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44
“맞습니다.”
“스케줄 보고 나중에 회식 일정 다시 잡자. 친목보다 저 두 사람의 감정선이 우선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해?”
“전체 문자 지금 바로 돌리겠습니다, 감독님.”
조감독은 이내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며 변경된 일정을 전했다.
몇몇 불만을 표시한 배우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별말 없이 수긍했다.
아마 그들은 류 감독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세팅 이동하겠습니다. 강녕전(康寧殿, 왕의 처소) 앞뜰 세팅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날카로운 초겨울 바람이 강녕전 앞에 불어닥치고 있다.
바람 소리마저 서늘하게 들린다.
세팅이 끝나자마자 우진이 다시 무대 위로 등장했다.
엄 귀인과 정 귀인 역을 맡은 두 명의 단역배우도 이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제가 여기서 엄 귀인 목을 이렇게 잡을게요.”
“네. 세게 하셔도 돼요.”
“그리고 여기서는 머리 잡으면서 내가 먼저 돌게요. 그럼 정 귀인이 컷 하나 더 따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요? 저는 감사하죠!”
동선을 맞추는 동안, 우진은 최대한 두 단역배우를 배려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한 컷이라도 더 얼굴이 나올 수 있도록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리허설과 세팅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 쿵쿵쿵쿵!
강녕전 앞.
연산의 양손에 하나씩 잡혀있는 머리채.
“전하!”
“살려주십시오!”
애처로운 모습으로 딸려온다.
선왕의 승은을 입은 후궁들.
그러나,
“아바마마의 총애가 그리 탐이 났더냐?”
현왕에게는 그저 한(恨)의 집약체일 뿐이다.
– 덥썩.
엄 귀인의 목을 잡은 팔에서 핏줄이 돋을 만큼 분노가 극에 달했으며,
“전, 전하… 끄억….”
정 귀인의 머리채를 잡은 손가락에선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을 만큼 연산은 망설임이 없었다.
두 여인을 잡고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드는 연산의 모양새는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망가뜨리는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두 여인은 이미 연산에게 사람이 아니니.
그들의 결말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내팽개쳐져 바닥에 쓰러진 두 여인.
– 스르릉.
철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귀를 찌른다.
엎드려 벌벌 떠는 것 외에는 두 여인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왕의 두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요, 왕의 두 귀는 이미 두 여인의 호소를 걸러낸 지 오래.
– 둥! 둥! 둥!
카메라 밖에서 음향팀이 분위기에 맞춰 장구와 북소리를 내었다.
‘때려죽여라.’
그 소리가 점점 거세지면서, 연산을 부추긴다.
“네년들은….”
연산이 머리 위로 철퇴를 들어 올렸다.
“죽어서도 이 땅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리라.”
철퇴는 섬뜩한 그의 미소를 지나쳤고,
“죽어라!”
– 퍽.
이내 강녕전 앞뜰을 새빨간 피로 적셨다.
40화
“컷!”
“수고하셨습니다!”
첫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그리고.
촬영장에 퍼진 박수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저기, 배우님.”
“네?”
“혹시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우진과 성철.
두 명의 주연 배우에게는 사진 요청이 쏟아졌다.
단역·보조 출연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스태프들마저 현장 정리보다 그들과의 촬영이 우선인 것처럼 보였다.
금일 마지막 촬영 장소인 강녕전 앞뜰에 어느새 형성된 긴 줄.
“허허허.”
그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류 감독에게,
“감독님.”
내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촬영을 지켜보았던 신인 여배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네, 다희 씨. 아직 안 갔어요? 회식 취소됐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요. 편하게 말해봐요.”
“큐시트에는 제 촬영분까지 3주 정도가 남는데요.”
그녀의 말에 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처음엔 연산과 임사홍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촬영분이 없어도 현장에 계속 나오고 싶습니다.”
신인 여배우의 말에, 류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희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신인이라 별다른 스케줄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보면서 배우고 싶습니다.”
신인이라서 가질 수 있는 솔직함과 패기인가.
류 감독은 그녀의 열정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직접 쓴 각본, 그리고 마지막 영화라는 의미가 담긴 작품에서 배우들이 이렇게 욕심을 내주니.
감독으로서 얼마나 뿌듯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여기까지만 해도 신인 배우가 기특하고 예뻐 죽겠는데.
“감독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얼굴이 안 나오는 장면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하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류 감독을 놀라게 했다.
“엑스트라요?”
“네. 채홍사로 이어지는 스토리에서 다수의 여자 배우들이 필요하니까요.”
맞는 말.
흥청망청(興靑亡靑)이라는 말까지 탄생시켰을 정도로, 술과 여자에 빠졌던 연산.
채홍사라는 벼슬까지 간신에게 수여해 전국의 미녀를 바치게 했으니, 그 수가 무려 1만.
쾌락에 젖은 연산보다 왕을 조종하려는 간신 임사홍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자극적인 장면을 최대한 지양하고 있는 시놉시스라지만.
다수의 여성 보조 출연자들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려 장녹수라는 중요한 인물로 캐스팅된 배우가 지금 부탁을 하고 있다.
자신의 촬영분 전까지 얼굴이 나오지 않는 선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해달라고.
“하하하.”
류 감독이 웃음을 터트리며 다희에게 손을 건넸다.
다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손을 맞잡았고,
“좋습니다. 배우가 열정적으로 작품에 임하고 싶다는데, 싫어할 감독이 어딨겠어요?”
“정말요?!”
다희가 환하게 웃었다.
“숙소는 조감독한테 얘기해서 바로 배정해줄게요.”
“네!”
“엑스트라도 해보고, 딱히 필요한 장면이 없을 때는 연출부 일도 가끔 도와주면서 맘껏 배워봐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희는 연달아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이내 우진과 성철 쪽으로 달려갔다.
“선배니이이이임!”
그녀의 신난 외침이 현장에 메아리쳤다.
‘왠지, 신인들이 대형 사고를 칠 것 같군.’
마지막 작품인 만큼, 앞으로 영화계를 이끌 신인 배우들에게 기회를 최대한 주고 싶었던 류 감독이었다.
그래서 연산과 녹수를 최대한 연기력이 갖춰진 신인으로 캐스팅했던 것이고.
어찌 보면, 모험일 수도 있었던 선택이었지만.
지금 보니, 참 잘한 일인 것 같았다.
연기력만큼이나 중요한, 배우의 열정과 책임감을 저들은 이미 갖추고 있었으니까.
“저렇게 좋을까요.”
조감독이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럴 줄은 몰랐네.”
“네?”
“나도 눈 깜짝할 새 나이를 칠십이나 먹고, 어딜 가나 대선배 소리를 들으면서 대접받는 위치에 올랐는데….”
류 감독의 시선은 서로 손을 맞잡고 방방 뛰면서 신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신인 배우에게 꽂혀 있었다.
“저렇게 젊은 친구들에게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느낌. 처음이야. 그것도 크랭크인에서부터.”
조감독의 시선도 류 감독을 따라 움직였다.
“머지않아 대배우가 될 것 같지?”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
주말 예능 시청률 1위를 몇 년째 고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청자가 궁금해하는 주제에 대해 해당 분야에 종사자들을 찾아가 투표를 진행한다.
그리고 결과를 알려줌으로써 궁금증을 풀어주는 포맷(format)의 예능 프로그램.
한 번은 이런 주제가 있었다.
‘배우들이 가장 촬영하기 힘든 장르가 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제작진이 유명한 배우들을 찾아가 투표를 진행했었는데, 꽤 재밌는 결과가 나왔었다.
남자, 여자 배우들 모두.
사극을 1순위로 꼽았으니까.
그 이유는 다양했다.
준비과정(발성, 액션 등등),
분장의 불편함,
한겨울, 한여름 야외 촬영 시 날씨,
기타 등등.
현대물보다 배우와 제작진 모두 준비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여배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위에 나열한 요소들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으니.
바로, 사극은 기본적으로 남자 배우 위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여배우들은 배역이 제한적이란 뜻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여배우는 늘 남자 배우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바로 사극이다.
게다가, 현장에는 늘 남녀 할 것 없이 젊은 배우들보다는 연륜과 경력이 깊은 중년 배우들이 더 많으므로.
‘여배우’에 ‘신인’.
둘 다 해당이 된다면, 사극만큼 어려운 현장이 또 없다.
그런데….
“밥차가 왔습니다, 여러분!”
다희의 친화력은 어마무시했다.
어떻게 저 모습이 신인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
경력과 경험이 차고 넘치는 배우들보다도 더한 활발함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말 그대로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 넘버원.
“너도 그렇지만, 쟤도 진짜 보통이 아니다.”
밥차 주위에 마련된 간이 식당.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다희의 모습을 보며 성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진도 웃으며 밥을 먹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역시 현장 밥차인 듯.
“다들 ‘신블리’라고 하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신다희 러블리. 그래서 ‘신블리’래요.”
“요즘은 참 별걸 다 줄이네.”
신블리.
그 짧은 사이에 생긴 그녀의 별명이 벌써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놈 이거 벌써 선배 다 됐네.”
“네?”
“저거 딱 네 전 모습이야.”
“제가 저랬다고요?”
“그래, 임마. 너 최규보 빙의해서 뛰어다닌 거 기억 안 나? 놀랄 것도 없어.”
성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실 선배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