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18
217화 힘이 곧 정의다
사그리스 은광은 다시 열린 지 2개월 만에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꽤 많은 인구가 주변에 몰렸다.
광부의 숫자는 200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워낙 많은 보급품과 식량을 요구하다 보니 근처에 마을이 하나 생겨날 정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원광이 산출된 것도 그렇지만 광부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것도 이슈가 되었다.
원래 광산이란 건 광부들이 무수하게 죽어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달이 지났는데 사망자가 없다고? 돈을 얼마나 쓰는 거야?
―거기에 드는 돈을 아껴서 더 많은 광부를 고용해야지! 반다스 남작은 땅을 파먹는 법을 잘 모르는구만.
―휴식시간도 줄여서 투입해야지. 대체 왜 광부들에게 잘해주는지 모르겠어.
왕도에서 구경 온 유력자들은 하나같이 레오볼드가 비효율적으로 광산을 운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들의 눈에는 인건비 등 더 쥐어짜낼 구석이 보이는데 오히려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관들은 은광에서 산출되는 은의 양이 적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안정화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드레드 백작의 은광과 비교해 보면 사그리스 쪽의 효율이 3배나 높습니다. 물론 은 산출량은 갱도의 깊이나 함유율 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그리스 은광이 압도적입니다.”
“처음에는 자금이 많이 투입되는 것으로 비판이 많았지만 은광이 안정화되자 오히려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숙련된 광부들이 작업하기에 단가가 낮아진 겁니다.”
“따라서 비숙련자 다수를 투입하는 것보다는 숙련자를 보존하는 쪽이 훨씬 생산 효율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은광의 상황을 면밀히 살핀 행정관들이 이런 분석을 올렸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실제 광산을 운영하는 귀족들은 자신들의 스탠스를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그리스 은광처럼 바꾸기 위해 투입되어야 하는 재원이 장난이 아닌 데다 바꾸었다가 실패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기 싫어하니 변화도 없었고 그저 광부를 갈아 넣는 식의 현 시스템에 만족할 뿐이었다.
또한 평민에게 많은 돈을 투자한다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귀족도 꽤 많았다.
―천한 것들에게 왜 그렇게 투자를 해야 하지? 대체할 놈은 얼마든지 있는데?
―대충 밥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는 거지 많은 걸 요구하지 마라.
―반다스 남작이 습관을 잘못 들였어.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휴식한다니 일은 언제 하는 건가?
―하루 3끼도 모자라서 중간에 빵과 치즈를 원하는 대로 공급한다니 광부들을 돼지로 만들 생각인가?
아스테라에선 전통적으로 육체를 단련한다는 개념이 강했다.
기사들이 자신의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수련에서 기인한 것인데 그걸 평민에게도 똑같이 적용한 것이다.
칼로리의 개념도 없어서 식량은 적당히 죽지만 않을 정도로만 공급하면 된다는 생각이 주류였다.
가혹한 환경에 노출된 광부들이 그걸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지거나 죽어나가면 평민의 나약함 운운할 뿐이었다.
귀족들은 갱도에 들어갈 일이 없으니 그렇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사그리스 은광에선 충분한 휴식과 치료를 보장하고 원하는 만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물자를 공급했다.
또한 안전에 많은 돈을 들여 사상자 숫자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런 노력은 귀족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지만 정작 현장에서 실질적인 정보를 확인한 행정관들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안전을 확보하니 오히려 생산량이 더 오르는군요.”
“광부들의 사기도 충만하고 이래저래 장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갱도 같은 곳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일 안 하려고 시간을 보내기 마련인데 이쪽에선 일하려고 난리군요.”
“팀별로 산출량이 많으면 대우가 달라지거든요. 등급을 매기는 셈이죠.”
이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준 반다스 남작이었지만 절도 등 범죄는 철저히 단속했다.
은광 특성상 옷에 주머니를 달아 부스러기 몇 개를 건지려 하는 좀도둑이 꽤 있었고 이들은 적발되는 즉시 모든 임금을 몰수당하고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채용되지 못했다.
덕분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왕도의 광부들이 의외의 기회를 얻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반다스 남작령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혹했다.
“이런 좋은 식사가 평상시에도 나온다고요?”
“시간을 맞춰야 하는 단점은 있지만 아무튼 우리 영지에서 배 곯는 사람은 없어요. 팔다리 하나 없어도 행정관님이 일을 맡기고 임금을 준다고.”
“요즘 다들 허리띠 졸라매고 난리죠? 우리 영지에 오면 저축을 할 수도 있다니까.”
“저축이라고요?”
“어지간한 사람이면 한 달에 1, 2실버 정도는 저축을 할 수 있을 걸요?”
“겨우내 청어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지금 뭐 하는지 압니까? 유민들 고용해서 선단을 만들고 있어요. 자기만의 사업을 하는 겁니다.”
저축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투자와 발전이 현장에 온 여러 기술자들을 유혹했다.
바그란에서 평민은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져도 좀처럼 저축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권력을 가진 귀족들이 온갖 부역과 혹독한 세금제도를 동원해 먼지까지 털어가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먹고살기 바쁘니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고 평생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민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농민인 것이다.
하지만 반다스 남작령에선 그런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져 있었다.
물론 운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고 노력이 따라주어야 하지만, 어쨌든 좁으나마 출세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아 은광에 온 왕도의 기술자들이 이 유혹에 걸려들고 말았다.
―반다스 남작은 실력만 본다더라. 거기에 가면 능력대로 돈을 벌어갈 수 있다던데.
―어차피 일거리도 없는데 가볼까? 왕도에서 귀족들에 치이느니 조용한 영지에 가서 한 밑천 버는 것도 나쁘진 않지.
―반다스 남작령이 조용한 영지라는 건 틀린 말이야. 요즘 얼마나 시끄럽고 북적북적한데. 골렘을 동원해서 하수도 공사도 진행한다더라고.
―그걸로 골리앗이나 들이지. 지금 4대밖에 없다며? 주변 영주들이 군침을 흘리겠는데.
―뭐 알아서 하겠지. 아무튼 난 가족들 데리고 일거리 많은 거기로 가봐야겠어.
바그란의 왕도에는 자유민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어느 영지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로, 대부분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일부 영지를 제외하면 거주지를 옮기는 데에 제한이 없었다.
직업도 다양해서 광부부터 목수, 어부, 석공, 세공사, 전직 관료 등 반다스 남작령에 꼭 필요한 인원들이었다.
이들은 분위기나 확인하자는 식으로 은광 근처의 마을에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영지에 정착한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가족과 함께 정착하면 지원금을 준다고? 이건 못 참지.”
“몇 년 바짝 벌고 왕도로 복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었다.
반다스 남작령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한 영지는 물론이고 왕도마저도 구식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유민들이 이런 것들을 알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영지에 정착한 후 다양한 편의시설과 합리적인 정책, 높은 임금을 직접 느끼면 빠져나가기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리하여 사그리스 은광을 통한 인재 영입에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최초 500여 명에 불과했던 반다스 남작령은 어느덧 천 명을 넘는 인구를 자랑했고 재정은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되자 주변 영지를 비롯한 란티스 백작 등이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많던 은이 남작령으로 사라졌다. 아마 어마어마한 은을 보유하고 있을 거다.
―반다스 남작령의 병력이라곤 골리앗 4대와 수십 명의 병사가 전부다. 영지 두 곳이 연합만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근위기사가 문제인데 소문에 의하면 딸을 데리러 왕도에 간다고 한다. 그때를 놓치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다만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기엔 상당한 부담감이 있었다.
루아드 왕자는 물론이고 국왕이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돈이 많다는 것은 명분이 될 수 없었고 이긴다 해도 승인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이올린 공주와 란티스 백작이 가세하면서 영주들이 용기를 얻었다.
“현 왕자와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유대륙과 은광일 뿐, 그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오.”
“그러니 그를 사로잡아 왕가에 부역하게 한다면 충분히 만족하실 것이오. 명분에 대해선 자이움의 유력귀족이 나설 것이니 경들은 조용히 병력을 모으시오.”
이올린의 약혼자인 프로잔 후작은 인구만 100만이 넘는 대영지의 지배자로서 바그란 3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나서준다면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것이다.
물론 프로잔 후작은 욕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바그란의 내부사정에도 관심이 많았다.
분명히 이런저런 요구를 해올 테지만 반다스 남작령의 재정이 상당한 만큼 적당히 찢어 가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귀여운 음모는 시작과 동시에 아르마에게 발각되었다.
마법 때문에 대부분의 관측수단이 무효화되었지만 중력자 그 자체는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아르마는 이올린 공주나 란티스 백작 등 주요 인물들의 동선을 추적하고 있었고 은밀한 회동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입모양을 분석하고 마차에 마이크로봇을 붙이는 방법으로 모의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마스터, 이올린 공주와 란티스 백작이 우리를 공격할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자이움의 프로잔 후작이 지원을 할 것으로 예상되며 란티스 백작 휘하의 영주 세 명이 직접적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나 보군.”
그동안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야 행동에 나설 생각이 든 모양이다.
지금의 반다스 남작령은 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그랜든은 물론이고 카슨 행정관마저 골리앗을 더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병력을 보강하지 않았는데 영지가 고착화된 현재 땅을 확보하려면 영지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하니 상대가 전쟁을 걸어오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수밖에.
다행히 그의 계획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몇 명이 공작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문이야 흘려 넘기면 되고 이올린 공주와 란티스 백작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영지 하나를 넘겨받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들이 동의하진 않겠지만 아스테라에선 힘이 곧 정의였다.
* * *
프로잔 후작은 약혼녀의 투정을 2시간이나 들어주었다.
바그란의 이올린은 화려한 드레스에 최근 유행인 사파이어 보석세트도 걸쳤지만 그가 보기엔 어설프게 자이움의 사교 유행을 따라하는 촌뜨기로 보일 뿐이었다.
하여튼 중요한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징징거린 내용이었다.
“섀도우 엘프와 내통하고 흑마술로 마족을 조종하는 남작이라고? 지금이 무슨 드래곤 전쟁 시대인 줄 아는 건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각하.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반다스 남작은 부유대륙에 상륙할 수 있는 유일한 자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프로잔 후작은 수석보좌관 에밀의 설명에 흐음,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사그리스 은광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부유대륙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쪽에 배치된 선단에 크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원래 자이움의 계획은 반다스 남작령의 선단을 따라 상륙하는 것이었는데 블루 드래곤 건으로 계획 자체가 좌초되었고 현재는 근처만 배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막대한 운영비를 허공에 뿌리면서.
“귀쟁이 놈들을 뿌리치고 부유대륙에 상륙할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해서 반다스 남작을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그쪽의 병력이 시원찮다는 점입니다.”
“재정에 비해 병력이 영 시원찮나?”
“예. 골리앗 4대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전부 라움급입니다.”
“그 쓰레기를 아직도 쓰고 있었군.”
유지보수가 용이해 용병들이 많이 쓰곤 있지만 현 시점에선 소규모 국지전에도 1선에 내보내기가 힘든 기종이었다.
코어 크기도 작고 전체적인 구조가 낡아빠져서 개조에도 용이하지 않은, 한참 전에 도태되었어야 할 기종이었다.
프로잔 후작은 돈도 많은 영지에서 왜 그런 걸 보유하고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최신기종까진 아니더라도 적당한 기종을 10대 정도 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텐데, 인맥이 안 닿았나?”
“영지엔 그랜든이라는 근위기사가 있습니다. 늙다리이지만 실력만큼은 하이 나이트에도 뒤지지 않지요. 그를 믿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놈이 영지를 비웠을 때 움직인다… 정론이긴 한데 어째 수상쩍군.”
왠지 반다스 남작이 들어오라고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남작 자체의 힘도 경시할 바가 못 되었다.
하찮은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3명을 동시에 제압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황은 아무리 수배를 해도 알기가 어려웠지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여겼다.
‘어차피 용병으로 떠돌던 놈, 제대로 된 기사일 리 없지. 함정을 팠을 게 분명해.’
요약하면 반다스 남작은 수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자신이 나서면 힘없이 짜부라질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바그란 왕가의 비호가 약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정리하도록 하지. 남작을 공격할 명분만 만들어 주면 란티스 백작이 직접 나서겠다 그 말인가?”
“직접 나서는 대신 휘하 가신들을 동원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각하의 지원을 바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습니다.”
“백작은 라움급 4대를 상대로 내 도움까지 필요한 무능력자인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라움급 4대밖에 없는 것과 엘브랑데의 심판관을 돌려보낸 남작의 수완이 신경 쓰이는 모양입니다.”
“하긴 그 귀쟁이를 그냥 돌려보냈다면 신경이 쓰일 만도 하군.”
티렌델은 그 실력만큼이나 무뚝뚝한 엘프로, 절대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비행선에 알테마란 이름을 붙이고 선수상까지 단 상태에서 그 엘프를 만났다니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티렌델은 별 항의 없이 반다스 남작령을 떠났다.
자이움에서 몇몇 귀족과 갈등을 일으키다 못해 결투까지 한 걸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알테마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귀족들을 차례대로 눕힌 그 귀쟁이가 얌전히 떠날 리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섀도우 엘프와는 내통하고 흑마술을 배워 마족을 조종하는 데다 이젠 귀쟁이 연계설이라… 솔직히 말씀드리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린 그걸 우겨야 하는 처지지, 안 그런가?”
“실체가 있으니 적당히 소문을 퍼트리면 금방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아스테라에서 필요한 것은 힘과 적당한 명분뿐이다.
그렇게 밀어붙이면 통한다는 것이 엘브랑데와의 200년에 걸친 갈등의 역사에서 지긋지긋하게 드러났다.
프로잔 후작은 최종적으로 반다스 남작을 거꾸러트리기로 결정했다.
“이 친구들이 안심이 안 되는 것 같으니 에밀 자네가 좀 나서줘야겠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자이움의 자랑스러운 하이 나이트인 에밀이 나선다면 작은 왕국의 쥐꼬리만 한 영지는 금방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엔 부유대륙에 상륙해서 금을 긁어오는 일만 남는다.
* * *
이올린 공주의 방문이 효과가 있었는지 자이움 사교계에서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반다스 남작이 섀도우 엘프와 내통했다는 것이다.
또한 흑마술을 써서 마족을 조종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음해란 걸 알 수 있지만 사교계는 언제나 그렇듯 흥미본위였다.
자극적이고 황당한, 그리고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 소문일수록 빨리 퍼졌고 구체적이 되어 갔다.
―반다스 남작이 직접 해적 군도에 가서 담판을 지었다. 그 대가로 은을 바치라고 했는데 마침 은광 하나를 갖고 있지 않나?
―사그리스 은광의 운영권을 달라고 한 건 섀도우 엘프에게 바치기 위함인가?
―은광에서 마족의 출현이 뚝 끊긴 것도 의심쩍다. 반다스 남작의 가계는 흑마술과는 별 관련이 없지만, 의혹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해명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자이움 제국의 대영주인 프로잔 후작이 직접 바그란 왕가에 문의했다.
―반다스 남작이 직접 왕궁에 출석해서 해명을 했으면 좋겠다. 그때는 우리도 참석할 것이다.
하필 그가 나선 것은 이올린 공주의 남편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그란 왕가의 입장에선 절대 남이라고 할 수 없었고 해명할 기회를 준다는 것도 귀족들에겐 좋게 받아들여졌다.
루아드 왕자는 소문의 진원지를 알아채곤 한숨을 내쉬었다.
“너구나, 이올린. 네가 바람을 불어넣었구나.”
이올린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애초에 반다스 남작의 잘못이에요, 오라버니. 모든 것을 움켜쥐고 내놓지를 않으니 인망을 잃는 거라구요.”
“그의 성공에 우리는 일절 관여한 바가 없다. 그런데도 뭘 내놓으라고 하는 게 말이 돼?”
“뭘 내놓으라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일 수 있잖아요. 지금 그자는 대영주고 왕가고 전부 무시하고 있다고요. 직할령까지 와서 왕궁에는 들르지도 않는 게 말이 되나요? 귀족보다 그깟 무지렁이들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해요?”
그녀의 말에선 반다스 남작령에 정착하기로 한 자유민, 그러니까 기술자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었다.
계승권과 관련이 없는 공주라서 왕궁에서 곱게 자라다 보니 현실적인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루아드 왕자는 그들이 나라의 기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소란을 가라앉히는 게 중요했다.
“네가 저지른 일이니 직접 해결해라. 당장 프로잔 후작에게 가서 오해였다고 하란 말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조금만 기다리면 반다스 남작이 뭔가를 내놓을 텐데.”
“답답하구나. 이대로 자이움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 부유대륙이건 은광이건 그대로 놔둘 것 같아? 사방에서 달려들어 조각을 낼 텐데 거기에 우리의 몫이 있으리라 생각해?”
“…후작이 약속했어요.”
“반다스 영지는? 대영지의 1년 운영비와 맞먹는 돈을 자이움에 바치고서 얻는 것이 고작 네 사치스런 생활뿐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루아드 왕자는 답답해져서 서류를 하나 꺼냈다.
“봐라. 사그리스 은광 주변에서 도는 예산이 어지간한 영지의 1년 예산과 맞먹는다. 우리가 얻는 이익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하지만 이올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평민들의 임금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요? 바그란을 수호하는 우리 황금 혈통에 도움이 되는 게 중요하죠.”
그녀의 말에는 바그란의 귀족들이 평민을 대하는 시선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경제를 전혀 모르니 밑바닥에서 도는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이다.
그에 반해 루아드 왕자는 국왕을 대신해 예산청을 맡았기에 이런 식으로 돈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올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평민들이 돈을 벌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 돈을 가지고 여유가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다.
반다스 남작의 현 행동은 명백히 거기에 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영향력을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가능성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올린을 비롯한 바그란의 귀족들은 반다스 남작이 기존의 체제를 흔들어 놓는 상황 자체가 싫은 것이다.
루아드 왕자도 그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도 결국 피 대신 에테르가 흐른다는 고귀한 혈통이기 때문.
귓가에 이올린의 포기하라는 듯한 말투가 닿았다.
“그리고 너무 늦었어요. 지금 와서 자이움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겠죠. 오라버니께선 그저 제 남편이 남작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지켜보기만 하세요.”
과연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의문이었다.
루아드 왕자는 반다스 남작의 서늘한 눈빛을 기억했다.
그가 이대로 얻어맞기만 하리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이움의 대귀족을 상대로 수가 마땅찮은 것도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이움과 바그란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왕가가 직접 나서기엔 무리가 있었다.
루아드는 그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정말 궁금했다.
‘어쩌면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올린을 외면하고 별실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