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63
“했지. 몰입할 새도 없이 그냥 했는데, 얼굴이 일그러지더라고.”
자승자박의 꼴이 났더란다.
배우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분석이나 연구의 과정 없이 대충 즉석으로 보여준 연기가, 본인의 연기보다 훌륭했음을.
시켜놓고 되레 혼자서 이골이 난 모양이었는지, 그다음부터 녹화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녹화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어. 그때가 마지막이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네.”
“…대충 어떤 사람인지 파악은 했다. 일단, 들어가자.”
“그래, 신경 쓸 필요 없지. 우린 우리 거만 잘하면 돼.”
“맞아.”
우진은 스즈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금방 흘려보냈다.
어쨌든, 과거에 그런 행동을 했던 사람일지 몰라도.
편견을 갖고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참고는 하되, 고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스즈키와 함께 대기실로 재차 들어서는 순간.
그때였다.
“이것들이 미쳤나, 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고이의 외침이었다.
253화
우진과 스즈키 마코토가 황급히 대기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한 고이가 마츠가와 리키의 스타일리스트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메이크업 상자를 다 풀지 못한 혜정 역시 팔짱을 낀 채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고.
팀장들과 매니저들은 대기실에 짐만 내려놓고 곧장 미쉘을 따라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현재 배우들과 개인 스태프들만 있는 상황에서, 별안간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이를 감지한 우진과 스즈키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왜 그래요?”
“아니, 얘네가 뜬금없이 시비를 걸잖아.”
“시비라니, 무슨?”
“지네들이 먼저 와서 쓴 대기실이니까, 우리보고 짐 풀지 말라던데?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야, 너희가 여기 전세 냈냐?! 공용 대기실이라고 문 앞에 떡하니 붙어있는데, 뭔 말도 안 되는 텃세를 부리려고 그래!”
혜정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우진과 스즈키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는 한편, 주변부터 살폈다.
“…대충 무슨 그림인지 알겠네.”
“나도.”
넓은 세트장 공간에 마련된 화장대와 행거는 총 세 개였다.
이로써, 금일 미팅 대상자가 마츠가와까지 총 세 명이라는 사실을 일단 가늠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츠가와 측에서 화장대와 행거를 전부 이어붙여서 사용 중이라는 것에 있었다.
한 개만 써도 공간이 남아돌 정도로, 화장대와 행거는 크기가 컸다.
누가 봐도 과하게 사용하는 꼴인데, 굳이 다 쓰겠다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
기 싸움을 펼치고 싶으면, 제대로 된 싸움이라도 걸어오든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떼였다.
혜정과 고이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도 짐이 많지 않아서, 한 개… 아니, 반 개만 써도 충분해. 그래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세팅하고 있었거든? 그랬더니, 갑자기 자기네들이 쓰고 있는 화장대에 왜 물건 올리냐면서 다른 데로 가라잖아.”
“우진아, 봐봐. 행거도 남아돌아. 의상 몇 개나 걸겠냐고. 애초에 지네들이 맘대로 갖다 쓴 게 문제지, 우리가 잘못한 거야?”
“싸울 가치도 없고, 우리가 화를 내봤자 결국은 우진이 너랑 스즈키 씨 얼굴에 침 뱉는 꼴이라서 그냥 대꾸 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울컥한 혜정이 말끝을 흐렸다.
순간, 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싸움을 걸어온 탓이겠지만, 어쨌든 스태프들 사이에서 가벼운 언쟁이 벌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늘.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의 끝에는, 여전히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마츠가와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사람이 나보고 어차피 자기가 캐스팅될 게 뻔한데 뭐하러 힘들게 세팅하려고 하냐면서,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는 거야.”
“잠시만요. 저 사람이 직접 누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요?”
“어, 진짜 짜증 나….”
혜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진이 굳은 표정으로 마츠가와를 쳐다보았다.
스태프들끼리 주고받은 신경전이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용의가 있었으나.
상대 배우가 직접 관여해서 ‘내’ 스태프들한테 뭐라고 했단다.
그런 이상, 이건 결 자체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로 번진 셈.
우진은 여전히 비소 섞인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츠가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봐요.”
“……?”
우진의 말에, 마츠가와가 몸을 일으켰다.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괜스레 이리저리 둘러보는 액션이 참으로 뻔뻔했다.
“지금, 나 부른 겁니까?”
“내가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말하고 있는데, 그럼 당신 말고 누굴 부르고 있겠습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설프니, 그 정도로만 하시죠.”
“하….”
마츠가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우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일절 없었다.
일말의 미동 없이 고정된 시선.
기세등등하던 모습과 달리, 우진이 내뿜는 기에 눌린 마츠가와가 살짝 주춤거렸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같은 동양인 배우들끼리 할리우드에서까지 이렇게 기 싸움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습니다만. 그쪽이 직접 나서서 내 사람들한테 뭐라 한 부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같은 동양인 배우?”
마츠가와의 한쪽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 스즈키가 그랬지.
본인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라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질 낌새가 단번에 느껴졌다.
그래서, 우진은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말을 쏟아내었다.
중점은, 그가 ‘내’ 스태프를 욕보였다는 것에 있지.
누구는 동양인 배우고, 누구는 할리우드에서 연차가 깊은 배우고를 따지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배역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니, 그쪽에서 저를 적대적으로 대하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싸움을 걸고 싶으시면 배우답게 연기로 하시죠. 엉뚱한 선 넘지 마시고.”
“뭐, 뭐라고요?”
“두말할 필요 없고, 제 스타일리스트에게 얼른 사과하시죠. 반대로 제가 그쪽 스태프들한테 싫은 소리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나지막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
처음 보는 우진의 모습에, 고이와 혜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덩달아 기세등등하던 마츠가와의 스태프들까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살짝 기를 눌려주려는 의도로 던졌던 가벼운 텃세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배우 대 배우’ 간의 대립으로 번진 꼴이니.
당황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상태로, 눈치만 보기에 급급한 모양새였다.
“사과하시라고요.”
우진이 재차 말을 곱씹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그쪽 스태프들한테 뭐라고 한 적이 없는걸?”
“그럼 내 스타일리스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안 했다고 몇 번을 말해!”
마츠가와가 크게 소리쳤다.
그의 고함은 넓은 세트장을 돌고 돌아 메아리쳤다.
우진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최대한 참으면서 좋게 끝내려고 하는데, 방귀 뀐 놈이 성까지 내는 꼴이다.
서로를 노려보는 우진과 마츠가와를 둘러싼 긴장감이 가득 맴돌았다.
한숨을 깊게 들이쉰 우진이 입을 떼려는 찰나,
– 덜컥.
“음? 분위기 왜 이래요?”
“우진아!”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자마자 놀란 모습으로 대기실에 들어섰다.
미쉘과 막스, 지미 등을 비롯한 UTA 관계자들과 김태곤, 김미소 팀장과 준안, 사토시 등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랴.
대충 상황을 파악한 캐스팅디렉터들이 ‘후다닥-’ 다가가 각자가 데려온 배우들을 챙겼다.
“우진, 참아요. 상종해봤자 우리만 손해에요.”
“네,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아이고, 내가 우진을 몰라요? 우진이 이럴 정도였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해요.”
“스즈키, 괜찮아요?”
“저야 뭐… 우진이가 비 피하려다 똥 맞은 격이죠. 저까지 나섰다가는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참는 게 더 힘들었어요.”
돌아선 우진과 스즈키가 대기실 한쪽 편에 자리 잡았다.
할 말은 많지만, 일단은 넣어두기로 했다.
미팅을 앞둔 상황에서 평정심을 잃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쩌면, 이걸 노리고 계획적으로 시비를 건 걸지도 모르고.
눈에 뻔히 보이는 상대방의 하수에 놀아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누나, 괜찮아요?”
“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인걸. 오히려 내가 미안해, 우진아. 그냥 참고 넘어갔으면 되는 건데….”
“맞아. 우리가 끝까지 무시했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 괜히 미팅 앞두고 신경 쓰게 만들었네. 미안해.”
“누나들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숨기지 않고 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이런 부당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줘요. 난 내 욕하는 건 얼마든지 참겠는데,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으면서 내 사람들 건드리는 건 진짜 못 참아.”
고이와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웃음을 짓는 것은 덤.
우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와 별개로, 준안과 사토시의 따가운 눈초리는 계속 마츠가와 쪽을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고이 누나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준안이 형이지만, 이럴 때는 얼마나 끈끈한 동료애를 보여주는지.
김태곤 팀장님과 김미소 팀장님도 ‘내’게 엄지를 ‘슬쩍-’ 치켜들어 보이시면서, 무조건 참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별 거지 같은 일도 다 겪어보네. 액땜했다고 치자!”
“할리우드, 살아있네~!”
금세 활력을 되찾은 ‘팀 우진’이었다.
– 위이이잉.
“오늘의 요리사는 누가 뭐라 해도 나야! 그러니, 내 사심대로 재료를 꾸밀 것이야!”
헤어드라이어를 켠 혜정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 * *
웨스트엔드 뮤지컬에서 맡았던 ‘오르페우스’와 ‘헤파이스토스’ 역할 이미지 때문에, 머리를 계속 기르고 있었다.
할리우드로 출발하기 직전에 머리를 살짝 정리했었는데, 뭐랄까.
현재 우진의 헤어스타일은 앞머리가 살짝 긴 ‘리프 컷’ 형태.
혜정이 헤어드라이어 바람을 이용해 살짝 볼륨감을 주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
우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자, 다음! 스즈키 배우님.”
그에 반해, 스즈키의 헤어스타일은 기장이 짧았다.
‘투블럭’에 가까웠으니, 혜정은 이번에는 헤어드라이어가 아닌 왁스를 집어 들었다.
이내 그녀의 두 손이 거침없이 스즈키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스타일링.
동일한 의상과 비슷한 체격이나, 180도 다른 헤어스타일.
우진과 스즈키는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역시… 남자는 머리야.”
혼잣말을 읊조리던 준안이 자신의 머리도 만져달라며 ‘슬쩍-’ 자리에 앉았다가, 혜정에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시무룩해진 그의 뒷모습을 사토시가 토닥여주었는데, 틈새 웃음을 자아내고 말았다.
배우들이 미팅 장소에 들어간 이후에 만져주겠다는 딜 덕분에, 금방 웃음을 되찾았지만 말이다.
“시간 살짝 남는데, 눈썹까지 정리하자. 남자는 눈썹만 정리해도, 이미지가 확 달라져.”
“네, 누나.”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즈키 씨,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우린 같은 팀이에요, 훗.”
고이와 혜정이 미팅 시간 직전까지, 두 배우를 꾸몄다.
잠시 후.
그녀들의 손에서 신인 배우 ‘Woo-jin’과 ‘Suzuki’가 탄생했다.
전체적인 확인까지 끝난 찰나.
미쉘과 막스가 타이밍 좋게 들어섰다.
“준비 끝나셨나요?”
“네, 방금 마쳤습니다.”
“와, 아침에 나랑 같이 온 우진과 스즈키는 어디 갔습니까? 못 알아보겠어요!”
“하하하!”
미쉘이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배려로 들려서, 우진과 스즈키가 호쾌하게 웃었다.
“자, 갑시다!”
“잘해보자, 스즈키.”
“굿럭, 우진. 파이팅이야.”
서로의 손을 맞잡은 두 배우가 각자의 행운을 빌었다.
선의의 경쟁을 펼쳐보자는 메시지가 온전히 전해졌다.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인 마츠가와까지 더하면, 혹자는 고작 삼파전에 불과한 대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 우진과 스즈키는 왠지 모르게, 확신하고 있었다.
여태껏 각자가 치러온 수많은 오디션이 있었을 텐데, 단연코 이번이 가장 치열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