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76
275화 목화에서 시작되는 혁명
대륙력 1039년에 접어든 바그란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본격적으로 목화산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건 단순히 목화를 심었다는 게 아니라 대규모로 재배했고 그에 관련된 산업의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바그란 전역을 배회하던 유민들을 정착시켜 열심히 물을 대어 재배한 결과였다.
목화의 품종은 개량된 시비리 코튼으로서 물과 지력 소모가 덜하고 생육 시간이 짧은 것 등 장점이 많았다.
경작지가 많은 란티스시나 직할령 등에서는 이미 한 차례 재배가 끝난 목화솜을 면직물 등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조면기와 방적기 등의 제작이 끝난 상태였다.
개량된 에테르 기관을 이용한 근대적인 공장이 직할령 곳곳에 들어섰고 이는 수만 명 분의 노동력을 훌륭하게 대체하고 있었다.
목화솜에서 씨를 분리시키는 조면기 1대만 해도 천여 명의 인력을 대체할 정도였으니 효율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를 옮길 수송망 또한 미리 철로를 깔아 둔 덕분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주의점이라면 마찰에 약한 목화솜의 특성상 화재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전담 직원이 따라붙어야 하는 정도였다.
이 거대한 생산망은 바그란 동부에 오밀조밀 모여 있어 물류 면에서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다만 수요가 많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현 아스테라 대륙의 인구는 3억을 약간 웃도는 정도이나 엘브랑데는 인간의 상품을 질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어서 취급이 좋지 않았다.
자이움 또한 양모를 비롯한 자국의 섬유산업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어 신규 사업자가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아르마는 일단 신생 바그란의 수요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인구 1,500만은 작긴 하지만 생산망의 규모도 그리 크지는 않으니까요. 바그란 내부를 장악하고 나서 자이움과 엘브랑데까지 판로를 넓히면 됩니다.”
이렇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바그란 동부에서 만들어지는 면직물의 품질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미비로 21세기 지구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지만 아스테라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촉감과 부드러움을 자랑했다.
실제 공장에 들러 원단 견본품을 받아 본 상인들이 놀랄 정도였다.
“이 부드러움은 마치 실버드가 만드는 에락실 원단과 비슷하군요… 가격이 저렴했으면 좋으련만.”
“가만, 여기 가격이 쓰여 있는데… 원단 1미터에 3실버?”
“말도 안 되는 가격입니다. 에락실 원단이 1미터에 30실버가 넘는데.”
실버드는 아스테라 북부의 라온 호에 서식하는 아인종으로 등에 커다란 날개를 가졌다.
날개도 그렇고 외모도 무척 뛰어나서 과거엔 노예로 팔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구수가 워낙 줄어서 노예로 팔리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 실버드가 주력으로 만드는 상품이 있었으니 왕풍뎅이에서 나오는 에락실 섬유로 만드는 원단이다.
이 원단은 부드러움도 그렇고 광택 면에서도 기존의 섬유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엘브랑데조차도 연회용의 드레스는 에락실 원단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고가이고 구김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염색이 잘 되고 광택이 좋다는 압도적인 장점이 모든 것을 상쇄했다.
그런데 이 면직물은 그 고가인 에락실 원단에 비교될 정도였다.
가격은 1/10인데 말이다.
한 상인은 원단이 닳아버릴 정도로 만지며 의심했다.
“면직물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엘브랑데에도 자이움에도 목화솜으로 만드는 면직물은 있어요. 하지만 이런 광택은 처음 보는군요.”
“얼마나 부드러운지 만지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군요. 보통 면직물이라고 하면 대단히 거친데.”
“바그란은 노예제를 완전히 금지했다고 아는데 어떻게 이 가격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그건 제가 설명 드리죠.”
단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바그란의 재상인 아르마였다.
상인들은 화들짝 놀라 급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르마는 재상임에도 평소 별다른 통보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원래 높은 사람이 어디를 방문한다고 하면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부도 좀 그럴싸하게 꾸미고 청소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워낙 불규칙하게 여러 사업장을 방문하는 바람에 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설프게 조작했다간 그녀가 이끄는 감찰관들에게 탈탈 털리는 것이 일상사여서 요즘은 현장과 장부가 꽤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운 일화를 많이 가진 그녀지만 보통 사람에겐 대단히 살갑고 친절하게 대했다.
직위가 재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상당한 탈 권위를 이루었다는 평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상인들을 데리고 방직공장을 견학시켜 주었다.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공정은 노동력을 꽤 많이 필요로 하죠. 하지만 이 조면기를 쓰면 생산량이 대폭 늘어난답니다.”
“이건 에테르 기관 개량형 같은데… 조면기에 직접 연결된 겁니까?”
“네. 수차를 쓰기엔 효율이 너무 떨어지니까요.”
조면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목화솜과 씨앗을 분리해내고 있었다.
그녀에 의하면 이 조면기 한 대로 천 명 이상 분의 작업을 해낸다고 한다.
상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 명!”
“확실히 씨앗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요. 밀대로 일일이 밀어야 하니까…….”
“이렇게 분리해 낸 목화씨에선 면실유를 뽑아낸답니다. 식물성 기름을 아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거죠.”
다음에 소개된 공정은 씨앗에 열과 압력을 가해 기름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식물성 기름을 이렇게 쉽게 뽑아낼 수 있는 줄은 몰랐던 터라 깜짝 놀랐다.
척 보기에도 보통 양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요리에도 상당히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맞아요. 튀김류도 본격적으로 먹을 수 있게 되죠. 조금은 비싸지만요.”
사실 인간이 식물성 기름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면실유를 쓰고부터였다.
그 전에는 기름 자체가 귀했고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피쉬 앤 칩스로 대표되는 기름에 튀긴 음식도 면실유에서 파생된 것이다.
상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 모든 공정에 골렘으로 보이는 기계가 투입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오오, 이건 신기하군.”
“머리와 다리는 날려 버리고 상반신만 채택했군요.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데 딱이군.”
“저러면 에테르석이 많이 들지 않나?”
아르마는 그렇게 물은 상인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인건비보다는 확실히 적게 들죠. 그리고 골렘은 불평을 하지 않으니까요.”
“과연…….”
묘하게 냉정하면서도 현실적인 답변이었다.
아무튼 공장을 견학한 상인들은 이 모든 공정과 결과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지라 각지의 기술 수준과 문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이움은 물론이고 엘브랑데도 이런 퍼포먼스를 보이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식의 공장은커녕 효율 좋은 에테르 기관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으니까.
압도적인 기술이란 건 많은 이익이 난다는 뜻이고 선점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뜻도 된다.
상인들의 눈에 불이 켜졌고 아르마는 회의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제가 제안 드리고 싶은 건 국외의 수요 창출입니다. 바그란은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으나 외부는 다소 어려워요.”
“하긴 외부의 시선이 썩 좋지는 않지요.”
“저희 상인들의 존재 이유가 뭐겠습니까? 물건만 주십시오. 뭐든지 팔겠습니다.”
“감사하군요.”
아르마는 그들에게 견본품을 주면서 말했다.
“여러분이 할 일은 대륙을 돌아다니며 귀족, 유력자, 상인들에게 이 상품을 나눠주는 겁니다.”
“파는 게 아니라 나눠주는 겁니까?”
“품질은 확실하니 견본품을 나눠주고 수요를 이끌어 낸다는 거군요.”
“그러면 딱히 저희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는 것 아닌지…….”
다소 실망한 상인들이었지만 이어지는 아르마의 말을 듣고는 생각을 달리했다.
“해당 국가에의 수출은 전적으로 그분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즉, 수요를 이끌어 내는 대로 물량을 공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으음…….”
“그러니까 저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공급량이 달라진다는 거지요?”
끄덕끄덕.
상인들은 이건 해볼 만하다고 느꼈다.
이 정도의 품질이면 경쟁자가 될 만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당한 구역만 배정받는다면 독점적으로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쓰는 것은 최근 바그란을 좋게 보는 국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정복 사업과 상품 판로를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상인들과 같은 윤활유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자이움을 정복하는 시점에서 그들은 필요가 없어질 테지만 그 거대한 제국을 집어삼키려면 나름 준비가 있어야겠지.
아르마는 본격적으로 구역을 정해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번화한 구역을 배정받으려는 상인들의 어필이 눈물겨웠다.
* * *
바그란이 갈리스토를 흡수하면서 시작한 것은 인구 조사와 토지 측량이었다.
어떻게 나올까 가슴을 졸이던 갈리스토의 귀족들은 그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인구 조사는 세금을 부과하기 위함인가? 제발 무겁진 않았으면 좋겠다.
―직할령은 그렇다 치고 엄연히 독립적인 영지는 왜 측량을 하는 건지…….
―설마 바그란에서 그랬던 것처럼 땅을 내놓으라고 할 것인가?
―그건 왕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자이움에 알리고 결사 항전하겠다.
―뭔가 이상하다. 유민들은 왜 조사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이건 유민들은 인구에서 제외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은 거지 떼나 다름없는 자들로, 타고난 성정이 난폭하고 저질스러워 노동력으로 써먹기도 힘들고 세금을 뽑아내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내버려두고 있는 것인데 그걸 굳이 조사하고 있으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아무튼 두 작업은 1039년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력과 자금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 상당한 마찰이 일어났다.
거지 떼나 다름없는 자들이 순순히 자신들의 숫자를 말해 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곳곳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아르마는 흔들림 없이 이를 추진했다.
인공위성으로 훑어가며 조사할 수 있는데도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통보였다.
곧 정착지에 편입될 거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토지 측량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드나드는 조사관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온갖 방해공작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조사관을 죽이기도 했다.
아르마가 이를 보고하자 레오볼드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조사관을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본보기가 필요하니 밟아 버려.”
그는 피가 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가끔은 흘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시를 받은 바그란군이 출동하자 조사관을 죽인 백작은 주변 영지와 자이움에 호소하는 한편 끝까지 항전을 결의했다.
그는 절차상 항복을 권유하는 바그란군의 지휘관에게 이렇게 외쳤다.
“조사관을 보낸다는 건 내 땅을 집어삼키겠다는 것 아니냐! 바그란에서 수많은 귀족들을 학살한 것을 알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짓밟아 봐라!”
지휘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뭘 잘못 생각하는 것 같소. 면밀한 토지 측량은 세금 부과를 위한 것이지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뭐라고?”
그냥 세금 부과 때문이라고?
백작은 당황해 더듬거렸고 지휘관은 공격을 지시했다.
“어쨌든 조사관을 죽인 책임은 받으셔야지. 각 부대, 공격을 시작하라.”
병력은 골리앗이 아닌 척탄병 부대였다.
그들은 몇 안 되는 구형 골리앗을 손쉽게 박살 내고는 관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백작은 그 전투에서 사망했고 대부분의 가신도 운명을 같이했다.
그렇게 백작령 하나가 박살 나자 더 이상 조사관을 방해하는 세력은 없었다.
“역시 피를 봐야 이해하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레오볼드는 그냥 밀어버릴까 하는 유혹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아스테라 문명의 수준 향상이었다.
방해한다고 닥치는 대로 죽여서야 황폐한 땅과 흉흉한 민심밖에 남지 않는다.
“황폐화된 땅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데 굳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여러 귀족이 겁을 먹고 수그러든 틈을 타 토지 측량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르마는 모든 자료를 종합한 후 보고했다.
“최종적으로 갈리스토의 인구는 약 766만이고 면적은 약 50만㎢에 달합니다…….”
그 외에도 국가 경영에 필요한 온갖 자료가 나열되었다.
당장 시급한 것은 역시 부채 문제였다.
전 국왕 팔커스 2세는 이곳저곳에서 전비를 많이 끌어다 썼고 거의 갚지 않아 그대로 빚이 되었다.
“금액은 45만 골드에 달하는데 채권자 중 하나가 판그랄 대공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0만 골드로 줄어듭니다.”
“그건 다행이군. 자이움에서도 돈을 빌렸을 것 같은데?”
“황가에서 약 10만 골드, 노스윈드 연합과 기타 귀족들에게서 약 5만 골드, 나머지는 데노바에서 빌렸습니다.”
“거 많이도 빌렸군.”
바그란이 갈리스토를 흡수한 이상 그 빚까지 짊어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그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요는 채권자만 사라지면 되는 거잖아?”
채권자가 사라지면 빚도 사라진다는 건 당연한 논리다.
아르마는 고요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다 물었다.
“당장 자이움을 어찌하긴 힘드니 데노바를 합병할까요?”
마침 데노바는 바그란에서 꽤 가깝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그람 왕국만 어떻게 하면 데노바를 합병하는 것은 손쉬울 것 같았다.
“지금 그쪽 분위기는 어떻지?”
“전쟁 분위기로 인해 신이 났습니다. 금융 쪽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돈을 빌려준 상인들이 많죠.”
국가예산만으로 군사력을 꾸리는 건 모든 자원을 직접 관리하는 바그란 정도나 가능한 일이다.
최근 고조되는 전운으로 엘브랑데나 자이움이 군사력 확충에 나섰지만 돈이 부족해 상인들에게 빌리고 채권을 발행하고 난리가 아니었다.
덕분에 데노바는 사상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었다.
이자만 해도 엄청나게 들어와서 상인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그 상당수가 엘프 상인인 것을 감안하면 최종적인 승자는 엘브랑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장 돈을 달라고 하진 않지?”
“이자를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조금 힘든 기색을 하면 바로 채권을 들고 달려올 거예요.”
“그냥 갚아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번에 발행되는 종이화폐를 기본으로 해서 일을 벌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데노바를 먹어 두면 앞으로 편할 일이 많을 테니까.
원래 레오볼드는 데노바를 배제한 독자적인 금융 시스템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엘브랑데가 예상외로 빨리 적대적이 되었다.
적당히 음모를 꾸며 흡수해도 달라질 것 없다는 소리다.
“데노바는 흡수하는 형식으로 가야겠어.”
아르마는 즉석에서 로드맵을 수정했다.
“자이움에 있는 마스터의 영지에서 알테마의 뼈를 발견했다고 하면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겁니다.”
알테마는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다.
전투력도 엄청나서 어지간한 신격과도 맞상대가 가능했고 자이움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전신인 그람 제국과도 상당히 깊은 관계에 있었다.
드래곤 중 유일하게 신앙이 있었을 정도니 그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뼈만으로는 투자자를 모으기 힘들고 그럴싸한 유적과 보물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적당히 꾸며내면 엘브랑데가 달려들 거야. 전쟁을 걸어오긴 힘들겠고 아마 자금력을 동원해 발굴 현장을 묻어 버리려 하겠지.”
“그 틈을 타서 자금을 홀라당 먹어 버리고 뼈는 빼돌리면 됩니다.”
결과는 상인들의 파산이고 데노바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계획에서 우려되는 것이 있다면 발가드의 존재였다.
그는 알테마의 챔피언이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을 수집하는 현 단계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뼈가 드러나고 영혼이 완성된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맹약을 말하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숨기는 게 있는데… 다른 정보는 없어?”
“워낙 과묵한 사람이라… 다만 마르그레타 님의 노트에서 알테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대충 어떤 거지?”
“최후의 전투에서 알테마는 인간을 저주하며 죽어 갔답니다. 이유는 알 수 없고요.”
이 경우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유력한 것은 배신이다.
“발가드는 알테마의 최후에 대해 말하길 꺼려했지. 당시 그람 제국 내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겠군.”
“그 점을 중점적으로 무한의 도서관을 조사하겠습니다.”
아르마의 능력이면 도서관에 펼쳐진 마법 장벽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 전수 조사하긴 힘들지만 조만간 우주 플랫폼이 완공되면 마이크로드론을 양산해 수많은 기록을 모조리 옮기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엘프가 역사를 조작해 왔다는 게 밝혀질 것이다.
* * *
대륙력 1039년 봄.
바그란의 왕도 로제론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다.
왕명에 의해 은행 설립과 종이화폐 발행이 선언된 것이다.
사실 아스테라에도 은행 비슷한 것은 있었다.
데노바의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조합은 번화한 곳이면 직원을 파견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
그 이자가 살벌했고 추징 또한 냉정한 바람에 사람들의 대부업에 관한 인식은 최악에 가까웠다.
―상인들에게서 돈을 빌리느니 엘프와 평화를 논하는 게 낫다.
―그 살인적인 이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데 그걸 국가가 나서서 하겠다고?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왜 부정적인가? 전하께서 언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정책을 추진한 적이 있었나?
그동안 레오볼드가 펼친 치정은 바그란을 부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분명 양면전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로제론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선 이를 실감할 수 없었다는 것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즉, 레오볼드는 국력의 일부분만을 사용해서 갈리스토와 판그랄 대공을 무릎 꿇린 것이다.
그런 업적이 있다 보니 의외로 은행 설립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화폐 도입은 상당한 반발을 낳았다.
금은동으로 대표되는 화폐를 모조리 종이로 대체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금을 내놓고 그깟 종이를 받아가라고? 누가 그걸 원하겠나?
―1:1 지급을 보증한다고는 하는데 그걸 어떻게 믿지?
―이건 전쟁에 쓴 자금을 회수하려는 술책이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국왕을 믿어 보자는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로제론에서는 국왕이 왕국 내의 모든 금을 빼앗으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건 사실로 드러났다.
코덱스가 개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볼드가 포고령을 내렸다.
“내일부터 1년간 기존의 금화, 은화, 동화를 같은 가치를 가진 종이화폐로 1:1 교환한다. 주체는 로제론 은행이며 액수는 무제한.”
화폐의 이름은 크레딧으로서 금은동화에 대응되는 색깔과 디자인을 가졌고 5단위가 있는 게 특징이었다.
실물이 나왔지만 어지간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안 쓸 텐데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전하께서도 이번은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런 종이쪼가리는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다고.
―왕가에 재정적 여유가 없는 게 아닐 텐데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지…….
―전쟁으로 돈을 많이 썼겠지. 정복지에 공급되는 식량만 해도 어마어마할걸.
다만 모든 이가 크레딧을 무시한 건 아니었다.
완연한 봄이 되어 수많은 경작지에서 부유대륙산 딸기가 탐스럽게 열리자 많은 상인들이 이를 구입하기 위해 바그란을 찾았다.
그들은 넓은 밭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딸기 향을 맡고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크… 이 향이지. 엘브랑데 딸기는 향이 약해.”
“심지어는 엘브랑데에서도 이 딸기를 수입해 간다니까요. 자기들도 먹어보고 이건 경쟁이 안 된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건 놀라운데. 혹시 데노바를 통해서 수입하는 겁니까? 비행선으로 실어 나르면 운송 비용이 장난이 아닐 텐데.”
“대가문들의 자금력이야 어지간한 나라 하나를 세울 정도니까요.”
상인들은 엘프 자존심도 별거 없다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공판장에서 그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현수막에 일체의 금속화폐를 받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통용되는 것은 로제론 은행에서 발행하는 크레딧이었다.
“딸기를 사고 싶으면 그 종이쪼가리를 가져오라고?”
“이건 말도 안 돼…….”
상인들은 현수막 앞에서 석상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