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99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99화
* * *
삼각김밥 사먹을 700원을 아끼기 위해 공원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신문 배달을 하던 시절.
서준은 문득 골목길 저편에서 나는 밥 짓는 냄새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내 허기가 밀려들자 귀신에 홀린 것처럼 냄새를 따라 움직였었다.
마침 팔팔 끓고 있는 솥단지에서 시래기 된장국을 퍼내고 있는 김성식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그게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할아버지는 두 달이 넘도록 서준에게 아침을 챙겨 주셨다. 사춘기에 들어선 나이란 점도 잊지 않으시고 자존심까지 지켜주셨었다.
‘고맙다는 말씀드리고 싶었었는데…….’
서준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챙겨 준 아침밥 한 공기가 제게는 너무 힘이 됐습니다.
저한테는 삶의 큰 원동력이 됐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끝끝내 감사 인사는 드릴 수가 없었다.
서준은 이사를 갔고 몇 년 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을 때는 백반집이 재개발로 사라지고 난 뒤였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뵐 줄이야.
서준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건 미소(微笑)도 아니었고 희소도 아니었고 조소도 아니었으며 냉소는 더더욱 아니었다.
텅텅 비어 버린…… 그래서 헛헛하기까지 한 웃음이었다.
인과(因果)란 복잡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처럼 단순했다.
“봉사자분?”
“아, 죄송합니다.”
“아시는 분이세요?”
“예전에 할아버님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우연치고는 절묘하네요.”
서준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헛헛한 웃음이 아닌 말 그대로 미소(微笑)였다.
“그러게요. 어떻게든 다시 만나 뵐 운명이었나 봅니다.”
“반가우신 건 알겠지만 행여라도 아는 척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마 크게 혼란스러워하실 거예요. 워낙 기억이 뒤죽박죽이신 상태인지라…… 뭐, 아는 척하셔도 알아보지도 못 하실 테구요.”
서준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병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를 만난 반가움도 반가움이지만 일단은 할아버지를 욕실로 옮겨 드려야 했다.
무기력하게 누워 혼탁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린 건 그 순간이었다.
무표정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문득 환한 미소가 걸렸다.
“너?”
멈칫.
“오늘은 왜 이리 늦었어? 젊은 놈이 빨리빨리 좀 다니지 않구.”
할아버지가 TV를 가리켰다.
“아무튼 마침 잘 왔어. 또 채널이 지워졌는데 도통 모르것네. 와서 좀 어떻게 혀 봐.”
서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눈물이 또로록 흘러내렸다.
“고추 달린 사내자식이 왜 또 울고 지랄이여? 커험! 너무 큰소리쳐서 그려? 너한테 화낸 게 아니니께…….”
“할아버지.”
“응?”
“고마웠습니다.”
“뭐가?”
“그냥 다요.”
“어린놈의 자식이 곧 떠날 노인네처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얼른 TV좀 어떻게 해 봐.”
그때처럼 무심하고 매정하게만 느껴지는 말투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건 어린 소년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노인의 투박한 지혜였다.
예나 지금이나.
서준은 그걸 잊지 않았다.
그래서 웃었다.
해맑게 웃었다.
“오늘은 또 몇 번이 안 나오는데요?”
* * *
“어머, 오셨네요.”
마침 병실에서 나오는 사회복지사와 마주친 김주훈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그럼요. 아까 박 선생님한테 연락은 받았어요. 아버지 뵈러 오실 거라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좀만 일찍 오시지.”
“예?”
“아까 아버님 정신이 잠깐 돌아오셨었거든요.”
“아버지가요?”
“네. 두 시간 정도 돌아오셨었어요. 그때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안 받으셔서…….”
김주훈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왕이면 아버지가 맨정신일 때 뵙는 게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어쩌겠나.
“아버지는 안에 계시죠?”
“네. 들어가서 인사하셔요. 전 두 분이서 말씀 편하게 나누시게 이따 올게요.”
“감사합니다.”
김주훈이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병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린 시절 바라보던 아버지의 어깨는 참 넓었는데…… 왜 해가 가면 갈수록 왜소해지는 것 같은지.
인기척에 김주훈의 아버지 김성식이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김주훈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사실 이런 모습 때문에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않았다.
날 못 알아보는 모습이 서글퍼서.
“저 기억 안 나세요?”
“음…… 기억 안 나는데 누굴까?”
“천천히 봐보세요.”
김성식 할아버지가 눈매를 좁히고 김주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더니 무릎을 탁 내려쳤다.
“이제 알겠구먼. 박 중사 아들 맞지?”
“…….”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설 때인가? 못 알아봐서 미안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요새 정신이 오락가락해. 뭐하고 서 있어? 다리 아플 텐데 어여 와서 앉아.”
“예.”
병상에 걸터앉자 야윈 아버지의 다리가 보였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장사 소리 들으실 만큼 다리도 굵고 힘도 세셨는데…….
“그나저나 지운이 너가 무슨 일로 왔어 그래? 요새 뭐 사업 한다고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지운은 아버지가 소대장으로 복무할 때 휘하에 있던 박 중사란 분의 아들이었다.
주훈의 또래였기에 주훈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 사이였다.
“바쁘긴요. 바빠도 아버지 보고 싶어서 왔죠.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 그나저나 바쁠 텐데 잊지 않고 와 줘서 고맙네 그려.”
“고맙긴요.”
작게 웃으며 말하는 주훈에 김성식 할아버지가 괜히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
“그…… 엊그제가 아버지 기일이었지?”
사실 박 중사의 기일은 엊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신 오락가락하신다면서 그건 용케 기억하시네요.”
“정신이 오락가락해도 그건 기억해야지. 내가…….”
“…….”
“내가…… 사지로 내몰았었는데.”
“에이. 또 그런 말씀하신다. 그런 말씀 마세요.”
한숨을 내쉰 김성식 할아버지가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는 잘 계시고?”
사실 박 중사의 어머니는 수 년 전 돌아가셨다. 장례식에도 다녀온 주훈이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요. 잘 계세요.”
“다행이다. 참말로 다행이여. 너희 어머니 얼마나 고생하셨었냐. 너도 네 처자식 건사한다고 힘들것지만은 늘그막에 잘 모시거라. 알겠지?”
그때.
문득 김성식 할아버지가 주훈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심부름 보낸 지가 언젠데 이제 와?”
고개를 돌린 주훈은 토끼 눈을 떴다. 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랬군요. 우연치고는 절묘한 인연이네요.”
서준과 김성식 할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들은 김주훈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고는 담배 한 개비를 권했다.
“하십니까?”
귀환하고 나서 한 번 태운 뒤로 입에도 안 댔던 담배지만 서준은 선뜻 받아들었다.
김주훈이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같이 오신 그 분…… 성함이 박연 씨라고 했던가요?”
“네.”
“언젠가 사회복지사 분이 동영상을 보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동영상이요?”
“네. 아버지 산책하시는 사진은 가끔 보내 주셔도 동영상을 보내 주신 적은 없었는데 의아했었죠. 동영상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박연 씨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있더군요.”
“…….”
“아버지는 한 번 정신이 나가시면 저도 못 알아보십니다. 본인께서 아직 전장에 계신 줄로만 알고 있죠. 그래서 한 번 정신이 나가시면 제한테도 베트콩이라고 소리치면서 벌벌 떠십니다.”
그새 담배를 다 태운 김주훈이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 물었다.
“그런데 동영상에서는 다르더군요. 아버지는 박연 씨 앞에서 평생을 시달려 온 죄책감을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러고는 환하게 미소 지으셨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 만이었던지…… 너무 고마웠었죠.”
“할아버지께서 박연에게 위안을 얻은 것처럼 박연도 할아버지께 위안을 얻었을 겁니다.”
“그럴까요?”
“박연 또한 그 나름대로 죄책 받는 인생을 살았으니까요.”
“그랬군요. 어떤 죄책 받는 인생을 사셨는진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겠군요. 나쁜 쪽과 관련 된 건 아니란 거.”
“맞습니다. 나쁜 쪽과 연관 된 죄책감은 아닙니다.”
“한데 사장님께선 박연 씨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계시네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었습니다.”
“아하.”
고개를 끄덕거린 김주훈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고는 저 멀리 보이는 식당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참 고생을 많이 하셨었습니다. 그래서 늘그막에 백반집을 하신다고 하실 때 격하게 말렸었습니다. 이제 좀 편하게 지내셔도 될 텐데 하는 마음 때문이었죠.”
“자식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생 소원이셨다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 말리질 못하겠더군요. 아버지께서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자식으로서 지켜봤으니까요.”
“…….”
“아버지 세대에 태어나신 분들이 뭐 다 그러시겠지만…… 아버지는 특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배곯는 일이 일상 다반사였대요.”
“배곯는 일이요?”
“네. 아버지를 포함해서 형제만 여섯인데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다 보니 밥 한 끼를 먹어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으셨다나봐요. 내색은 안 하셨지만 그래서 백반집을 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서준은 십수 년 만에…… 아니 수천 년 만에 왜 할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는지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처럼 고통받는 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거다.
자신처럼 배고파서 설움받는 이가 없었으면 하셨던 거다.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김주훈은 씁쓸한 표정을 한 채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한테 들었습니다. 잠깐 아버지 정신이 돌아오셨다면서요?”
“네? 아…… 예.”
“어떠시던가요?”
“용케 절 알아보시고 심부름을 시키시더군요.”
“심부름이요?”
“네.”
“어떤 심부름을…….”
“곧 배식 시간이니까 가서 밥이나 먹고 오라는 심부름이셨어요. 여기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참 잘하신다면서 말이죠.”
“푸하하하! 아버지다운 심부름이셨네요. 그래서 식사는 잘하고 오셨나요?”
“네. 할아버지 말씀처럼 여기가 밥을 아주 잘하더군요.”
김주훈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시간…….”
“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생각이요?”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사람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도 않은데 딱 두 시간만 일찍 올걸 하는…… 그런 생각이요.”
“아.”
“아버지가 제정신일 때 대화를 나눠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해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힘이 드네요.”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
그가 말했다.
“기자님은 기적을 믿으십니까?”
“기적이요? 아뇨.”
“그럼 이참에 한번 믿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예?”
“혹시 아나요. 지금 딱 병실로 돌아갔는데 할아버지가 제정신으로 기자님을 반겨 주실지.”
“그런 걸 믿기에는 제 나이가…… 하하하.”
“밑져야 본전이잖습니까.”
김주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러네요. 밑져야 본전이네요. 가 보죠.”
* * *
“축하드립니다. 요시로 님. 원하시던 바를 얻으셨군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카달란.
그 얼굴에는 천진함이 가득했다.
“다 천신들 덕분입니다.”
“카베니안 님의 힘을 나눠 가지신 건 큰 축복입니다. 카베니안 님은…….”
카달란이 말을 하다 말고 몸을 움찔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요시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지만 카달란은 대답이 없었다.
카달란이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난 후, 그것도 독백에 불과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