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12
– 드르륵.
정면에 있는 큰 철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덤이었다.
그림자가 져서 검은 실루엣처럼 보이는 남자.
이내 그가 불빛 아래로 이동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군복 차림에, 머리에는 군모를 쓰고 있는 동양인의 얼굴은 우진에게 상당히 낯익었다.
바로, 매튜였으니까.
“잘 지내셨소?!”
환한 표정을 지은 그가 우진에게 외쳤다.
우진이 팔을 올려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매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잠시 후.
매튜가 왼쪽 어깨에 걸친 소총을 땅에 내려놓으며, 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진은 매튜의 손을 맞잡으며,
“오랜만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두 사람은 맞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을, 서로 맞잡은 손 위에 살며시 포개었다.
재회해서 참으로 반가운 감정을 말 대신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첫 만남 때나 지금이나, 시선을 사로잡는 매튜의 금발은 여전했다.
그런데, 사람 자체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현저하게 달랐다.
이전에는 뭐랄까.
눈빛이나 감정은 진작에 죽은 상태이지만, 아내와 딸의 생사를 꼭 알아야겠다는 목표 때문에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면.
지금은, 예전의 목표를 넘어서는 더 큰 목적의식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확실히 생기가 돌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우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윽고,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소. 나를 찾아온 손님을, 허름한 창고 안에서 대접할 수 없지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요?”
“하나하나씩 소개하면서 말씀을 드리리다. 가시지요.”
“그러시죠.”
소총을 다시 어깨에 멘 매튜가 우진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전방 멀리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태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을이 점점 옅어지는 시각.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 휘이잉.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세상은 여전히 빙하의 시대를 방불케 하는 강한 추위 속에 놓인 모양이었다.
어둠은 무척이나 긴 반면에, 밝음은 현저하게 짧은 시대다.
어두운 것들에게, 밝은 것들이 전부 잡아먹히고 있는 세상이고.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오.”
매튜는 오늘이 ‘BOVID’ 팬데믹(Pandemic) 창궐 이후, 5년 6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라고 말했다.
과 연결 지어 보면, 1편 엔딩 후 2년이나 더 흐른 시점인 거다.
“이전에는 미국이란 나라가 있었다면, 지금은 캘리포니아라는 나라가 있다고 보면 되오.”
괴생명체가 되지 아니한 생존자들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왔다.
전염병으로부터, 그리고 끔찍한 살육자로 변한 괴생명체들로부터 살아남은 비감염자들이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도, 비감염체 생존자들이 이곳의 문을 두드렸었소.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외다. 남자 둘에, 여자 셋이었소. 생존자들이 문을 두들겨도 기껏해야 1~2명씩 오는 경우만 봤었는데, 이렇게 5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한 번에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소. 그것도, 가족 관계인 사람들이 말이요.”
“진짜요?!”
“신기하지요. 당장 얼어 죽거나, 혹은 괴생명체들에게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무려 5년이 넘도록 버텨왔단 얘기잖소.”
매튜가 말을 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 생명이라는 불씨는 참으로 질기다고, 절대 쉽게 꺼지지 않는다고.”
“그렇죠. 생명체가 지니는 의지 중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하게 발현되는 건 없을 테니까요.”
우진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주억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십여 분을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막사 앞이었다.
천막으로 지어진 막사들이 여러 개가 설치된 지역이었는데, 현재에는 쓰이지 않는 건물들이 주변에 즐비한 곳이었다.
도시의 형태가 남아있는 곳에, 천막이라.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이 들어서, 오묘했다.
“여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하하, 편히 들어오시오.”
우진은 매튜의 안내에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짙은 시간대라 어둡지만, 전등이 켜져 있어 밝은 내부.
상당히 깔끔해 보였다.
“저번에는 수동식 화로였는데, 이번엔 난로네요.”
우진이 온열기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매튜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여기는 전기가 통하거든.”
“전기 하나만 있어도, 삶이 정말 편해지네요.”
“그렇소.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 속도는 더디지만, 인류의 문명은 천천히 복구되고 있소이다.”
매튜가 무장을 풀며 말했다.
그는 막사 한편에 놓인 버너에 냄비를 올리고, 물을 담았다.
물이 금세 끓자,
“이거, 기억나시오?”
매튜가 손가락에 낀 무언가를 우진에게 들어 보였다.
첫 만남 때 먹었던, 쇠고기 수프 봉지였다.
“아!”
우진의 반응에, 그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수프가 완성되었다.
“대접할 만한 것이 이것밖에 없군. 석식은 아직 때가 아니라서.”
“데자뷔네요.”
“정답이오. 듭시다.”
군대에서 힘든 훈련 중에, 혹은 훈련을 마치고서 먹는 라면보다 맛있는 라면은 없다고 하는데.
이 수프의 맛도 그러했다.
가상 세계에서 먹는 음식들은 현실로 돌아가면 가끔 생각이 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헤파이스토스를 만나는 자리에서 먹었던 ‘넥타르’와 ‘암브로시아’가 최고였고.
그다음 가는 음식이 바로, 매튜와 함께 먹는 ‘쇠고기 수프’였었다.
다시 만나니, 반갑네.
– 후루룩.
수프를 한껏 들이켰다.
두 그릇밖에 안 비웠는데, 배가 차는 기분이다.
식사가 끝난 뒤, 매튜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건네주었다.
우진은 뜨거운 잔을 핫팩 삼아, 만지작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매튜도 이내 그의 옆에 앉았다.
다시금, 대화의 꽃이 피었다.
“이곳은, 정확히 어딘가요?”
“캘리포니아 지역 최북단이오. 과거 지도로 말하자면,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요.”
“파견 개념인 건가요?”
“그렇다고 보면 되오.”
매튜가 말을 덧붙였다.
현재 캘리포니아로 모여든 생존자들의 수는, 팬데믹 이전의 미국 인구의 약 1프로.
300만여 명 정도라고 한다.
캘리포니아라는 나라가 있다고 보면 된다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태평양에 면한 지역이고, 남쪽 내륙에는 넓은 사막이 있소. 여기서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북쪽 해안이 나오는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경사지가 있지요.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도 있어, 정찰도 용이하오. 현 인류에게는 여러모로 좋은 여건인지라, 여기에 터전이 마련된 것 같소.”
매튜는 우진이 궁금해하는 부분들을 전부 얘기해주었다.
그의 설명이 곧, 의 배경 설명이나 다름없기에.
우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캐릭터의 생생한 증언보다 배우에게 더 좋은 레퍼런스는 없으니까.
대본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세트장에 직접 가서 눈으로 담는다 한들.
실제 장소를 한 번 둘러본다거나, 실제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 한 줄을 듣는 것보다 효과적인 자료는 없으니까.
“카오스가 왜 생기겠소? 원래 존재하던 질서라는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그 말인즉슨, 무너진 질서는 다시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얘기이고. 인류는 지금,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소이다.”
캘리포니아에 모인 생존자들.
그들이 곧, ‘인류’였다.
이 지역에 남아있던 군대와 각지에서 도피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괴생명체들을 물리쳤다.
어느 정도 ‘청정구역’이 되었다고 판단되자마자, 당시 해당 군의 최고 지휘관이 캘리포니아를 봉쇄해버렸다.
장벽이 세워졌고, 파괴된 문명을 복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고 한다.
물론, 매튜도 자세하게는 모른다고 했다.
어쨌거나 본인은, 캘리포니아와정반대에 있는 워싱턴 D.C에서 3년 동안 혼자 지냈었으니까.
유르케(Urke) 용병 시절 때 함께 전장을 누볐었던 동료들과 오랜만에 조우한 자리에서 전해 들은 얘기라 했다.
1편 엔딩에서 만났던 ‘머레이’, ‘애나’, 그리고 ‘케이’ 등은 남쪽으로 갔다고 했다.
“군대가 재편성되면서, 나처럼 외인부대 출신들은 북쪽으로 오게 됐소. 그들처럼 전직 군인이었거나 소방·경찰 공무원 출신이었던 사람들은 남쪽으로 흩어졌고. 방어할 지역이 넓으니 말이오. 조만간 부대 편성이 다시 바뀐다고 들었는데, 인연이 있으면 그때 다시 만나지 않겠소?”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네요. 극한의 상황에서도, 이렇게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인류가 한때 먹이사슬의 최강자에 오른 이유가 무엇이겠소?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 아니겠소? 아예 없는 걸 만들어내는 상황은 아니니, 지금이 훨씬 나은 조건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든, 문명을 발전시키는 능력자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요. 나 같은 군인들이 그들을 지켜주면 되는 것이고.”
“당신을 연기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돼요. 인류의 변천사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만약 이런 현상이 내가 사는 세계에서 일어난다면… 난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쪽 세계에서는 여기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요.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시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하하, 아니오. 그 정도까진 아닌데, 내가 살짝 민감하게 반응을 했구려.”
매튜가 되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재앙 속에서 5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다 보니, 걱정이 늘었소. 가벼운 농담도, 씨가 될 것만 같은 조바심이 늘었다고 해야 할까.”
그가 우유를 한 모금 홀짝였다.
우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온도로 식은 우유를 마셨다.
“일주일 전에, 5인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 아까 했었지요?”
“네, 매튜.”
“그걸 보고, 괜한 희망이 생기더이다. 내 아내와 딸 말이오.”
“…….”
“2년 전, 아까 말한 친구들이 사람들을 이끌고 쇼핑몰을 빠져나온 적이 있었소. 내가 그들을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여인의 품에 안겨있던 여자아이가 있었소. 날 빤히 쳐다보더이다.”
무슨 얘기인지, 단번에 알겠다.
마지막 시퀀스 때, ‘내’가 연기했었던 장면이었으니까.
지금 매튜가 뭘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아내와 딸이 생각나더군. 죽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운 지 오래였거니와, 이 사람들은 죽게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왔소. 험난한 여정이었지.”
1편 엔딩에서 주연급 캐릭터들을 포함해 30명 정도로 출발한 그룹.
캘리포니아로 가는 과정에서, 1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다 살았으면 좋았겠으나, 어쨌든 살리겠다고 다짐했었던 여자와 아이는 살았소. 그들이 안전하게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비로소 아내와 딸을 보내줄 수 있었고.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점점 한 명씩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니겠소?”
매튜가 우유를 단번에 들이켰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우진이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희망이 생기니까 좋은데, 한편으로는 참 고통스럽구려. 요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러고 싶은 건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모르겠구려. 만약 배우님이 나라면, 어떨 것 같소?”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있던 매튜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 우진은,
“제가 당신이라면….”
이내 입을 뗐다.
310화
어둠이 짙은 새벽.
불이 꺼져 있는 제작사 ‘원더브라더스 필름’ 건물.
하나, 사무실 안쪽에 있는 작업실만은 예외였다.
건물 전체에 깔린 어둠에 비하면 굉장히 미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곳에서,
“…….”
에릭 크리스토퍼 혼 감독은 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두 손을 노트북 자판에 올려놓은 채로, 워드 프로그램에 빼곡하게 입력된 글씨들을 응시하면서.
이윽고,
– 타닥, 타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와,
“휴….”
한참을 고민하는 중에 자연스레 내뱉는 침음이 섞였다.
– 촤르르.
책상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연신 확인하는 소리까지 겹치는 것은 덤이었다.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 콘티와 스토리보드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등등.
같은 행동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두 시간이 더 흘렀다.
“오케이!”
에릭 감독은 비로소 노트북 자판에서 손을 떼었다.
어느새 첫 장으로 돌아간 노트북 화면 속 시나리오.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가며 오탈자가 없는지, 놓친 디테일이 없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그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에릭 감독은 곧장 화장실로 향해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에 표시된 시간은 벌써 새벽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