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85
284화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수십만이나 되는 유민을 정착시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들을 받아들일 정착촌 건설부터 시작해서 생필품과 식량의 수요는 어지간한 관료들도 학을 뗄 정도였다.
이는 바그란 자체의 공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자이움의 상인들까지 달려들어야 했다.
덕분에 그들은 쏠쏠한 돈을 만졌다.
기존의 계약된 건을 무시하고 바그란에 갖다 팔기만 하면 이문이 2배는 남으니 그걸 마다할 상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부 귀족들도 그 광풍에 뛰어들다 보니 자이움 전체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 거대한 사업을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저렇게 많은 돈을 써서 고작 이루는 일이 유민들을 정착시키는 정도라니.
―말이 유민이지 거지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그들에게선 그 어떤 이익도 창출할 수가 없다.
―급하면 인력으론 써먹을 수 있겠지만 빵 한 쪼가리 얻어먹기 위해 살인도 마다않는 놈들인데 통제가 될 리가…….
하나같이 비관적이었지만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랜든이 훈련시킨 치안 병력의 수준은 장난이 아니어서 매우 효율적으로 정착지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생필품이 부족하지 않게 공급되다 보니 불만을 가지는 유민도 별로 없었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것이다.
하지만 수십만 명의 유민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온갖 부작용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바로 자이움 내부의 원자재 문제였다.
인구 1억을 자랑하는 제국은 그 덩치답게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 물량의 20% 가까이가 바그란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출이 늘어나는 것이니 좋다고 볼 수 있겠지만 상인들은 돈을 주머니에 넣는 대신 바그란의 조합에 접촉했다.
부유대륙산 딸기며 감자, 면실유, 갑각류, 그리고 품질 좋은 에테르석 등을 수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성한 계약서가 문제의 시발점이었다.
조합의 물량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하는 상단이 많다 보니 계약서에 무리한 조항을 여럿 집어넣게 되었다.
3배나 되는 위약금이 그중 하나였다.
기한은 1040년 봄까지였으므로 상인들은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 위약금을 실제로 물 일은 없다고 여겼다.
―반다스 왕은 제국의 백작이기도 하니까 더 이상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우리도 비싼 값에 물건을 파니까 이 정도의 위약금은 감당해야지 어쩌겠어?
―그나저나 위약금 항목이 계약서보다 긴 건 처음 보는군. 돈을 못 내면 땅이라도 받겠다는 건가?
―최후의 변제로는 크레딧 도입이라… 이거 냄새가 너무 나는걸.
질릴 정도로 세세하게 기입되어 있어서 바그란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닐 거라는 의심이 나올 정도였다.
약속대로 물자만 공급하면 되니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열심히 꿀을 빨고 있던 상인들은 갑작스런 황명에 당황했다.
―뭐? 모든 인력과 물자 반출 금지? 이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걸 갑자기 왜 막아?
그것이 황제의 레오볼드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알 길이 없었다.
제국 내의 상인들은 연줄을 동원해 황궁에 연락을 취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황명은 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친위대가 출입국과 여러 관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진짜 물자 반출을 틀어막겠다는 것이어서 상인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장 물자를 공급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입게 될 판이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프로잔 후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바그란 조합에 레오볼드와의 친분을 내세워 여러 계약을 따낸 바 있었다.
사실 친분이랄 것까진 없는 사업적인 관계에 불과하지만 치열한 경쟁시장에선 그런 것까지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위약금 항목은 같았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물자만 대주면 돈이 자동으로 굴러들어오는데 이걸 마다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돈을 빌려서라도 물자를 끌어와.”
그는 이번 기회에 거금을 벌어 더 높은 작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판그랄 대공이 사라졌으니 그 자리를 누군가 차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얘기한다면 완전히 독립적인 영토를 가진 대공 작위는 언감생심이었고 공작마저도 경쟁자가 많았다.
제국에 공작은 한 명도 없지만 후작은 10명 이상 되었던 것이다.
프로잔 후작은 그 경쟁을 뚫기 위해선 돈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래규모를 대폭 늘렸다.
겨울에 이르면 후작령 전체가 바그란과의 거래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총 대금은 20만 골드를 웃돌았고 하루 만에 수천 골드가 빠져나가길 반복하는 바람에 관료들은 잠도 못 자고 돈을 관리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황명이 내려지며 바그란으로 통하는 모든 관도가 막혔다.
친위대가 계류장까지 감시하는 바람에 비행선까지 못 뜨게 되었다.
프로잔 후작은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는 상인들을 대표해 겨우 황제를 알현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경도 그 위약금이란 것을 물어줘야 하오?”
이미 상인들의 하소연을 많이 접한 모양이다.
“황공합니다, 폐하.”
“얼마요?”
“예?”
“위약금이 얼마냐는 말이오.”
“…계약이 3월까지이니 위약금은 총 30만 골드가 넘습니다…….”
프로잔 후작령의 재정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황제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떻게 계약을 했기에 그런 금액이 나오는 거요?”
“아무래도 공급액이 높고 경쟁자가 많다 보니… 차액에 위약금을 매기게 되었습니다.”
“차액? 설마 물자를 2배 이상으로 사주니 그 차액에 위약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한 거요?”
“예…….”
그러니까 1골드짜리 물건을 2골드에 팔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대신 차액인 1골드에 3배의 위약금을 매긴 것이다.
그게 주 단위도 아니고 몇 개월이나 자동 갱신되니 위약금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날 수밖에.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레오볼드가 함정을 잘 판 것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상인들이 앞뒤를 살피지도 않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물자를 공급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라 판단하고 뛰어든 것.
사정을 알아챈 바라크 황제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보관을 집어 던졌다.
“다들 정신이 나갔군! 놈의 함정에 제대로 걸렸어!”
“수풀기사도 아니고 주머니 바닥까지 털어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한때 사정을 봐주었더니 이따위 행태로 나를 능멸해?”
수풀기사란 골리앗과 비행선이 없던 과거 여러 이유로 섬길 대상을 잃은 기사들이 타락하는 종착지였다.
일단 기사이긴 한데 돈은 없다 보니 적당한 숲을 점령하고 행상인들을 털어댔다.
행상인이란 게 드문 시절이다 보니 한 번 걸리면 주머니 바닥까지 털었고 사람들은 수풀기사라 하여 그들을 경원시했다.
황제가 레오볼드를 수풀기사에 빗댄 것은 그만큼 분노했다는 증거였다.
프로잔 후작은 황제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 것을 기다려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공하오나 폐하, 단 며칠만 봉쇄령을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안 되오. 이놈을 말려죽일 기회야.”
“설마 유민들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애초에 그곳으로 몰려간 게 잘못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아무래도 황제는 물자 공급을 완전히 끊어 바그란을 고립시키려는 모양이다.
프로잔 후작은 황제의 열등감이 이렇게 심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황제는 집무실을 돌아다니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춘궁기, 춘궁기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식량은 어디서 만들 수도 없지. 지금은 놈이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잘난 체하고 있지만 거기까지요. 놈은 정착촌에서 굶어죽는 국민들을 바라봐야 할 거요.”
섬뜩한 기운이 몰려왔다.
자존심 때문에 수십만에 달하는 유민들을 굶겨죽일 거라고 호언하는 황제가 있다니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어차피 평민이었다.
그들은 단지 숫자에 불과했고 정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황제는 레오볼드의 이름값을 깎아 내리는 것이 평민 수십만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게 남의 나라 국민이면 더 말할 게 있을까?
프로잔 후작은 공급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내용을 떠올렸다.
‘돈도 땅도 내줄 처지가 안 되니 영지 내 화폐를 크레딧으로 갈아치워야겠군.’
영지가 흡수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모든 금속화폐를 폐지하고 크레딧만을 사용할 것.
그것이 바로 위약금을 대신할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이었다.
이로서 철옹성 같던 빗장이 하나 풀렸다.
빗장이 풀린 것에 비하면 물자 공급이 막힌 것은 별로 문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그란은 부유대륙에 거대한 생산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수억 명을 먹여 살린 스마트 팩토리와 스마트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 * *
바그란과 자이움의 연결통로가 완전히 끊겼다.
이는 21세기 지구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이가 어지간히 좋지 않아도 민간교류는 지속되기 마련이고 특히 무역은 더 그런 면이 있었다.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완전히 한쪽만 피해를 입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스테라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대부분의 물자는 영지에서 생산되고 소모되었고 더 돈다 할지라도 국가 내부에서 조금 유통되는 게 전부였다.
쉽게 말해 수출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1039년 겨울에 있었던 대량의 물자 반출이 예외적인 경우였는데 황제가 이를 단단히 틀어막으면서 문제가 터졌다.
기껏 준비한 물자와 인력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자이움은 쟁여놓은 물자 처리 문제와 위약금으로 난리가 났고 바그란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당장 직할령에 일하러 온 목수들은 어떻게 돌아가느냐고 발을 동동 굴렀다.
“비행선이 진입을 못 한다고 하는데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관도까지 완전히 막혔다고 합니다! 밀입국이라도 해야 할까요?”
레오볼드는 그들의 민원을 읽어 보고 불러들여 다독였다.
“놀랄 것 없소. 황제의 이번 조치는 한시적이니까. 그 많은 물자를 언제까지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소?”
“…….”
하긴 그렇다.
지금 자이움 제국은 그 황명 때문에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워낙 이익이 많이 나다 보니 너도나도 돈을 끌어들여 몸을 던지다시피 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틀어 막혔다.
누가 욕을 먹을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에게 일단 욕을 하고 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해 당사자에게 레오볼드는 거금을 안겨줄 물주이고 바라크 황제는 그걸 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황명인 만큼 경거망동하진 않겠지만 그의 위신이 추락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위약금이 뇌관이 될 텐데 대부분은 돈이나 땅을 내주느니 크레딧을 도입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게 레오볼드와 아르마의 목적이었다.
크레딧이란 종이화폐를 자이움 제국 안에 밀어 넣는 것.
일단 넣기만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크레딧의 활용도는 높아질 것이고 제국의 경제 시스템 전체가 아르마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당장 부족한 물자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제의 지시는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실물을 틀어막는 건 대부분의 경우에 유효했고 수십만에 달하는 유민이 한데 몰린 정착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식량 수천 톤을 구하지 못하면 그들이 굶어죽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그란은 이것도 이미 대비해둔 상태였다.
“이제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스마트팜에서 식량을 가져오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알토란처럼 모아 두었던 비행선 선단이 총동원되었다.
이들은 뭘 나르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부유대륙과 바그란을 오가며 선창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몰래 세틀러호까지 동원했기에 식량 운송량은 계획보다 곱절은 많았다.
숫자를 들여다볼 권한을 가진 게 아르마뿐이다 보니 누구도 전모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기차가 예상보다 많은 식량을 싣고 오자 인부들이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냐… 오늘은 철야를 해야겠는데?”
“자이움으로 통하는 관도가 막혔다고 하는데 이 식량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어이, 한슨! 일이나 해!”
바그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은 한두 개가 아니라서 깊게 생각하면 손해라는 점을 경험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식량이 정착촌에 공급되자 당장 급한 불은 꺼졌다.
이후로도 선단이 식량을 실어 나르게 되면서 황제가 의도한 식량난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바라크 황제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크게 분노했다.
“왜 저기는 멀쩡한가 말이오! 왜!”
그가 분노하는 것은 제국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이다.
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 상단이나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고 약속이나 한 듯이 돈과 땅보다는 크레딧을 도입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간 철저히 막아왔던 종이쪼가리가 드디어 제국 경제에 편입된 것이다.
황제는 황궁의 시녀들이 크레딧을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울분을 토했다.
“대체 뭘 믿고 저 종이쪼가리를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의 울분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크레딧을 아주 잘 써먹고 있었다.
황도 제롬은 유행에 아주 민감한 도시였기에 크레딧 도입도 빨랐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게 가속화되었다.
1040년 봄에 이르면서 크레딧을 받지 않는 가게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특히 유행을 중요시하는 사교계에서 널리 퍼진 것이 컸다.
사교클럽을 주름잡는 귀족부인들은 바그란에서 수입된 지갑을 들고 자랑했다.
“요즘 누가 촌스럽게 은화를 들고 다녀요? 이 세련된 지갑 디자인을 보세요. 손때 묻은 주머니와는 완전히 다르죠?”
얇은 가죽 지갑은 남들과 다른 고품격 아이템을 원하는 귀족부인들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다.
보통 귀족부인들은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주머니를 직접 들고 다니지 않지만 지갑은 예외였다.
충분히 가벼운 데다 얇고 디자인까지 세련되다 보니 품에 지니고 다녔고 이게 유행의 원인이 되었다.
바그란의 종이화폐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
레오볼드가 처음 아스테라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바그란은 자이움에서 제조한 금속화폐를 도입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자이움의 경제는 조금씩 바그란에 잠식되고 있었다.
바라크 황제는 이를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자도 언제까지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3월이 되자 적당히 풀어주었고 양국의 교역은 다시 활성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바그란은 수십만에 달하는 유민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2년만 고생하면 바그란의 국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떠돌다가 죽을 목숨이었는데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사실 여기에서 지내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아. 아니, 먹는 건 그람 왕국보다 훨씬 나아.
정착촌에는 자유는 없었지만 물자는 비교적 풍부한 편에 속했다.
그 자유마저 2년만 고생하면 주어질 예정이라서 감히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공짜나 다름없는 인력을 확보하게 된 아르마는 그들을 철도 공사나 비행선 건조 등에 투입했다.
국가 발전 계획이 힘을 받기 시작했고 에테르가 각 가정에 보급되면서 바그란의 국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운데 잘 됐구만.
―내년부터는 돈을 내야 한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요금제 보니까 그리 비싸지는 않던데? 솔직히 따듯한 집에서 지내 보니까 춥게는 못 지내겠어.
―위쪽의 자이움에선 귀족 나리들도 엄청 춥게 지낸다고 하던데 불쌍하네요.
실제로 그랬다.
아무리 위세가 높고 돈이 많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큰 저택이나 성 전체를 데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다들 벌벌 떨고 지내는 게 일상이었다.
목욕이라도 하려면 장작을 떼고 난리도 아니었고 이는 겨울철 귀족들에게서 고약한 체취가 나는 원인이 되었다.
에테르석을 이용한 난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효율이 안 좋아서 치료실에서나 쓰이는 실정이었다.
바그란에서는 평민들도 겨울을 따뜻하게 지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이움의 귀족들이 거기에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갈리스토에 내려가서 견본주택을 직접 체험해 보고 겨울에도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는 것에 홀라당 빠지고 말았다.
“월 3골드만 내면 저택 전체를 데울 수 있다고? 그게 사실이오?”
“3골드가 아니라 3만 크레딧입니다. 어쨌든 가능은 합니다. 단 파이프를 이어야 하므로 공사가 상당히 난관이겠지요.”
공사가 난관이라는 건 곧 돈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끄응… 얼마나 나오겠소?”
“글쎄요, 거리가 만만치 않군요. 그리고 최소한으로 잡아도 1년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갈리스토 주의 예약이 많이 밀렸거든요.”
“나는 지금 즉시 시공을 원하오. 얼마면 되겠소?”
“어… 잠시 과장님과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자이움엔 이런 식으로 바그란과 관계를 트는 귀족이 아주 많았다.
귀부인들은 바그란산 음식문화에 푹 빠져 있었고 이를 황궁에 유행시키기까지 했다.
바라크 황제는 이 문화를 탐탁치 않아 했지만 언제든 빠르게 온수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그게 사실인가? 꼭지를 돌리면 바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온다고?”
“예, 폐하. 로제론의 시민들은 겨울 초입부터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는 게 일상이랍니다.”
“허어…….”
일개 평민들이 그런 혜택을 누리기 전에 황제에게 뭐라도 좀 귀띔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바라크 황제는 자신과 레오볼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머쓱해했다.
그리고 섬뜩한 무언가를 느꼈다.
‘애초에 레오볼드의 목적이 이것이었던가?’
여러 경로로 제국의 내부에 침투해 차츰차츰 영향력을 넓혀서 마침내 흡수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전쟁이야 판그랄 대공의 사례에서 보았듯 불가능했고 물자를 틀어막는 것도 자이움의 손해라는 게 드러났다.
남은 수단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알테마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가.’
그는 얼마 전 그녀의 사신이 가져온 친서를 떠올렸다.
신하로 들어온다면 받아들여주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당시엔 코웃음을 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그란도 지갈레온이라는 드래곤을 수호룡으로 받들고 있지 않은가?
자이움이 최강의 골드 드래곤과 손을 잡는다 해서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숙이고 들어가되 대외적으로는 동등한 협력 관계라고 공표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그는 그런 내용을 담은 친서를 알테마에게 보냈다.
얼마 후 그녀의 서신이 도착했다.
―와서 무릎을 꿇어라.
참으로 치욕적인 내용이었지만 대외적으로 노출되지만 않는다면 바라크 황제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그가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는 레오볼드라는 인간이지 드래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도 제롬에서 비밀리에 비행선 한 척이 그람 왕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일한 시기, 엘브랑데에서도 비행선 한 척이 그람 왕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시비리 위성이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