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il Returns to School Days RAW - chapter (136)
26. 악(惡)은 악을 낳는다 (4)
그날 저녁.
회원들과 작당 모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이미소는, 퇴근한 남편의 옷을 정리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우리 민우 가르치는 선생님 알지?”
“그 고등학생? 그건 왜?”
강동철이 무심하게 반응했다.
매일 피로에 찌든 얼굴로 퇴근하나, 특유의 단정한 스타일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외관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게 그의 주관이었고, 덕분에 주변 인물들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강동철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어서 말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뜸을 들이는 모양새가, 평소의 아내답지 않았다.
“그게 말이야…….”
조금 전.
작당 모의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징계위원회에서 상당한 입김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로 남편을 설득하라고 말이다. 보통 강남 사모님들은 ‘남편의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다. 스스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도 있지만, 자식의 교육을 위해 정오부터 차를 마시는 사모님들은 대부분 전업주부였다.
그녀들의 권력은 남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로.
강동철의 동의를 끌어내야 했다.
하지만 강동철이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아는 이미소로서는, 선뜻 생각한 바를 내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하나뿐인 자식의 일이지 않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민우의 일이지 않은가.
과외를 받으며 강민우가 얼마나 밝아졌는지를 알기에, 이미소는 용기를 내서 말을 내뱉었다.
“우리 민우가 그 선생님 과외를 받으면서 성적이 정말 많이 올랐잖아. 진짜 대단한 분이야. 어떻게 고등학생이 그렇게 잘 가르칠 수가 있지? 본인 성적은 또 어떻고. 전국 모의고사에서 1등을 한 걸 보면, 아마도 한국대 수석 입학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겠지.”
말을 빙빙 돌렸다.
곧바로 본론을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듣기로 선생님이 얼마 전에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하더라고.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내가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래서 조금 전에 맘카페 회원들이랑 모여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미소야.”
“응?”
말을 툭 끊었다.
강동철이 차가워진 눈빛으로 이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
판이 깔렸다.
강동철이 이상함을 눈치챈 이상, 이미소로서도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미소가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과외 선생님이 이번에 징계위원회를 받게 되었어. 내가 그분을 잘 아는데, 절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릴 분이 아니거든? 아마도 전국 1등이 전학을 오니까, 그걸 시기한 애들이 선생님을 괴롭히다가 문제가 발생한 거겠지. 하여튼 여보가 좀 도와줄 수는 없어? 법적으로 잘 알잖아. 이러다 과외 끊기면, 우리 민우 한국대 못 갈지도 몰라.”
간절한 음성이었다.
울먹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미소의 모습에, 강동철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가 민우를 가르치며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도 잘 알아. 우리 어머니가 네게 한 소리를 하는 것도, 그래서 교육에 쓴답시고 큰돈을 끌어다 써도 별말 하지 않았던 거고. 그런데 넌, 내가 뭐 하는 사람인 것 같아?”
“……검사잖아.”
“그래, 대한민국 검사야. 내가 나라에서 받는 월급은, 막대한 권력은. 절대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주어지는 게 아니야. 그랬다간 이 나라는 내게서 ‘검사’라는 직함을 빼앗아 가겠지.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잘 알면서도, 이렇게 말을 꺼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민우 일에 진심인 거겠지. 민우가 한국대에 입학하지 않아도 좋아. 어머니에게는 압박하지 말라고 따로 말할 테니, 더는 이런 말은 하지 마.”
“……알겠어.”
이미소가 고개를 숙였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강동철은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법조계 명문 가문이니만큼, 비슷한 학벌에 비슷한 조건을 갖춘 수많은 결혼 상대들이 추파를 던지는데도 강동철은 이미소와 결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부모님은 아들을 지지해 주었다. 늘 현명하고 똑똑했던 아들의 선택을 믿겠다고 말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둘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한쪽으로 쏠린 결혼.
이미소의 예쁜 외모에 강동철이 현혹되었다고 떠들었다.
명문 가문에 이상한 애가 들어갔다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미소 자체는 충분히 좋은 조건을 갖추었지만, 상대가 강동철이다 보니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성적에 집착했다. 시댁의 기대를 떠나서, 이미소 스스로 강민우를 잘 가르쳐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굳이 자식 교육에는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검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에 생각이 바뀌었다.
너무 무심했다.
이건 아니었다.
강동철이 말했다.
“내가 따로 과외를 해 줄게.”
“……어?”
“일 끝나고 민우를 내가 가르치겠다고. 그러니까 더는, 이런 일로 내게 불편한 말은 하지 말아 줘.”
딱.
거기까지였다.
남편으로서는 충실하되, 검사로서는 절대 도와줄 수 없었다.
* * *
징계위원회 D-3일.
진경희는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징계위원회라니요.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닙니까? 이제 막 전학 온 애가 적응하지 못하고 사고를 좀 칠 수도 있지, 고등학교 3학년짜리를 그렇게 가혹하게 몰아붙이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러다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그 모든 결과를 책임지실 겁니까?] [듣기로는 피해 학생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데. 이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사건 아닌가요?] [이전에 고동수 사건도 그렇고. 교감 선생님의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저희도 징계위원회에 참석해야겠습니다. 혹시 모를 부당한 대우를 대비해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겠습니다.]사방에서 연락이 빗발쳤다.
다들 허투루 받을 수 없는 전화였다.
강남 바닥에서 이름을 떨친다는 사모님들이었고, 아무리 골든 서클의 끄나풀이라고는 하나 대놓고 그녀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그렇다 한들. 진경희가 한발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에게 갖추는 예의는 화를 내지 않다뿐이지, 타협의 여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진경희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네, 네. 그렇게 하시죠.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징계 과정에 문제가 없음을 직접 확인해 주셔도 좋습니다. 예, 그때 뵙겠습니다.”
툭.
전화를 끊었다.
그대로 눕듯 의자에 기대며, 진경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겨우 이 정도였어?”
우스웠다.
김현성이 처음 징계위원회를 언급할 때만 하더라도, 뭐 얼마나 대단한 배경을 끌어들일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골든 서클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어쨌든 간에 지금 최전선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지 않은가. 싸움이 심각해지면, 자신의 몸에도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겨우 맘카페라니.
겨우 사모님들이라니.
이런 사람들을 한 트럭째 몰고 오더라도 자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교사와 학부모들의 공생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한쪽을 끊어 낸다고 해서 크나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사모님들이 주던 것은 골든 서클이 대신해 줄 터. 뭐가 크게 걱정이겠는가.
“참, 안일하네. 대산에서 먹혔던 방식이 이곳에서도 통할 줄 알다니.”
의도가 보이니.
마음이 놓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의 계획 따위는, 강남이라는 높디높은 현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드륵.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 놓인 담배를 꺼내고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입에 물었다.
틱틱.
이곳은 교감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 말할 수 없었다.
진경희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현실의 부도덕함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 * *
마침내 징계위원회 당일이 되었다.
예상대로였다.
이미소를 필두로 우르르 몰려든 맘카페 회원들은, 징계위원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으름장을 놓았다.
“교감 선생님. 정당한 판결을 부탁드릴게요.”
“지켜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문제의 여지가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시작부터 난리였다.
진경희는 대충 흘려듣고는 징계위원회를 시작했다.
모두가 착석한 자리.
진경희가 말했다.
“지금부터 징계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장원기 선생님,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알겠습니다.”
드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집중되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참석한 사람의 면면이 화려하다 보니, 그로서도 괜히 긴장되었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 유연호 학생이 수업 도중에 김현성 학생의 머리에 지우개 조각을 던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유연호 학생은 친구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시비를 걸었고, 김현성 학생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일방적인 폭행을 가했습니다. 해당 반 학생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았으며, 분쟁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폭행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 유연호 학생은 그로 인해 영구적인 장애를 안게 되었습니다.”
“영구적인 장애라고?”
“이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폭행까지는 알았다.
그런데 영구적인 장애라는 단어가 주는 임팩트에, 이미소와 회원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경희가 한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피해 학생 변호사님. 증거 자료가 있으십니까?”
“예. 이것이 바로 그 진단서입니다. 뺨을 수차례 맞으면서 이빨을 세 개나 발치해야 했고, 그중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위치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한 학생의 무자비한 학교 폭력으로 인해, 피해 학생은 영원히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 현재 정신과 치료 중에 있습니다. 교감 선생님. 감히 말하는데, 확실한 처벌만이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피해 학생.
유연호는 모두에게 보란 듯이 울먹이는 반응을 보였다.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들썩이는 그 모습에,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완벽했다.
김현성은 명백한 가해자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상황에 쐐기를 박는 무기도 준비되었다.
변호사가 재차 말했다.
“대성 미래 고등학교 학부모님들이 뜻을 모아, 김현성 학생을 일벌백계(一罰百戒)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으나, 이번 사건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한 번의 폭력은, 그 한 번의 폭력이 표면 위로 드러날 때까지 수많은 폭력이 행해집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징계위원회는 보통 양쪽의 입장을 들어 보고 합리적인 판결을 내리건만, 진경희의 지시 아래 변호사가 일방적으로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다. 애초에 반격의 여지는 허락되지 않았다. 피해 학생의 영구적인 손상과 정신과 치료, 그리고 학부모들의 뜻이 담긴 글은 상황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체크메이트였다.
사실상 끝났다.
진단서가 진짜인지, 아닌지.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이 자리에서 김현성의 목줄을 틀어쥔다면, 그 판결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미소가 발을 동동 굴렀다.
도와주고 싶은데,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
진경희는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예상대로 풀려 가는 상황은 매우 만족스러우나, 이건 생각보다 너무 순탄했다.
‘이상해. 그때 봤던 변호사. 그 사람이 왜 이 자리에 없는 거지?’
박종수라고 했던가.
교무실에 찾아와서 빈틈없는 논리를 펼쳤던 그 사람이, 징계위원회가 이루어지는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를 대비해 유연호 쪽 변호사도 고용한 것이지 않은가. 어떤 방법으로 반격해 오든 무너트리도록 진단서와 같은 것들을 준비했는데, 그 어떤 반격도 없었다.
김현성의 옆자리.
공석이었다.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 허전한 자리가 왠지 모르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김현성.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한 소년.
너무나도 차분했다.
도저히 위기를 맞이한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경희가 말했다.
“김현성 학생. 해명 발언하시죠.”
발언권을 넘겼다.
불길함은 애써 억눌렀다.
김현성이 뭘 준비했든, 이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할 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김현성에게로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