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사이커 수집
인류연합에서 규정하는 사이커는 그리스 문자를 기준으로 등급화되어 있다.
알파부터 오메가까지인데, 초반 몇 단계는 확실히 그렇게 나누지만 오메가는 규격 외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상징이다.
오메가급 사이커라고 해서 알파급 사이커보다 수백 배나 강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단, 이는 육체적인 능력에서 봤을 때이고 정신적인 능력까지 들어가면 그 이상 강할지도 모른다.
유일한 오메가급 사이커인 유지하는 플레이그의 정신공격에 아예 면역이기 때문이다.
전장 1km에 육박하는 레비아탄급 플레이그와 맞먹는 사이코키네시스 필드를 발하는 인간이니 오죽할까.
일정 이상… 그러니까 람다급 사이커쯤 되면 유지하의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흔히 사이커들이 플레이그의 함대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듯 말이다.
그에 반해 일정 수준 이하의 사이커나 일반인들은 그를 보통 사람처럼 대하게 된다.
현 시대, 모든 지구인이 그렇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연합이 사이커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 기원이 되는 에테르란 게 뭔지도 모르는 판에.
유물해석기관에서도 에테르와 사이커에 대한 정의는 다양했고 제대로 논의하면 며칠 밤낮을 지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나 최초의 소장이 기준을 세움으로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에테르 감응력을 가진 자로서 리빙메탈에 트랜스폼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
물론, 이런 기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사이커의 분류는 꽤 다양하며 능력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총알을 막아내는 육체 강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예지에 가까운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소장은 어디까지나 인류연합에 필요한 사이커로서의 기준을 세운 것이다.
―플레이그와 전쟁을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의 능력은 쓸모가 없습니다. 에테르 융합로에서 보내는 에테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 그게 제일 중요하죠.
맞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총에 심미적인 관점이 필요하지 않듯, 사이커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연합에 필요한 것은 어설트 아머를 기동시켜 적 플레이그 함대의 포화를 뚫고 반응탄을 배달하는 사이커였다.
거기에 대응하는 능력이 에테르 감응력인데 리빙메탈을 트랜스폼 시킬 수 있는 능력과 완전히 비례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사이커 하면 에테르 감응력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기준이 되었다.
보통 사이커의 능력은 천차만별이지만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다.
육체적 능력은 그렇게까지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
알파 레벨 사이커가 총알을 막아 내는 정도라고 해서 몇 단계 위의 사이커가 레일건을 막아 내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유물해석기관에서는 이를 인류라는 종의 한계로 분석했다.
―플레이그는 말하자면 매머드 같은 거죠. 원시 인간은 비록 매머드에게 혼자서 대항하긴 어려웠겠지만 무리를 짓고 무기를 써서 살아남았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요.
그 무기가 사이커와 반응탄이다.
거대한 우주선 등은 사실 둘을 지원하기 위한 체계에 지나지 않았다.
하여튼 그런 면에서 유지하의 육체적 능력이 비상식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오메가급이란 건 어디까지나 에테르 감응력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따져도 현재 나타난 알파, 베타급에 비하면 초인이나 다름없었다.
원본 육체는 아니지만 개조수술을 받았기에 사이커도 못 되는 얼치기가 부대 단위로 몰려와도 그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융합로에서 에테르를 직접적으로 받는 어설트 아머가 있다면 더 그렇다.
바로 그 사이커가 어설트 아머를 타고 지구의 대기권을 비행하고 있었다.
에테르 추진기의 출력을 최대한 낮추었음에도 서울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인류연합에서 가장 빠른 것은 융합로를 탑재한 우주선이지만 유지하가 탑승한 어설트 아머도 상당히 빠른 편이다.
「광학위장망 전개.」
윙팩을 펼친 벌새 형태의 기동병기가 구름 사이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에테르 역장이 전개되며 한 사람을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이런 중력 크레인 기능이 탑재된 것은 인류연합에서도 몇 존재하지 않는데, 전함 클래스 우주선과 어설트 아머 정도였다.
보통 어설트 아머의 출력은 상당히 낮지만 유지하가 탑승한 기체는 거의 전함 클래스에 버금간다.
어설트 아머가 버티지 못하기에 일부러 출력을 낮출 뿐.
그 최강의 사이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공에서 내려와 지상에 착지했다.
시간은 밤.
여기저기에서 소란스런 소리와 총소리가 섞여서 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사이커와 그들을 쫓는 특수부대의 작품일 것이다.
“아르마, 특수부대 유인해.”
유지하는 어디까지나 불청객이라서 정체를 드러내선 안 된다.
푸틴 대통령이 그걸 걸고 넘어지진 않겠지만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다.
「안드로이드를 보내겠습니다. 지상 강하까지 15분 전.」
“둘의 위치는 어디지?”
「찾았습니다. 마스터의 시야에 표시하겠습니다.」
바이오칩이 망막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도와 붉은색 점 두 개를 표시했다.
저기군.
유지하는 어설트 아머와 함께 움직였다.
* * *
마치 체스판 무늬처럼 반듯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골목을 남녀가 달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호위하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여자는 연신 헉헉거렸다.
둘은 골목을 정신없이 누비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을 추적하는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은 무전기 소리도, 호루라기도 플래시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고 사방은 매우 조용했다.
그리고 둘은 한 남자가 어두운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목구비가 보이진 않았지만 키가 매우 크고 균형 잡힌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 미하일이 여자 앞을 가로막았다.
“나타샤, 뒤로 가 있어. 아무래도 위험한 놈 같으니까.”
“…우리와 동류일까?”
“모르지. 그런데 저놈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굴 것 같지는 않아. 저런 반듯한 수트를 입은 놈은 숨기는 게 많다고.”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탈리야가 잠깐 눈길을 줄 정도로 잘생기긴 했지만 명백히 슬라브계는 아니었다.
동양인…….
미하일이 그를 경계하는 가운데 나탈리야가 비로소 정체를 알아봤다.
“유지하야. 한국의 그… 독재자.”
“잘못 본 거 아냐? 블라디미르 엉덩이나 핥는 놈이 왜 여기에 있어?”
“하지만 얼굴이 비슷해… 아니, 같아.”
대부분의 러시아인에게 유지하의 얼굴과 이름은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그의 얼굴이 티브이 채널을 가득 채우는데 모를 리가 있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가 가져다주는 온갖 신기술에 열광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어차피 독재자에 불과하다며 비판했다.
둘이 쑥덕거리는 사이 유지하가 몇 발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내 이름은 이미 아는 것 같으니 두 분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미하일이 고개를 돌려 이를 드러냈다.
“…블라디미르의 개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윈 없어.”
“독재자를 싫어하시나 보군.”
“장담하는데 러시아에서 놈을 좋아하는 사람은 30%를 넘지 않을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를 어쩌죠? 지금부터 내가 당신들을 데려가려는 참인데.”
“누구 마음대로?”
미하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직 어리군.
보아하니 둘 다 20대 초반 정도인 것 같은데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다.
유지하였다면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망쳤을 것이다.
상황을 마음대로 조성할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
‘어쩌면 힘에 취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들을 추적하던 특수부대도 쉽게 물리쳤으니 자신이 있을 법도 하다.
아르마가 둘을 분석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남자는 미하일, 전형적인 블래스터로 에테르 회로 통제에 미흡해 잘 지치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자의 이름은 나탈리야. 블래스터이긴 하나 텔레키네시스트에 가깝습니다. 최대 10개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고 정신을 집중하면 차도 들어 올립니다.」
미하일보다는 나탈리야의 유전자가 훨씬 유용하다.
블래스터는 플레이그와의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텔레키네시스트는 리플렉터 비트를 조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남매라고 했으니 둘 다 확보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지.’
협조를 얻어야 하는 만큼 가급적 말로 하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 줄 때였다.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상대의 힘도 알아보지 않고 달려오는 녀석에겐 주먹이 약이다.
“블럇!”
미하일의 전신에서 황금빛이 뿜어졌다.
일반 사람들에게야 위압적으로 보이겠지만 유지하에겐 에테르 통제를 제대로 못하는 증거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컵에 물을 따르는데 칠칠맞지 못하게 주변에 흘리는 중이었다.
‘앞으로 많이 배워야겠군.’
메가시티라면 사이커가 많으니까 같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유지하는 그가 돌진하면서 뻗는 주먹을 턱 잡았다.
미하일의 눈동자가 커지려는 찰나, 막대한 양의 에테르가 그의 회로를 타고 역류했다.
“컥!”
에테르가 역류하는 그 느낌은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전기 충격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미하일의 전신을 엄습했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총알을 맨몸으로 막고 다수의 특수부대원을 때려눕힌 사이커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오빠가 멱살을 잡힌 채 제압당하자 동생 나탈리야는 정신을 집중했다.
“좋은 말 할 때 놔줘요, 안 그러면…….”
“그런 말은 일단 공격하고 하는 겁니다.”
“놓으라고 했어요!”
그녀가 이를 악물자 근처의 차량 한 대가 황금빛에 감싸이더니 두둥실 떠올랐다.
분노한 상황에서도 집중은 잘하는군.
유지하는 자유로운 팔을 뻗어 손을 까딱했다.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에테르가 그녀를 둘러싸더니 쭉 끌어당겼다.
“헉!”
나탈리야는 허공을 붕 날아 유지하에게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어, 어떻게 사람한테…….”
보통의 텔레키네시스트에겐 어렵겠지.
하지만 유지하는 인류연합에서도 유일한 오메가급 올라운더 사이커였다.
어지간한 사이커가 하는 일은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똑같이 에테르를 역류시키자 나탈리야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하고 말았다.
「중력 크레인 전개.」
둘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르마, 근처에 포드 있나?”
「3분 후에 도착합니다. 어디로 보낼까요?」
“메가시티 퍼시픽으로 보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할 일은 다 했으니 이만 철수하지.”
러시아에 능력자는 꽤 많으나 대부분은 기준 미달이었다.
앞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아마 유지하가 아니라 이들이 오게 될 것이다.
* * *
미하일과 나탈리야가 깨어난 것은 기절한 후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몸이 튼튼한 오빠 쪽이 먼저 깨어나 동생을 깨웠다.
“나타샤, 나타샤. 일어나.”
그녀는 일어나더니 곧장 오빠와 자신의 몸을 살폈다.
“진정해. 몸은 따뜻하고 별다른 외상도 없어… 우린 괜찮아, 아직은…….”
“젠장, 여긴 대체 어디야?”
둘은 바깥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다가 발자국 소리가 나자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윽고 유지하가 안드로이드 1기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탈리야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당신이었어. 대체 왜 우릴 납치한 거죠?”
그는 막 덤벼들 자세를 취하던 미하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 덤비려 하면 기절시킬 겁니다. 일단은 평화적으로 이야기나 해 보죠.”
“우리를 기절시킨 게 평화적인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어?”
“난 효율적인 것을 선호합니다. 당시엔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죠.”
“젠장, 티브이에 나온 그대로군. 효율을 따지는 독재자라… 최악이야.”
미하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나탈리야까지 앉자 유지하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하나만 확실히 해두죠. 나는 비록 당신들을 공격하긴 했습니다만, 해칠 의도까진 없었습니다. 정당방위였죠.”
“그게…….”
뭐라 말하려던 미하일은 자신이 먼저 덤빈 것을 생각하곤 입을 다물었다.
나탈리야가 물었다.
“우리를 어떻게 발견했죠? 보안국 요원들도 찾아내지 못했는데.”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 말해 줄 수는 없군요. 어쨌거나 나는 두 분에게 제안 하나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여기가 어디인지 말씀드리죠. 메가시티 퍼시픽입니다.”
“메가시티! 북태평양에 있다는 그…….”
나탈리야가 아는 체를 하자 단발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어째 소냐 대위와 비슷하게 생겼군.
유지하는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많이 들었을 겁니다. 러시아에서도 메가시티 영주권을 얻은 사람이 꽤 많으니까요.”
“엘리트만 가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영어를 필요로 하긴 하지만 꼭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만 봐도 그렇죠.”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우리를 여기에 감금할 생각인가요?”
“일단은 초청이라고 해두죠. 어쨌거나 나는 여러분에게 메가시티 영주권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당과 여러 혜택도 얻을 겁니다. 메가시티의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거죠.”
메가시티의 영주권은 변변찮은 생활을 하는 루스키예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넉넉하게 사는 도시민이라면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지역에 사는 러시아인의 삶은 제 3세계의 빈민과 비교해서도 그다지 나을 것이 없었다.
한 달에 5만 루블(8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는 구소련 시기에 지어진 허름한 아파트의 월세를 내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만큼 물가도 저렴하지만 요즘 세상에 사고 싶은 게 워낙 많아야지.
최근에야 경제 상황이 비교적 나아졌지만 대부분의 부는 푸틴의 최측근인 실로비키, 올리가르히에게 대부분 몰리고 있었다.
즉,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메가시티를 낙원 비슷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 남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초대하는 이유는 뭘까?
미하엘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이 어디 찢어지진 않았나 살피다가 말했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흡혈귀와 돕고 사는 사이 아니었어?”
푸틴의 비판자들은 그의 이름이 블라디미르라는 데에서 착안하여 흡혈귀로 부르곤 한다.
죽을 때까지 러시아의 피를 빨아먹을 거라는 데에서 나오는 냉소적인 농담이다.
블라디미르라는 이름 자체엔 그런 의미가 없지만 요즘은 외부의 이미지를 많이 받아들이니까.
유지하는 다리를 꼰 채로 웃었다.
그 모습이 참 멋지다고 나탈리야는 속으로 생각했다.
“같은 살인자이자 독재자이긴 하죠. 하지만 진지하게 히틀러 소리를 듣는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군요.”
“그 독재자가 우리에게 메가시티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왜일까? 왜 우리를 필요로 할까? 그 능력 때문이라면 당신이 훨씬 더 강하잖아.”
“나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제안했고, 여러분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미안합니다만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젠장, 난 여기가 아니라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아디다스 브랜드를 좋아하시는군요?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게 해드리죠.”
순간 미하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최근에 들어선 찾아보기 힘든 정통 러시아 촌구석 양아치였다.
아디다스 브랜드를 선망하지만 일주일에 이틀 일하고 받는 돈으로는 중국에서 생산된 가짜나 겨우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진짜 아디다스의 삼선은 명품과 다를 게 없었다.
자연스레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진짜로? 원하는 건 뭐든지?”
“물론 상점을 통째로 턴다든가 하는 건 안 되겠지만요. 상식적인 범위 안에선 구입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젠장, 갑자기 당신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하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고 여기 살면서 협조만 해 주면 됩니다.”
“…….”
한편 나탈리야는 아디다스에 홀려 헤헤거리는 오빠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녀는 비록 촌구석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독재자에 대한 비판만은 잊지 않았다.
러시아는 보다 자유로워야 하고, 또한 활기차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푸틴이나 유지하 같은 독재자는 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잔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유지하와 같이 밖에 나가면서 봄철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메가시티의 거리를 많은 사람이 웃고 떠들며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풍경이라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두들겨 맞는 사람도 없었고 빵빵거리는 차도 없었다.
날씨 덕분인지 사람들은 대단히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으며 남자들끼리 팔짱을 끼는 커플도 꽤 있었다.
러시아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리를 돌아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미하일과 나탈리야는 많은 것을 느꼈다.
여긴 최소한 러시아보다는 자유로운 곳이라는 것을.
거리를 돌아다니는 안드로이드와 드론들도 다소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탈리야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체류를 결정했다.
“어차피 러시아에 가 봐야 별거 없는 신세겠죠. 어디 교정시설이나 촌구석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여기서 사는 게 훨씬 나아요.”
미하일은 의류상점에서 아디다스제 운동화와 셔츠를 사곤 좋아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럭저럭 잘된 것 같다.
유지하는 아르마에게 둘의 관리를 넘겼다.
“파티마나 서준이하고 비슷한 대우를 해주면 돼.”
저들이 당대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향상된 유전자를 가지고 몇 년 후에 태어날 아이들이다.
그들은 플레이그가 쳐들어올 때쯤엔 람다급 사이커로서 인류연합의 충실한 무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사이커 수집을 계속하는 유지하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배성민 비서실장이 급히 집무실을 노크하더니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대통령님,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유조선 한 척이 피랍되었습니다.”
유지하는 덤덤하게 물었다.
“범인은 이란입니까?”
“예. 원인은 아무래도…….”
그간 죽음의 상인이 되어 중동에 판 드론의 후폭풍이 이제야 불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