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재입대
유지하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수면 시간이 극히 적은 데다 매우 깊은 잠을 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꿈을 꿀 때가 있었다.
정말 손에 잡힐 정도로 생생하고 놀랍게도 스토리가 이어졌다.
주된 내용은 외딴 행성에 떨어져서 고생을 하는 거지만 원주민들이 매우 특이했다.
보통 판타지 하면 생각나는 여러 종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대륙인데 놀랍게도 엘프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것도 파시스트 엘프였다.
‘내가 독재자라서 그런 꿈을 꾸는 건가.’
그는 하늘을 날면서 세계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꿈도 업데이트가 되는 것인지 메타버스에서 숱한 게이머를 좌절시킨 숲 이외의 세계도 충실히 구현되어 있었다.
문명은 꽤나 발전한 상태이고 놀랍게도 기계인형, 그러니까 로봇 비슷한 녀석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과학이 아닌 마법을 이용하는 것 같긴 한데 유지하로선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차라리 전차를 만드는 게 낫지 왜 다리를 달았을까?’
하긴 악의 제국을 연상케 하는 통일된 제복을 입고 인간들을 탄압하는 엘프가 있는 마당에 다리 달린 로봇이 있다 해서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꿈이었으므로 유지하는 마음껏 구경하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엘프 제국에 반항하는 국가도 여럿 있군.’
그것은 인간의 왕국이었다.
규모가 작은지 전투에서 여러 번 패배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듯했다.
그들의 외모는 키가 작은 것을 제외하면 유지하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드워프도 있고… 여기도 지구 못지않게 다채롭군.’
어떤 면에선 지구보다 더 갈등이 심하다고 볼 수 있겠다.
지구는 일단 같은 인간인데 저긴 아예 종족이 다르니까.
갈등의 주요 원인은 엘프들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수인 모양인데 정말 거대해서 아무리 하늘로 올라가도 전체가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성층권까지 솟은 나무는 또 처음 보는데.’
조금 더 구경하며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꿈속에까지 들어왔다.
“마스터, 깨어날 시간이에요.”
이건 아르마의 목소리다.
그는 자신이 원래의 몸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영혼교환기가 문제없이 작동한 모양이군.’
처음 한국인 유지하의 몸에 들어갔을 때에는 기억이 너무 달라서 혼란을 겪었지만 이젠 그럴 일은 없었다.
현재 인류연합은 유지하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만든 것은 아르마와 워커 군단이지만 통합우주군은 그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급적 원본과 통일하도록 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했다.
이 뻣뻣한 이불과 딱딱한 침대도, 그리고 볼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무엇도…….
“…….”
유지하는 루시아의 얼굴을 밀어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갈색 피부의 안경을 쓴 안드로이드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나셨네요? 식사 먼저 하실 건가요? 아니면 저부터?”
가슴께를 슬쩍 노출시키는 걸로 봐서 아르마는 아니고 루시아인 모양이다.
그녀라면 이렇게 방정맞게 행동하지는 아닐 테니까.
사실 세틀러호에 본체가 있는 이상 껍데기가 무엇이든 본질은 같았다.
아르마가 곧 루시아이고 유지하를 마스터로 하는 강인공지능이다.
단지 인격 모듈만 다를 뿐이다.
유지하는 일어서서 화장실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봤다.
밤색 머리카락에 밤색 눈을 가진 거구의 남자가 다소 어색한 얼굴로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유진으로 살아야겠군.”
루시아의 팔이 슬그머니 그의 배를 감싸왔다.
“저도 이제부턴 루시아라고 불러주세요.”
“알았으니까 팔 떼.”
“네에~”
현재 유진의 신분은 통합우주군 화성주역사령부 소속 2기동함대의 사관후보생이다.
소위로 임관하지 않은 것은 그가 파일럿 스쿨을 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미에게 그런 정교한 작업을 시키는 건 어려웠다.
요즘에는 시뮬레이션으로 라이센스를 딴 자에 한하여 특별임관이 진행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유진이 첫 케이스였다.
“그러니까 마스터는 낙하산이란 뜻이죠. 선배들이 참 좋아하겠어요.”
“…파일럿 스쿨 훈련 기간이 몇 년이었지?”
“5년이요. 20대 초중반을 고된 훈련으로 날려 버리고 겨우 후보생이 됐는데 마스터는 22살에 들어오니까 기분이 상큼하겠죠?”
어느 직장, 어느 시대이건 낙하산은 환영받지 못한다.
유진의 경우 대통령이 아니라 배성민 의원이 추천장을 써주어서 후보생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기동함대 내에선 이걸 가지고 좀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낙하산이 대통령 아들이라서 대놓고 반대는 못하겠고 훈련으로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계산이겠지.”
“그런데 그는 사실 실력을 숨긴 전직 대령 출신 우버 파일럿이었고! 그의 실력에 놀란 상관과 동료들은 서서히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유진은 루시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끄럽고 밖에 나가 있어.”
정식 파일럿도 아닌 후보생이 아침부터 안드로이드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안드로이드 자체야 대중적이지만 통합우주군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곧 어설트 아머가 롤아웃 되기 때문이다.
이 기체는 10여 년 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워낙 조종 난이도가 높아 그동안 아무도 제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파일럿 스쿨을 비롯한 전문적인 훈련과정이 생기고 본격적으로 파일럿을 양성함으로서 비로소 어설트 아머를 조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들 전설의 기체를 직접 몰아볼 수 있다며 상당히 긴장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시뮬레이션하고는 완전히 다르겠지? 에테르 수신기도 민감할 테고 말이야.
―초속 250km로 지구를 반 바퀴나 돌며 플레이그 스웜과 싸웠다는 게 말이 돼? 가속만 해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그 프로토타입이 특별하지 않을까 했는데 엔지니어들 말을 들어 보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진다더라. 우리가 받는 건 개량된 거고.
―개량된 걸 조종하는 거니까 운동성에서는 우리가 조금 낫겠지?
―미친놈 아니야? 당시 비행 기록 보면 어설트 아머가 0.01초 단위로 움직였다고. 너 이거 가능해?
―아씨 취소.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스쿨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함대에 배치된 후에도 여러 시험에서 훌륭한 성과를 냈다.
바로 대통령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들이었다.
실제 자식이라는 뜻은 아니고 단지 그의 에테르 감응력과 어설트 아머를 조종하는데 필수적인 시드를 이식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후보생이 다양한 시드를 이식받지만 대통령의 시드를 이식받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높다는 뜻이다.
사실은 이식에 적합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어설트 아머가 함대에 배치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시에 새로 함대에 전입해 온 유진이란 후보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호기심이 아닌 질투심과 열등감에 가까웠다.
그는 대통령의 친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 * *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같이 훈련하게 된 후보생을 소개한다. 다들 알겠지만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이력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 함대에서 특별대우는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알겠나, 유진 후보생.”
시작부터 군기를 잡으려는지 2기동함대 훈련교관의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알겠습니다, 교관님.”
평범한 반응에 다들 실망한 눈초리였다.
그 명성 높은 대통령의 아들이라면 뭔가 좀 특별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피지컬 트레이닝에 들어가라고 지시했고 파일럿들이 유진을 흘깃거렸다.
“키는 되게 크네.”
“아버지를 닮아서겠지.”
“실력도 아버지만큼 되는지 궁금한데.”
“홈스쿨링을 받았다는데 실력을 믿을 수 있을까? 어설트 아머를 움직일 수 있으면 다행이겠네.”
“근데 좀 잘생기지 않았어? 아빠와는 안 닮은 것 같지만.”
“뭐… 체격은 마음에 들긴 해. 근육도.”
이어진 피지컬 트레이닝은 평소보다 강도가 높아 다들 헉헉거렸지만 유진은 숨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교관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도를 더 올렸고 덕분에 평이하게 지나갔어야 할 아침 훈련은 지옥이 되었다.
식사시간이 되었음에도 다들 바닥에 쓰러져 헉헉거렸다.
“저, 저 후보생 데려와.”
“데려와서 뭐 어쩌게? 너보다 강해 보이는데.”
“…하여튼 체력 하나는 대단하네.”
“대통령 아들이잖아. 영재 교육이라도 받았겠지.”
“내가 알기론 아버지하고 별로 사이가 안 좋다던데. 얼굴 본 지도 꽤 오래됐다고 하고.”
“하긴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
소냐 빅토르브나 아베리나는 교관과 이야기하고 있는 유진의 등을 바라봤다.
체격이 좋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저렇게까지 근육질일 줄은 몰랐다.
얼굴도 굉장히 성숙해서 도저히 20대 초반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그에게선 후보생 특유의 어리숙한 모습이 없었다.
혹시 이 배에 와 본 적이 있나?
‘그럴 리 없지.’
이 서울급 전투순양함 로스엔젤레스는 건조된 지 7년 가까이 되었지만 대부분 무인으로 운용되었다.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어설트 아머를 배치해 예비 파일럿들을 훈련시키기로 결정되었는데 민간인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녀는 청각을 집중해 교관과 유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었지만 별건 없었다.
앞으로의 훈련일정과 함대에서 지낼 때의 유의사항을 나열하는 정도였다.
이윽고 식사시간이 되었고 소냐는 배식을 받아 그의 앞에 앉았다.
“별로 안 닮았네.”
“저를 아십니까, 아베리나 소위님.”
물론 유진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안다.
170cm는 족히 넘을 듯한 키에 금발의 머리카락, 차가운 인상을 가진 러시아 출신 예비 파일럿이다.
그녀는 보육원 출신으로 어린 시절 메가시티 러시아에 입주했고 파일럿 적합 판정을 받아 스쿨에서 훈련을 받았다.
임관식 때의 선망 넘치는 시선과 기쁨에 겨운 목소리는 어디 가고 지금은 악어 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대통령의 아드님이신데.”
“대통령 소리는 빼주시죠. 전 그냥 유진으로 충분합니다.”
소냐는 가볍게 지은 미소도 지워 버리고 포크를 접시에 툭 떨어트렸다.
“왜, 대통령 아들이라는 그 짐이 무거워? 그럼 벗어 던져. 내가 대신 짊어질 테니까.”
“소위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지 밥을 먹고 싶을 뿐입니다. 아침부터 테스트 일정이 잡혀서요.”
“…….”
그녀는 배식 일을 하던 안드로이드로 트집을 잡을까 했으나 얌전히 소시지를 썰었다.
안드로이드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고 굳은 일에 투입되는 등 유용했지만 그녀는 좋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많은 사람이 그에게 인사를 왔다.
비행대대장부터 시작해서 기동함대의 제독까지 온갖 간부들이 몰려와 그와 악수하고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다고 당부했다.
소위도 아닌 후보생에게 하는 인사치곤 놀랄 만큼 파격적이었다.
‘확실히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실력이 아닌 핏줄로 그런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게.
‘그 자리는 내 것이었어야 해.’
소냐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러시아의 보육원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딱딱한 빵 쪼가리와 멀건 스프가 전부였고 손이 부르트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를, 아니 보육원 아이들을 구한 것은 인류연합의 유지하 대통령이었다.
그는 보육원에 선물을 가득 안고 방문해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메가시티에 들어가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단다. 같이 갈 사람?”
손을 들지 않은 아이는 없었다.
메가시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보육원 생활은 끔찍했고 유지하는 다정했다.
어린 소냐는 그의 품에 안겨 따스한 말을 들었다.
“재능이 있구나. 메가시티에서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을 거야.”
그게 무슨 재능인지는 몰랐지만 소냐의 기억에 유지하의 품은 매우 따뜻했다.
기억에도 없는 아빠의 품보다 더…….
그와의 만남은 짧았고 소냐는 메가시티에 입주한 후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고통스런 시술을 참아냈고 스쿨에서의 훈련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마침내 임관식에서 유지하 대통령을 만났지만 그는 예전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지 않았다.
단지 의례대로 악수하고 파일럿으로서의 기량을 인류연합을 위해 써주길 바란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해했다.
악수를 기다리는 후보생은 너무 많았고 행사 시간은 짧았다.
그는 악수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빠, 저예요. 딸이 여기에 있어요.’
야속하게 사라지는 그를 보며 소냐는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자신을 돌아보게끔 훈련에 사력을 다했다.
덕분에 2기동함대에서는 최고의 파일럿이라는 평가가 내려졌고 조만간 중위 승진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 있었던 플레이그 스웜 사태 때 대통령의 비행 기록을 열람해 보곤 충격을 받았다.
‘이게 인간이 낼 수 있는 기록이야?’
유지하는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가 몬 어설트 아머가 특별한 개량형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형이라 에테르 수신기의 반응이나 운동성이 낮았다.
성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에테르 수신기의 딜레이를 파일럿이 컨트롤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격한 비행 중에 그걸 신경 쓰는 것만 해도 수명이 몇 년은 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더 가혹하게 훈련에 임했다.
그녀의 소망은 단 하나였다.
언젠가 통합우주군의 우버 파일럿이 되어 그의 앞에 서는 것.
그리고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내 딸이라는 그 한마디를.
“…….”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는데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우걱우걱 식사를 해치우고 있었다.
그와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을 한 채로.
소냐는 갑자기 짜증이 나 접시를 치우고 일어섰다.
“가십니까? 나중에 뵙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같은 편대니까요.”
후보생 시험에 합격이라도 하면 진짜 한솥밥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유진은 몸을 획 돌려 자리를 벗어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잘 크긴 했는데 성격 좀 죽여야겠군.’
실전을 겪다 보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남은 식사를 대충 입에 털어 넣었다.
오랜만의 먹는 군에서의 식사는 그때와 똑같이 맛이 없었다.
“모든 식재료가 군대에 들어오기만 하면 파업하는 게 틀림없어.”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
* * *
화성주역사령부 소속 2기동함대가 부산해졌다.
갑자기 지구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전투부대인 만큼 어지간한 손님은 신경 쓰지 않지만 그가 최고평의회의 의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예산편성권을 부여받은 기획예산위원회 소속이라면 더 그렇다.
최근 관리국에선 인공지능이 맡고 있던 예산의 편성권한 일부를 최고평의회에 양도했다.
예산은 조직을 지배하는 만큼 기획예산위의 파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인류연합의 분위기 탓에 아직까진 로비나 청탁이 시도되지 않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배성민의 영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그가 탑승한 셔틀이 어설트 아머 패키지와 함께 로스엔젤레스 전투순양함에 착함했다.
기동함대 사령관 휘하 장교들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님, 반갑습니다.”
“이거 너무 반겨주시는군요. 제가 알아서 일 보고 나갔을 텐데…….”
“의원님이 오시는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배성민 의원은 사령관에게 이끌려 마음에도 없는 전투순양함 내부를 구경하게 되었다.
기동함대 장교들과 인사하고 화성주역의 작전 브리핑을 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장장 3시간을 붙잡혀 있다가 겨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바로 유진과의 만남이다.
“오랜만이구나, 유진아.”
“반갑습니다, 삼촌.”
사실 둘은 예전에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배성민은 워낙 바빴고 유진은 테라 섬에서 홀로 지냈던 터라 만날 틈이 없었다.
그러나 유진이 아버지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을 들은 후로는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가끔 연락을 하곤 했다.
일종의 대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배성민이 최고평의회 의원이 되고부터 둘은 가까워졌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가끔 식사를 하며 옛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주로 아버지인 유지하의 상식을 벗어난 행보와 배성민 비서실장의 고생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유진은 옛날 얘기는 지겹다며 진저리를 쳤고 배성민은 요즘 젊은 애들은 힘든 그 시절을 모르고 자란다며 혀를 차곤 했다.
둘의 나이 차이가 엄청남에도 안티에이징 시술로 인해 마치 형제처럼 보였다.
아무튼 오늘 그가 찾아온 것은 그런 낭만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다. 곧 임관 테스트라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일 텐데.”
“아뇨.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삼촌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는 쓰게 웃었다.
“너한테까지 그렇게 보일 정도면 심각한 모양이군. 뭐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요즘에 좀 힘들어서 말이다.”
“누가 최고평의회 기획예산위원회 수석의원이 되실 분을 힘들게 하는 거죠? 누굽니까?”
장난스런 말투에 배성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은 아버지와 달리 그렇게 무뚝뚝하지 않아서 이야기할 맛이 났다.
물론 유지하 대통령도 가끔 농담을 하긴 했지만 최근에는 그와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아마 그의 주변을 둘러싼 모리배 때문이리라.
전쟁 준비나 인류연합의 안정적인 운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어떻게든 권력을 더 받아내려 애쓰는 흡혈귀들.
대통령은 바로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전쟁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플레이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과실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내치고 싶었지만 그에겐 힘이 없었다.
외부에서야 의원님 하고 떠받들지만 1,000명이나 되는 의원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 고민이 울분이 되어 터져 나왔다.
“후우…….”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카를 불러내서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자작극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유지하의 취미는 죽은 척이고 특기는 공갈협박 아닌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이런 일을 꾸미는 거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말해 줬으면 했다.
그는 대통령이 어떤 길을 걷든 끝까지 응원하고 따를 것이니까.
한편 유진은 심한 우울감에 젖어든 배성민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비서실장밖에 없어.’
많은 의원의 뒷조사를 했지만 진심으로 인류연합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플레이그와의 전쟁은 뒷전이고 끝난 후의 정국에 대해서만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남은 땅과 유산, 수많은 외부인들에 대한 처우까지 참 할 일이 많겠지.
미리 그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부산했다.
유진은 김칫국부터 마시는 자들에게 인류연합을 맡기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모든 증오와 쓰레기들을 모아서 한 방에 터트릴 것이다.
‘그 뒤는 미안하지만 비서실장이 좀 맡아 줘야겠습니다.’
의원이 된 지도 한참 지났지만 그에게 배성민은 영원한 비서실장이었다.
그가 선지자의 고향으로 떠나면 배성민이 인류연합을 맡으면 될 것이다.
‘썩 괜찮은 인선이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술 한잔 하며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