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1
이윽고, 눈을 떴다.
“여긴?”
주변은 온통 풀이었다.
숲은 아닌데, 그렇다고 초원도 아닌… 뭐라고 해야 할까.
나무와 풀이 무성한, 광활한 대지.
오픈된 정글(?)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하다 싶은 곳이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오?’
가상 세계에 도착할 때면, 늘 가장 먼저 드는 생각.
방향 감각 없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존 다큐멘터리에서 봤건만.
‘일단 가보자.
딱히 방법이 없으니, 움직여보기로 했다.
– 사악사악.
무성하게 자란 풀숲 사이를 가로질렀다.
풀이 다리에 스치면서 내는 간드러진 소리가 연신 귀를 자극한다.
뭔가 초장부터 소리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이쪽으로 가는 게 맞는 건가?”
우진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날씨가 워낙 덥고 습하다 보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후우.”
풀숲 끝에 도달하자, 눈앞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늘에서 잠깐 숨 좀 돌리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려나.
우진은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마저 옮겼다.
그 순간,
– 딸칵.
문득 들리는 불길한 소리.
이전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여태까지 귀를 자극했던 것들은 전부 자연에서 파생되었던 소리였는데, 지금은 무언가가 인위적으로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였으니까.
동시에, 발끝에서 이상한 느낌을 감지한 것은 덤이었다.
그대로 얼어붙은 우진은 살며시 고개를 내렸다.
왼쪽 발밑에 보이는 무언가.
설마,
‘지, 지뢰?’
정신이 아찔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때부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이건!
난감한 상황 속.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만히 서 있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상 세계 속이라 해도, 지뢰에서 발을 떼는 건 무섭다고요.
현실처럼 오감이 생생하게 작용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
막말로, 때는 폭발로 인한 사망이었으니까 고통이 짧았다 치더라도.
지뢰는… 상상도 하기 싫다.
어느 누가 이 상황에서 과감하게 발을 움직일 수 있을까.
“젠장.”
심한 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우진은 침착하려 애썼다.
그때였다.
– 철컥.
“……?!”
뒤통수에 무언가가 닿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보지 않아도 그것이 총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뢰도 모자라서, 이젠 총이냐….
“손들어.”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남자 목소리였다.
우진이 말없이 양팔을 들자, 의문의 남자가 서서히 그의 앞으로 이동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상당히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백우진 배우님?”
“아…? 네, 네, 맞는데….”
“일단, 급한 불부터 끄죠.”
남자는 총을 집어넣고, 자신의 허리춤에 꽂힌 칼을 꺼냈다.
이내, 그가 무릎을 꿇었다.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남자는 우진의 발밑에 있는 위험한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발과 지뢰 사이 공간에 천천히 칼을 밀어 넣었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지는 긴장감.
‘옛말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였어!’
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스으으윽.
땀이 절로 흐르는 소리.
잠시 후,
“제가 받치고 있으니, 천천히 발을 드세요.”
“아, 넵!”
남자의 말에 따라, 우진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다행히도,
“됐습니다.”
“하아, 살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몸에 힘이 풀린 우진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앉으시면 안 돼요!”
“네?”
“지뢰가 어디 묻혀있을지 모릅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헉!”
오뚝이처럼, 냉큼 일어나게 만드는 그의 한마디였다.
엉덩이로 깔고 앉을뻔했다고 생각하면, 어우.
“제가 걷는 길 그대로 따라오세요.”
우진은 남자를 따라 걸었다.
십 분 정도를 걸어가자, 나무로 된 집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공간이 나왔다.
“여깁니다.”
우진은 남자의 안내에 따라 목제(木製)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약간 어둡지만, 깔끔해 보이는 내부.
그러나,
“…….”
한쪽 구석에는 무려 샷건이, 책상 위에는 각종 나이프가 담긴 상자가 있었다.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수부대원들이 쓰는 무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자연스럽게 말문이 막히는, 공기의 흐름이 괜스레 무거워진 기분이다.
“마땅히 대접할 게, 이것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드세요.”
무표정이었던 남자가 드디어 미소를 내보였다.
우진은 남자가 건넨 시원한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야 갈증이 좀 풀린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이정혁이라고 합니다.”
그가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우진의 예상대로, 남자는 의 히로인인 이정혁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배우 백우진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규보 형, 그리고 이융.
여태껏 만났던 모든 가상 세계 속 캐릭터가 그랬듯, 이정혁도 이미 우진이 누군지를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깔리는 전제일 테니.
우진은 이 부분에 대해 굳이 묻지 않았다.
“많이 놀라셨죠?”
“아, 네. 지뢰는 처음 밟아봐서….”
“이곳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오금이 저려도 이상하지 않을 얘기다.
“배우님께서도 이곳에 대해 대강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정혁의 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그대로 가상 세계가 구현된 것이라면, 이곳은 아마도 이진태가 이끄는 마약 조직의 아지트겠지.
태국어로 조직을 의미하는 ‘클룸(กลุ่ม)’과 이진태의 성을 붙여 극 중에서는 ‘리클룸’이라 부르는 조직이다.
하루하루 ‘전쟁’에 버금가는 세력 다툼이 진행 중인 골든 트라이앵글에 존재하는 수 개의 마약 조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세력.
“리클룸의 아지트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조직명도 아버지 성격처럼 참 단순하죠?”
이정혁이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그는 이진태가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 양부임을 아직 모르는 듯 보였다.
아직 전체적인 대본 완성이 안 된 상태.
그로 인해, 구현된 가상 세계 속 캐릭터들이 인식하고 있는 정보 또한 한정적인 걸까?
혹시 모르니, 아직은 불확실하거나 불필요한 얘기는 자제해야겠단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우진은 손에 든 음료를 한 모금 더 들이켠 뒤, 이정혁에게 물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어떤가요?”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번 가상 세계가 열린 근본적인 원인은 골든 트라이앵글 속 이정혁의 삶을 알고 싶은 우진의 궁금증 때문이었거니와.
이정혁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얘기도 이에 대한 말뿐일 테니까.
“…….”
우진의 질문을 받은 이정혁의 얼굴은 의미심장했다.
아니, 뭐랄까.
이정혁이라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 자체가 그냥 오묘했다.
그가 여태껏 겪어온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온갖 감정들이 이미 겉모습에 묻어 있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정혁이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죽음이라는 녀석과 말이죠.”
그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제가 아버지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뭔 줄 아십니까?”
우진이 얼굴에 궁금함을 가득 담은 채 바라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첫째,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마라. 둘째, 누군가가 네 정체를 알았다면, 망설임 없이 죽여라. 그리고, 마지막….”
이정혁은 피식 웃더니,
“머리, 목, 가슴!”
우진의 신체 일부를 가리키며, 스타카토 식으로 짧게 외쳤다.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우진이 움찔하자, 이정혁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말투를 따라 하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첫 번째랑 두 번째는 대강 알겠는데, 마지막은 무슨 뜻인가요?”
“상대를 깔끔하게 죽이려면, 거기만 쏘라는 겁니다. 늘 강조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되레 제가 죽는다고 하셨죠.”
“설마,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라신 건가요?”
“네,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제가 사격 훈련 때 한 발이라도 다른 부분을 맞추면, 정확히 맞출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으셨거든요.”
이정혁은 자신의 양 손바닥을 우진에게 펴 보였다.
잠깐 봐도 알 수 있었다.
굳은살투성이에, 성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는 모습.
이렇게 보니, 일상의 흔적이란 게 어떨 때 보면 참 무섭게 다가온다.
얼마나 오랫동안, 치열하게 총을 잡고 살았는지가 그냥 느껴지네.
이정혁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배우님께서 궁금해하시는 이곳의 삶이 이렇습니다. 저뿐만이 아니에요.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전부….”
– 펑!
그때였다.
난데없이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우진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획 돌아갔다.
“밖에 무슨 일이죠?! 큰일 난 거 아니에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아닙니다.”
그러자, 이정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우진을 안심시켰다.
“아마도 지뢰가 폭발한 모양입니다. 아까 배우님께서 겪었다시피, 골든 트라이앵글 주위는 온통 지뢰밭이니까요.”
“그렇다면….”
“동물이 밟았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뭐… 사람이겠죠?”
…저 말을 듣고, 얼른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지극히 정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