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86
285화 새로운 육체
최근에는 인간과 엘프가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전통의 앙숙은 드래곤과 엘프였다.
전자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면 후자는 그런 것도 없었다.
드래곤은 엘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고 엘프는 신들을 내세워 저항했다.
그런 역사가 있다 보니 둘이 한자리에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사실 그것보단 드래곤이 멸종되어 일말의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새로이 나타난 위협적인 존재가 둘을 한자리에 앉게 했다.
실제로 만난 건 아니고 통신석을 통한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발가드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귀쟁이들의 왕이 먼저 협력을 요청한다고? 내일은 숲을 태울지도 모르겠군.”
“내 챔피언은 엘프를 잘 죽일 줄은 알아도 그들의 습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구나. 엘프들은 숲을 조성해 놓고 불태우길 즐긴다.”
“한둘이 그러는 거 아니오? 원래 귀쟁이들이 정신이 좀 나간 경향이 있지만.”
“정기적으로 숲에서 불이 나는 걸 보면 화전 같은 걸 하는지도 모르지.”
정글의 침투에 맞서서 도시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불을 놓는 거지만 둘은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알테마는 홀 구석에 띄워 놓은 이매진 레코드에 시선을 가져갔다.
거기엔 레오볼드의 전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무튼 드리즈덴이 연락한 건 그만큼 저놈이 강적이라는 의미이겠지. 아니면 나를 앞세워서 피해를 줄이고 싶은 것이거나.”
“대화할 거요?”
“어느 쪽이건 상관없으니 이야기나 들어보자꾸나.”
“골드 드래곤이 피를 보지 않고 엘프와 만난다라… 이번 생애엔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알테마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 제국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결정했느냐?”
“…….”
바라크 황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 홀에 들어올 때부터 그의 시선은 알테마에게 향해 있었다.
성녀 베로니카의 것이 분명한 육체는 온통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선명한 은색이었는데 흡사 장인이 빚은 최상의 세공품을 연상시켰다.
인간이 아닌 듯한 그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바라크 황제는 눈을 빼앗겼다.
발가드가 비웃듯 말했다.
“금방이라도 침대에 눕히고 싶은 얼굴이로군.”
실제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바라크 황제는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고 알테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를 가지고 싶으냐?”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습니까?”
“네 작은 나라를 그람 제국과 같이 강대하게 만들어서 내게 바쳐라. 그러면 나를 가지는 것을 허락해 주지.”
이는 명백히 자이움을 얕보는 발언이었다.
엄연한 여러 국가를 거느린 제국이건만 왕국이라니.
“실례지만 본국은 엘브랑데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인구는 오히려 능가하며 수만 명의 귀족이 충성을…….”
“하찮구나. 그래 봐야 엘브랑데에 밀리는 2류 국가 아니냐?”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자이움은 그람 제국의 부산물에 불과할뿐더러 네가 그걸 온당히 이었다고도 할 수 없어. 방계인 네게 정녕 황제의 자격이 있느냐?”
“…….”
솔직히 말하면 바라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건 카이로스 사태 때문에 황족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운 좋은 황제라는 비웃음 섞인 시선에 치를 떨고 있던 그에겐 견딜 수 없는 모멸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어쩌면 여기에 온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군요.”
“내게 충성을 바쳐라. 네 작은 나라를 전성기의 그람 제국 못지않게 만들어 주마.”
바라크 황제는 그녀가 내민 손을 보며 번민했다.
비행선을 타고 여기에 올 때까진 그녀와 손을 잡으리라 거듭 다짐했지만 이렇듯 처참한 대우를 받게 되니 마음이 흔들렸다.
‘상전 대우는 각오했지만 나를 깔개로 쓰겠다는 태도는… 이게 정말 맞는 건가?’
하지만 레오볼드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이 더 강했다.
그리고 상대가 대전쟁의 주역인 알테마라는 것도 그의 반발심을 억눌렀다.
알테마는 보통의 드래곤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존재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 증거로 악마들의 코어를 기대하마. 단 하나라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코어는 왜…….”
“벌써부터 내게 충성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냐?”
“아, 아닙니다…….”
“됐다, 나가 보거라.”
손등에 키스라도 허락할 줄 알았던 바라크 황제는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안 나가고 뭐 하냐고 묻는 듯한 발가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주 푹 빠졌군.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레오볼드 그놈이 저런 태도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 꿈 깨시는 게 좋겠소.”
“후후, 두고 보면 알겠지. 통신구를 가져오거라.”
엘브랑데에서 온 통신구에 황금색 손이 얹혔다.
드리즈덴의 회한 어린 목소리가 그녀에게 전해졌다.
“알테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누구였지? 200년 전에도 내가 이름을 알 만한 자였던가?”
200년 전이면 드리즈덴도 평범한 애송이 엘프에 불과했다.
알테마는 그를 놀리려는 것이다.
“신경전은 그만둡시다. 지금 중요한 건 레오볼드 반다스 그 작자이니까. 설마 그걸 부정하진 않으리라 믿소.”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레오볼드의 죽음이 확인될 때까지의 전반적인 협력을 원하오.”
“과연… 엘프에게도 그 강함은 눈엣가시였던 모양이지?”
“알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영혼을 과거로 보내는 방법까지 써서 그를 죽이려 했소. 하지만 실패했지.”
알테마는 후후, 하고 다리를 꼬았다.
“델피나라는 섀도우 엘프가 그러더구나. 그에 적대하면 안 된다고.”
“델피나를 확보했나 보군. 대체 뭘 봤는지 확인해 줄 수 있겠소?”
“그건 너희 엘프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뭘 준비하면 되는지 말하시오.”
“엘브랑데에 섀도우 엘프들이 있다고 들었다. 전부 내게 넘겨라.”
“그 쓸모도 없는 종족을 뭐 하러?”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과거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다. 쓰레기라도 만 단위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건 에테르 하트를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평범한 아인종에겐 불가능하지만 긴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 그것도 최초의 골드 드래곤이라면 뭔가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드리즈덴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무서운 수단을 쓰려 하시는군…….”
“대전쟁 당시에 아스테라의 인구가 얼마로 줄어들었는지 아느냐? 거기에 비하면 섀도우 엘프의 희생은 약소한 것이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 뭐 좋소. 어차피 섀도우 엘프란 쓰레기 종족이니까. 이번 기회에 치울 수 있으니 딱 좋군.”
“그리고 이번에 악마들과 싸우면서 얻은 코어가 있을 것이다. 그 절반을 원한다.”
“악마의 코어는 우리에게도 중요하오. 100개 이상은 제공하기 어렵겠소.”
“100개? 아쉬운 숫자이나 그걸로 만족하도록 하지.”
“그런데 그걸로 뭘 할 작정이오?”
“새로운 육체를 만들 것이다.”
알테마는 자신의 몸을 살짝 어루만졌다.
“성녀의 육체는 자이움의 왕을 유혹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너무도 연약하구나. 보다 강한 육체가 필요해.”
그녀가 빌리고 있는 베로니카의 몸이 황금색으로 물든 것도 드래곤 하트를 버티지 못한 부작용이다.
장식용으로는 요긴할지 모르나 본격적인 전투에 써먹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의 알테마는 레오볼드는커녕 알비온에 탄 발가드에게 이길지도 의문이었다.
“이걸 말해 준다는 건 이미 약점을 보완할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겠군.”
“약점이라고 할 수도 없지. 나를 만나려면 신성기사단과 더 강해진 발가드를 상대해야 하니 말이다.”
글쎄…….
알테마 본인이라면 모를까 신성기사단과 챔피언 정도로는 엘브랑데를 막을 수 없었다.
드리즈덴이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알테마의 진짜 힘이었다.
대전쟁 당시의 그녀는 배신으로 인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절규하며 죽어갔다.
부활한 이후에 곧장 그람 왕국으로 쳐들어와 그람이란 성을 가진 자들을 모조리 죽인 걸 보면 원한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아무튼 드리즈덴은 당분간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잘 길들여진 그리폰이라도 괴롭히면 문다는 건 상식이다.
“내가 레오볼드에게 붙는다면 어떻게 처신할 거요?”
“상관없다. 라사만 소환할 수 있다면 엘프건 레오볼드 그놈이건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방법이 참으로 궁금했지만 알테마는 입을 열진 않았다.
“부디 그 창이 레오볼드에게 향하길 바라겠소. 우리가 싸운다면 기뻐 날뛸 놈이니.”
“그래서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지?”
“먼저 이미르 공화국을 치겠소.”
“그 난쟁이들은 그런대로 쓸모가 있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상관없소. 레오볼드도 이미르 공화국이 무너지는 걸 원하니까.”
“왜지?”
“그곳이 무너지면 드워프들이 어디로 가겠소? 바그란밖에 없으니 지원도 시원찮을 수밖에.”
“하여튼 너희 필멸자 놈들은 너무 잔머리를 굴린다니까.”
“칭찬으로 듣지. 아무튼 우리는 본격적으로 바그란과 전쟁을 시작할 거요. 레오볼드는 그쪽에서 맡길 바라겠소.”
“단 죽이지는 않을 거야.”
“설마 적당히 패배시키고 부하로 삼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 안 되오.”
“절대 배반하지 못한다면 죽는 것과 별다를 바 없다.”
단호한 목소리에서 드리즈덴은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눈치 챘다.
‘왜지? 육체적 이끌림은 아닐 것이고 바그란의 발전에 눈이 돌아갔나?’
그러고 보면 알테마는 드래곤 중에서 에테르 공학에 열중하는 편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값비싼 보석과 금은으로 레어를 장식하는 것을 선호한 반면 그녀는 비행선이나 골리앗 등에 관심을 보였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하이페리온호가 건조된 것도 그녀의 입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것 때문에 레오볼드를 살려두려 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거요.’
안 그래도 엘브랑데 내에선 이번 악마 사태가 일종의 경고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레오볼드가 문제라는 것이다.
―에테르 기관을 포함해서 블랙 나이트를 만든 부작용이 이제야 나타나고 있다.
―언제쯤 자신의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텐지…….
―이 이상 그자의 오만함을 방치해선 안 된다. 우리가 나서서 아스테라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
실제 레오볼드가 원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가문을 포함한 엘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사실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니 레오볼드 네놈은 죽어야 한다. 다음엔 알테마 너다.’
수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쓸 것이 많았지만 얼마나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2차 대전쟁이 시작되면 그의 본색을 하나씩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알테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고 레오볼드는 처음부터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 * *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는군. 코어라…….”
“알테마가 코어를 모으는 건 아마도 육체를 만들기 위함일 겁니다.”
“그걸로 만들어 봐야 루시아잖아?”
레오볼드는 홀로그램의 루시아를 가리켰다.
그녀는 부하들을 내보내 마레 표면의 에테르 파장과 흐름을 조사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마레의 마왕들은 꽤 고무적인 분위기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심했는데 이제 아스테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말이다.
정작 아스테라로 와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겠지만 말릴 필요까진 없었다.
어쨌든 루시아의 육체는 리빙메탈로 이뤄져 있었는데 하반신은 거미, 상반신의 여성의 그것이었다.
그로테스크한 하반신을 제외하면 상반신은 레오볼드가 보기에도 꽤 예쁘고 날씬한 편에 속했다.
상반신의 길이가 5미터에 이른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육체가 마음에 안 드나?”
“현재 알테마는 성녀 베로니카의 육체를 빌려 쓰고 있는데 피부색이 황금색으로 변했습니다. 아마 드래곤 하트의 출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 같네요.”
“리빙메탈이라… 단단하긴 하지만 무적은 아닌데 말이야.”
하지만 리빙메탈 정도로 친 에테르적이고 복원이 손쉬운 금속은 없었다.
좀 부서져도 실시간으로 주변의 금속을 침식시켜 복구할 수 있으니 육체로 쓰기엔 최적이었다.
아다만티움은 더 단단하지만 가공이 어렵고 리빙메탈보다도 희소하다.
아무튼 알테마와 자이움, 엘브랑데가 한데 모여 레오볼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구체적인 수단까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엘브랑데가 대전쟁을 일으켜 바그란의 발을 묶고 알테마가 직접 레오볼드를 상대한다는 계획인 것 같았다.
“엘브랑데의 수단으로는 전염병과 미티어 스트라이크, 부유대륙 낙하 등이 있습니다. 어쩌면 자치령을 완전히 해방해서 곤란하게 할 수도 있고요.”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지.”
다만 이런 수단도 있다는 거지 당장 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진 않았다.
엘브랑데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이미르 공화국 침공이기 때문이다.
공격 직전에 악마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곧 다시 시작할 것 같았다.
레오볼드는 아르마가 준비해 놓은 도주로와 임시정부 수립 계획 등을 살펴봤다.
“수뇌부에서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리는 편이 나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도 무쇠평의회에선 도저히 상대가 안 되니 적당히 대응하다가 도망가자는 안건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래도 현실을 직시할 줄 아니 다행이군. 텔레포트를 공개해도 되니까 적당히 도와줘.”
엘프들이 엘드그라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면 텔레포트도 곧 쓰일 것이다.
이는 아스테라 전체가 대전쟁 당시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엘프들은 나름 대전쟁의 승리자라는 자신감에 차 있는 모양이지만 레오볼드야말로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 전쟁에는 이 육체를 쓸 일이 없겠지.”
그는 어느덧 완성되고 있는 새로운 육체를 바라봤다.
남자의 외모는 인류연합의 유지하와 한국인 유지하를 절반쯤 섞어놓은 것 같았다.
키는 195cm이며 상당한 근육질로 신체 스펙은 인간을 한참 초월한 괴물이었다.
원래 유지하도 인간이라고 부르기엔 좀 그랬지만 이 육체의 경우는 아예 그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맨손으로 톤 단위의 물체를 집어던질 수 있고 내구력은 어지간한 폭발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다.
시력과 청력, 신경계 등 감각이 크게 강화되었고 완전한 에테르 하트를 가져 에테르 오리진과 동기화하여 그 힘을 완벽하게 빌릴 수 있었다.
수명은 약 300년으로 이는 엘프의 텔로미어 복제 연구가 적용된 결과물이었다.
안티에이징 시술과 결합하면 거의 250년 이상을 늙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영혼교환기가 있으므로 레오볼드는 큰 관련이 없지만 일반인의 수명까지 그렇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아르마가 스펙 시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 육체로 갈아타시면 아스테라인과의 혼혈도 가능합니다.”
지금도 가능하지만 카밀라가 진짜 육체와 맺어지길 바랐다.
사실 바그란의 국왕이 아름다운 아내를 둘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후사를 낳지 않는다는 건 심각한 직무 유기에 해당했다.
왕궁의 관료들 사이에선 레오볼드 쪽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나 심도 있는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나중에 황제가 되면 소문은 더 심해지겠지만 레오볼드의 입장에선 차라리 헛소문이 도는 게 나았다.
“많이 낳는 걸 장려하면서 정작 본인은 애를 안 낳고 있으면 좀 그렇긴 해.”
현재 바그란은 국가 발전 계획 중 강력한 인구 증가 정책을 채용한 상태였다.
정책에 의하면 아이를 많이 낳는 가정은 생필품과 식량 등의 쿠폰이 주어지며 절세까지 가능했다.
이런 유인책을 쓰는 것은 대륙 전체가 제국으로 묶이는 만큼 산아 제한 등을 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세가 주춤하기라도 하면 어디서 이민자를 들일 수도 없기 때문에 초반부터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바그란의 인구 증가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승세에 있었다.
인구를 받쳐 줄 비료 공급 계획도 추진되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레오볼드가 새로운 타이탄에 시선을 가져가자 아르마가 보고를 시작했다.
“이 타이탄은 에테르 오리진을 탑재할 예정이며 마스터의 에테르 하트와 동기화됩니다. 그 위력은 명왕성 주역에 나타난 플레이그 군단을 단독으로 섬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메가 원까지 합쳐서 그렇게 박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스테라의 수준엔 맞지 않는 전투력이었고 레오볼드도 이런 걸 꼭 만들어야 하나 고민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플레이그 퀸이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이상 대비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힘을 가지고 나타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닫혀 있는 에테르 우주를 뚫어 루시아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그 여파만으로 게이트를 여는 걸 보면 예전보다 강해진 게 확실했다.
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하여튼 레오볼드의 새로운 육체와 타이탄은 빈틈 없이 준비되고 있었다.
부유대륙의 기지와 완성 단계에 이른 우주 플랫폼까지 합하면 알테마나 드리즈덴의 음모 따윈 귀엽게 느껴질 것이다.
* * *
1040년 봄이 되자 엘브랑데의 움직임이 한산해졌다.
당연하지만 이게 평화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고 전쟁 전의 고요함 쪽에 가까웠다.
엘브랑데군은 완전한 재편성을 겪었고 이는 원정을 나가기에 적합했다.
수백 대의 비행선이 새로 건조되었고 개량 벨리알급은 천 단위로 양산되었을 정도니 엘브랑데군의 규모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엘드그라실의 무한의 회로를 이용한 신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엘븐 판테온이 하나둘씩 태어나며 엘프들의 힘과 의지를 북돋았다.
그만큼 엘드그라실은 고통스러워했고 예전보다 비쩍 마른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드리즈덴의 전쟁 준비는 멈추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레오볼드와 바그란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5천만 엘프들은 그에게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미르 공화국 공격이었다.
이 난쟁이들은 가증스럽게도 바그란과 손을 잡고 교류를 지속해 오고 있었다.
인력을 파견하고 희귀 자원을 저렴한 가격에 수출하는 대신 신형 에테르 기관 등을 제공받은 것이다.
이는 명백히 아스테라의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였다.
엘브랑데는 총통부 명의로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드워프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바그란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신형 골리앗을 자랑하며 엘프들을 조롱하기 바빴다.
―기다리다 지쳤다, 귀쟁이들아!
―우린 네놈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공격할 거면 이상한 명분 대지 말고 바로 들어와라.
인구 5천만의 제국과 100만밖에 안 되는 공화국의 전쟁이란 누가 봐도 뻔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멸망을 각오한 듯이 맹렬한 전의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이움에선 형식적인 중재에 나섰지만 양측에 무시당하곤 입을 다물었다.
엘프는 자이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고 드워프는 바그란만도 못한 지원을 보낸 자이움에 크게 실망했다.
―뭐야, 골리앗 몇 대가 전부야?
―나중에 생색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안 받는 게 낫다. 당신들은 돌아가도 좋소.
그렇게 자이움이 지원 병력이 돌아가자 남은 것은 바그란에서 보낸 병력뿐이었다.
이 병력도 대단치는 않은 수준이었지만 드워프들은 그들의 약속을 믿었다.
―바그란 정부에서 안전한 퇴로와 임시정부 설립을 보장했다! 하지만 엘프와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갈 수는 없지!
수백 대의 골리앗이 출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엘브랑데군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고 자치령 의용군이 일제히 국경선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