가?”
“예.”
고개를 끄덕인 카달란이 품에서 깃털을 꺼내 보여 주었다. 깃털은 반으로 쪼개진 상태였다.
“천성검으로 제 깃털을 베었습니다.”
또다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카달란은 하위 천신이었다. 하지만 헬로트온이라고 해서 천신이 아닌 건 아니다.
그 역시 인간들의 탐욕을 관장하는 어엿한 천신.
단순히 천성검을 들 수 있는 것만으로는 그의 깃털 역시 벨 수가 없다.
그의 깃털을 반으로 갈랐다는 건 천성검을 다룰 수 있다는 증거였다.
“기뻐하긴 이릅니다.”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아르코누스 테메우스였다.
“과거 마신은 천성검에 베이지 않았었습니다.”
천계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르코누스들은 합심해서 마신을 벤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산과 대해, 창공마저 가를 수 있는 천성검이 그만은 베지 못했었다.
오히려 그의 신체에 닿은 순백한 천성검들은 검붉게 물들며 조각났다.
그때의 일을…… 아니,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는 테메우스였다.
“그건 우리가 방심했었기 때문 아닙니까?”
“천성검이 어디 방심한다고 해서 베이지 않는 성물이었습니까?”
타당한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에 카달란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테메우스 님의 말씀도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당시 아르코누스들이 마신을 베지 못했던 건 정면에서 일격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다르단 말인가?”
“마신은 용사를 벗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흐음.”
“아무리 마신이라 한들 천성검이 뒤에서 직선으로 꽂힌다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테메우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카달란의 말처럼 방심한 틈을 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마신이 본인의 모든 걸 이루고 있는 마기를 상실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그는 소멸할 것이었다.
원탁의 천신들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의 미소에서 신으로서의 너그러움과 선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 *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준은 창가 앞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구경했다.
마침 우비를 입은 채 역삼이와 뛰놀던 서우가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서준도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그에 까르르 웃은 서우가 다시금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밞았다.
“밖에 뭐라도 있나?”
“일어났군.”
“진작 일어났다.”
“안 나오길래 계속 자는 줄 알았다.”
박연은 말없이 서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비 올 때마다 꼭 비 내리는 걸 구경하는 것 같던데 왜 그러는 거지?”
“그대는 마계에 와 본 적이 있나?”
“없다. 들어는 봤지만.”
“마계에는 비가 안 내린다.”
“…….”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가 됐다.
약간의 텀을 둔 박연이 말했다.
“마왕 주제에 감성적이군.”
“감성이 메마른 것보단 낫지. 그대도 감성 좀 갖고 살아라. 콜라에 빠져 살지 말고. 이 썩는다.”
“남이사 뭘하든.”
서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침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조금씩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빗소리도 좋지만 아스팔트 바닥에 시원하게 내리꽂히는 장대비 소리도 좋았다.
서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엎드린 채 빗소리를 감상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박연도 그를 따라 해 봤다.
하지만 그는 서준과 달리 몸을 계속 뒤척거렸다.
“이봐.”
“…….”
“자는 거냐?”
서준이 엎드린 채로 실눈만 살짝 떴다.
“물어볼 게 있다.”
서준은 계속하라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선뜻 말하기가 망설여지는지 박연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박연이 무슨 말을 할지 지레짐작이라도 한 건지 서준이 도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내 말은 신경 쓰지 말고 그대의 믿음을 지키라니까.”
“아니, 그거 말고…….”
서준이 다시 실눈을 떴다.
“옛날에 있잖나.”
“옛날이라면 언제?”
“그대가 인세에 강림했을 때 말이다.”
“자르베트로 행세하던 때 말이군.”
그는 인간계에서 자르베트라는 철부지 귀족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었다.
“그래.”
“근데 그건 갑자기 왜?”
“그때…….”
역시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겠는지 박연은 계속 주저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그때 왜 날 자꾸 살려 준 거지?”
“불쌍해서?”
피식거리며 농담을 한 서준은 뒤늦게 굳어 있는 박연의 얼굴을 봤다. 그는 진지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사람이라서.”
“뭐?”
“사람이라서 살려 줬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뜻 같은 건 없다. 나와 같은 빨간 피를 흘리는 사람이라서 살려 준 거지.”
“그게 전부라고?”
“그게 전부다.”
“그럼 그 소문은 뭔데?”
“무슨 소문 말인가?”
“그대가 지나간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그들의 영혼을 모조리 빼앗았다는 소문들. 그리고 지나는 신전의 사제들을 모조리 살육했다는 소문들.”
“그런 소문이 있는 줄은 몰랐네.”
“대답해라. 그 소문들은 뭐지?”
“쑥대밭이 된 마을을 지난 적은 있었다.”
“…….”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지. 주민이라고는 안 보였다. 약탈자들 빼고는. 내가 죽인 건 그들이다. 신전?”
“…….”
“난 여행을 하면서 신전이 있는 곳은 피해 다녔다. 물론 실수로 신전이 있는 곳을 지나치기도 했지만, 그대들이 말하는 이교도들이 사제들을 살육하고 있더군.”
“그들을 구했단 말인가?”
“모두를 구하진 못했지. 이미 늦은 때라서. 그래도 다섯 명 정도는 살렸었다.”
“그럼 왜 그들은 죽은 채 발견된 거지?”
서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눈으로 보진 못했어도 기감을 느꼈었으니까.
하지만 어떤 진실을 말해도 박연은 믿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의 믿음은 그만큼 굳건하니까.
“난 죽인 적 없다. 그뿐이다.”
찰나지만 박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서준은 다시 눈을 감은 채 빗소리를 감상했고, 박연은…….
“…….”
상념에 잠긴 채 애꿎은 손만 다듬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장대비가 다시 보슬비로 바뀌었을 즈음.
서준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되도록이면 정확히 찔러라. 서우가 보지 않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