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77
276화 큰 착각
―이런 종이쪼가리를 누가 원하겠는가.
로제론 은행이 크레딧 화폐를 발행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소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화폐 자체에 신뢰성을 가지지 않았다.
기존 금은동으로 대표되는 금속화폐를 워낙 오래 써온 것도 있지만 도통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 컸다.
뭘 믿고 금을 종이와 바꾸겠는가 말이다.
은행에선 동등한 가치를 가진 화폐로 지급을 보증했지만 사람들에겐 숫자가 올라가고 디자인이 바뀐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동안은 무제한 교환이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가산세가 붙으니 더더욱 바꿀 이유가 없었다.
현 국왕에 대해 호의적이던 유력자들도 이번에는 무리했다는 평이었다.
―뭔가 화폐를 개혁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실패군. 너무 급진적이어도 안 좋다니까.
―국왕은 돈을 만질 일이 없어서 주머니 안에서 금화가 짤랑거리는 그 느낌을 모르는 거야. 그게 얼마나 만족감을 주는데.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금화가 실제로 금이 함유되어 있는 실물이란 것 말이다.
현재 바그란에서 통용되는 금화는 대부분 자이움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원래는 규격이 정해져 있었지만 사이즈를 측정해보면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자이움이 금화를 생산하면서 차익을 빼돌리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액면가와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가치가 정확히 맞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거기에 금화 사용자들도 은근히 테두리를 깎아내어 크기를 줄이곤 했다.
이런 행태가 200년 동안 끊이지 않았고 덕분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금화 1개의 정확한 가치를 계산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보통은 무게로 계산하는데 그것도 저울추 등을 만지는 경우가 많아 무용지물이었다.
아르마가 제일 혐오하는 게 이런 것이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신뢰할 수 없어요. 따라서 바그란 내의 모든 화폐를 크레딧으로 바꾸는 게 좋죠.”
이 크레딧이란 화폐는 1, 5, 10, 50, 100 단위로 여러 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평범한 종이도 아니고 섬유를 섞어 꽤 질긴 것이 특징이었고 위조를 막기 위한 가공이 약간 추가되었다.
또한 인쇄 방법이 약간 달라서 기존의 기술로는 흉내 내기조차 어려웠다.
어설프게 위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레딧 화폐는 여러 이유로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마가 몇 가지 구체적인 시행안을 내놓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크레딧 전용법이다.
앞으로 바그란의 모든 공무원과 사업체는 모든 대금을 크레딧으로 결제하며 외부에서도 바그란과 거래하고자 한다면 크레딧을 써야 한다는 법안이었다.
만약 크레딧을 쓰지 않고 기존 화폐를 이용하려 한다면 1차로는 벌금형을, 2차로는 실형을 살게 되어 있었다.
법무관이 코덱스에 이를 기록하자 법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장 4월 왕궁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월급이 크레딧으로 지급되었다.
그들은 손 안의 지폐를 보고 황당해 했다.
“아니, 이걸 가지고 어떻게 식량을 사라는 거지?”
“월급날에 은화가 짤랑거리는 걸 듣는 게 낙이었는데… 얼마 못 가서 사라지긴 하지만.”
투덜투덜하면서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식료품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로제론시에서 운영하는 식료품점은 이미 크레딧 결제 준비를 끝내 놓았던 것이다.
식료품 등의 필수재를 취급하는 가게는 대부분 시에서 운영하는 것이었기에 시행령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물론 가게의 직원들도 크레딧이란 화폐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의외의 장점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집에 가져갈 식량을 산 직원들은 계산을 하다가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보자… 감자 한 포대가 2실버 10브론에다가 신선한 딸기 한 바구니가 3실버… 거기에 빵과 버터까지 합치면 총 6실버 40브론인데 이걸 크레딧으로 계산하면…….”
“640크레딧이네요.”
점원이 말하자 직원은 손에 쥐고 있던 화폐에서 640이란 숫자를 맞춰서 넘겨 주었다.
그리고 당황해했다.
“어? 이걸로 끝인가?”
“끝이네요. 100크레딧짜리 6장에다 10크레딧짜리 4장이니까 640크레딧.”
“아, 맞구나.”
은화가 아니었기에 허전했지만 굳이 무게를 재지 않아도 된다는 압도적인 간편함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칼 같은 걸로 테두리를 몰래 잘라내는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무게도 아주 정밀하게는 잴 수 없었고 그마저도 추를 조작하는 놈이 많았다.
그런데 이 크레딧 화폐는 취급이 아주 간단했다.
숫자를 맞춰서 주기만 하면 되니까.
원래 10분 이상 옥신각신 싸우면서 진행되었을 계산이 한순간에 끝나 버렸다.
이런 일들이 로제론 곳곳에서 일어났고 시민들은 크레딧이라는 화폐가 의외로 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엄청 가볍고 취급하기도 편하네.
―평범한 종이는 아닌 것 같은데 뭘로 만든 거지? 물에 젖어도 의외로 잘 버티는데?
―무엇보다 계산이 빨리 끝나서 좋다. 사기 치는 놈들 계산하는 거 기다리려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는데.
이렇듯 시민들 사이에서 크레딧 이용이 잦아지자 그 여파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바그란 정부가 크레딧 전용법을 코덱스에 박아 놓은 이상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다들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부드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크레딧이란 화폐에 압도적인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부와 시에서 운영하는 가게가 크레딧을 받다 보니 시민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 입장에선 어차피 쓸 돈인데 그게 은화든 크레딧이든 별 차이는 없지.
―들어 보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단들도 금화를 주고 크레딧을 바꿔 갔다던데? 딸기 구입하려면 크레딧으로 결제해야 해서.
―세금도 종이 몇 장으로 내면 되니까 참 편해.
다만,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유 재산이 별로 없는 평민층이야 크레딧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많은 금화를 가진 부자, 특히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크레딧 도입을 자신들의 재산을 강탈하려는 레오볼드의 음모로 생각했다.
―금을 종이쪼가리로 교환하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지.
―1년 뒤에는 가산세가 붙는다던데 누가 금을 내놓을까? 가지고 있다가 후대에 물려주는 게 낫지.
―감찰관들이 돌아다니긴 하는데 창고 깊숙이 숨겨놓은 금까지 파악할 수는 없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그란 정부에서 새로이 토지세를 신설한 것이다.
코덱스에 의하면 이번에 편입된 갈리스토 귀족들은 군사적으로 압박받지 않는 대신 토지세 납부의 의무를 떠안았다.
여기까진 그래도 인정할 만했다.
레오볼드는 바그란을 통합하면서 귀족 작위를 반납하도록 했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무력을 사용해 짓밟았다.
그렇게 당하느니 세금만 내는 걸로 마무리된다면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하지만 이 토지세는 땅의 넓이에 따라 달라지고 오로지 크레딧으로만 납부할 수 있었다.
귀족들이 가진 막대한 금은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갈리스토의 귀족들은 토지세를 계산해보곤 말도 안 된다며 울분을 토했다.
“1년에 납부해야 되는 세금이 2천 골드가 넘소! 이걸 어떻게 감당하란 말이오?”
“감당이 안 되면 땅을 헐값에 넘기라고? 이런 개수작을 봤나!”
“세금을 크레딧으로만 받는 건 정부의 폭거요! 당장 항의해야겠소!”
그러나 귀족들의 항의는 시작부터 무산되고 말았다.
민원을 받는 직원 자리에 발가드가 떡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헤이스톤 협곡에서 단기로 골리앗 100대를 격파하고 왕궁을 함락시킨 전쟁 영웅이었다.
갈리스토의 입장에선 원수였지만 나라가 없어진 마당에 그에게 증오를 보낼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 할 말 있어?”
기분이 별로 안 좋은 모양이다.
부리부리한 눈초리가 귀족들을 씹어 먹을 듯 쳐다보자 다들 기가 질려서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희가 뭔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귀족들은 발가드에게 죽느니 차라리 세금이나 땅을 바치는 게 낫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레오볼드는 애초에 그들에게 특권을 허락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창고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금화를 꺼내 크레딧으로 교환했다.
때로는 돈이 없어 땅을 세금 대신 납부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데노바에서 빌린 자금이 상당해 다들 허덕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결과적으로 귀족들이 보유한 갈리스토의 땅이 조금씩 정부에 귀속되고 있었다.
“귀족들의 벌이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길어도 3년이면 대부분의 영토가 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면 됐어. 1년만 더 지나도 작위와 영토를 반납하고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마 보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토지세는 시작에 불과하고 에테르 혈통을 옭아맬 규제는 얼마든지 신설할 수 있었다.
자이움도 손을 떼다시피 한 마당에 레오볼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제국마저도 최근에는 바그란에서 온 상품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는 엘브랑데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
드리즈덴은 수출입관리국의 1분기 내역서 일부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분명 바그란과의 거래를 끊으라고 한 것 같은데.”
관리국장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스럽습니다, 각하. 최대한 물량을 줄이려 애썼으나 바그란산 딸기가 워낙 인기가 있어서…….”
“바그란산? 종자는 부유대륙에서 온 걸로 아는데?”
“마, 맞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부유대륙산 딸기가 워낙 인기가 높아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특히 대가문의 수요가 엄청납니다.”
“…내 말을 안 듣는다는 얘기구만.”
엘브랑데엔 드리즈덴 이외에도 권력의 축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2개에 이르는 대가문이다.
황족인 루스텔 가문은 드리즈덴의 숙청에 쓰러졌지만 나머지는 아직까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들을 숙청하는 것은 현 상태에서는 어려웠는데, 총통 드리즈덴조차도 페더우드 가문의 일원이었다.
친위대를 동원하자니 그들이 가진 병력도 만만치 않아 엘브랑데가 두 쪽으로 쪼개질 위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드리즈덴이 총통직에 오른 것부터가 대가문들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은 아스테라의 비밀을 가장 잘 알았고 현 엘브랑데의 체계로는 레오볼드를 족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레오볼드가 죽고 모든 일이 끝나면 드리즈덴도 총통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압박을 넣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작 그는 영생을 꿈꾸고 있지만.
어쨌든 대가문들이 부유대륙산 딸기에 맛을 들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대륙 끝에서 딸기를 공수해 오려면 비용이 장난이 아닐 텐데도 그걸 기꺼이 감수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드리즈덴은 혀를 찼다.
“그거 하나를 못 참아서 이 난리인가. 이래서야 바그란을 말려 죽이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가 세운 대 바그란 전략 중에는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그란은 지난 3년간의 개혁을 통해 대부분의 자원과 필수재를 자체적으로 수급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엘브랑데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걸 완전히 틀어막음으로써 바그란과의 교역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 1차 압박이었다.
하지만 대가문들이 나서서 관리국을 압박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드리즈덴은 내역서를 더 훑어보곤 기가 찬듯 말했다.
“이건 또 뭔가? 면직물? 이런 걸 왜 수입해?”
“질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기껏해야 목화솜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자이움에도 있고 자치령에서도 실버드가 만들고 있잖아?”
“그것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국장이 면직물을 가져오자 거친 손가락이 원단을 어루만졌다.
“…광택이 꽤 좋군. 부드럽기도 하고. 이게 얼마라고?”
“1미터에 3실버랍니다. 관세를 포함해도 4실버를 넘지 않죠.”
“미쳤군. 적자를 보면서까지 수출하고 싶은 건가?”
“그것이… 사실은 적자가 아니랍니다. 이상한 기계를 동원해서 엄청난 속도로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고 실을 짠다는군요. 기계 한 대가 천 명분의 일을 한답니다.”
“…….”
드리즈덴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원단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1미터에 3실버라면 그리 좋은 원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엘브랑데의 하이엘프들도 이걸 고급원단으로 쳐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쓰는 용도라면 다르다.
바그란은 이미 효율 좋은 에테르 기관을 상용화시켰고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골렘을 공장에 이용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산력은 보통이 아님이 이미 증명되었다.
‘평상복을 이 원단으로 만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에락실 원단보다는 못하겠지만 기존에 쓰던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다소 비용이 상승해도 엘프는 이 원단을 고를 것이라는 뜻이다.
‘레오볼드…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놈이군.’
부유대륙에 올라갔을 때 그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죽였어야 하는 건데.
이제 그를 죽이는 건 어지간한 계획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그 깐깐한 하이엘프들도 나서서 돈을 바치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손해를 볼지 모를 일이었다.
관리국장이 나갔고 친위대 대장 에키드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이매진 레코드 마법으로 뭔가를 보여 주었다.
“이건… 드래곤의 뼈군.”
“네. 레오볼드가 자이움 내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이 뼈를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자금을 끌어들일 것이라 호언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나갔나? 드래곤의 뼈를 발굴해서 뭐 어쩌려고?”
“아무래도 밑에 유적과 보물 상당수가 파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뼈로 말하자면 알테마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
드리즈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알테마라고 하면 엘프 최대의 적이었다.
뼈를 발견한 것도 모자라서 발굴하겠다고?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마법을 들여다봤다.
흐릿했지만 얼핏 알테마의 뼈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골드 드래곤은 머리의 뿔이 하나인데 뼈에도 이마 중앙에 정확히 뿔이 나 있었다.
“하이페리온도 그렇고 그 이름을 다시 꺼내다니 우리의 신경을 긁으려고 작정을 했나 보군.”
“그런데 데노바에선 의외로 알테마라는 이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투자를 할 모양입니다. 아마 과거의 유적과 보물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습니다.”
“…….”
드리즈덴은 한동안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금을 다 빼라고 하는 건 쉽지만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알테마의 영혼을 모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녀는 엘프의 신들과 싸우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당시 그람 제국의 황족에게 배신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그 마지막을 기억할 영혼이 어느 쪽에 더 이를 갈지는 뻔한 일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레오볼드는 아직 영혼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진작 우호적인 신격을 깨워서 우리를 공격했겠지.’
사실 레오볼드와 아르마는 케인을 통해 영혼의 존재를 깨달았고 엘드그라실의 가지로 영혼을 모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에테르 오리진을 통해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드리즈덴은 그걸 모른 체 레오볼드가 멋모르고 돈에 눈이 멀어 알테마의 뼈를 발굴하려 한다고 착각했다.
“멍청한 놈. 자신이 죽을 자리를 알아서 파는군.”
“그렇다면 데노바에 돈을 빼지 말라고 연락할까요?”
“알아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뺄 이유가 없지. 더 깊게 팔 수 있도록 많은 자금을 지원하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간 뒤 드리즈덴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알테마의 뼈를 발굴하려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드래곤들 중 가장 강력한 개체이고 이름이 높으니 돈이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겠지.
엘프가 아주 싫어하는 이름이라서 어떻게든 묻어 버리려고 돈을 지원하는 그림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혼이 인간에게 분노하고 있음은 몰랐겠지.
“그 무지가 네놈이 패배하는 이유다, 레오볼드.”
한편 드리즈덴은 대전쟁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신을 할 순 없지만 신성교국이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였다.
‘대전쟁… 우리 엘프는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인간의 실수를 바로잡았지…….’
그날이 다시 온다고 해도 엘프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 아스테라를 강대한 마왕에게서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으므로.
‘착각하지 마라, 레오볼드. 너 같은 놈은 200년 전도 그렇고 어느 시대이건 한 번은 나타났었다. 네가 최초가 아니야.’
그들은 인간들 사이에선 선구자라 불렸지만 드리즈덴이 보기엔 재앙을 불러오는 존재일 뿐이었다.
드리즈덴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사이, 진짜 마왕이 마레에서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다.
* * *
행성 마레는 마족으로 알려진 플레이그가 우글대는 곳이다.
개체수는 아르마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고 수많은 플레이그 퀸들이 군단을 모아 서로의 영역을 공격하기 바빴다.
그들이 아스테라에 잘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에테르 폭풍을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레는 테라와 달리 대기권이 없고 무척이나 척박한 곳인데 에테르의 흐름마저 불안해 가끔 폭풍이 일어나곤 했다.
마족들은 그 폭풍 틈새에서 정확히 문을 찾아내 아스테라로 이동한다.
200년 전만 해도 이 에테르 폭풍은 의외로 자주 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닫힌 세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자기들끼리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마레에 있는 수백 명의 마왕들은 쉴 새 없이 싸우고 뒤통수치기에 바빴다.
가끔 인간에게서 배웠답시고 외교란 것을 하기도 했지만 그 본성이 어디 가지 않아 다시 전쟁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최근 마레의 마왕들은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원인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마왕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아.
갑자기 나타난 주제에 엄청나게 강했고 순식간에 주변의 약소 마왕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군단을 불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는 마레에서 가장 강대한 열 명의 마왕과 버금가는 실정이었다.
그게 1년도 되지 않아 이뤄낸 성과이다 보니 주변의 마왕들이 긴장할 수밖에.
―크고 강하다. 대체 뭘 먹고 저렇게 큰 것인가?
―이 주변에서는 못 본 녀석인데 갑자기 나타난 게 영 수상쩍다.
―혹시 테라에서 온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가 깊어졌지만 10대 마왕도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그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마왕들은 정찰병을 보내 그녀의 둥지를 탐색한 끝에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둥지의 가장 높고 좋은 곳에 마련된 인간의 조각상이었다.
이 상은 처음엔 얼굴만 흐릿하게 나타났지만 최근 들어선 몸과 팔다리가 정교하게 드러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거인의 조각상에 마왕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조각상의 주인은 설마 루시아가 경배하는 자인가?
―설마 언젠가 나타난다는 마신?
마왕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동안 루시아는 열심히 둥지를 확장하고 군단을 늘려나갔다.
언젠가 레오볼드가 자신을 부를 때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마왕끼리의 텔레파시도 아닌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안녕하신가. 작은 가능성이여.
―넌… 누구지?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그것은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이지. 나는 너의 미래이자 가장 큰 가능성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진화에 이르지 못했구나. 나중엔 알게 되겠지.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고 루시아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약간 알게 되었다.
54년 전 레오볼드와 태양계에서 싸웠던 바로 그 플레이그 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