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70
에필로그 (13)
“이 집 세탁기 좋네.”
아침 일찍 애기 이불과 수건, 옷을 빨고 햇빛이 잘 드는 거실에 걸어 놓았다. 세워 두는 건조대는 없어서 빈이 새 수건과 옷을 사면서 같이 구매했다. 돈 정말 팍팍 나가는구나. 먼지는 건조기로 털어야지.
뉴스나 기사에서는 어제 납치범들을 잡은 F급 헌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각성자 관리실에서 장애인 각성자 납치범들을 어젯밤 일망타진했으며 자세한 조사 중에 있다는 정도로만 나왔다. 다만 각관실과 헌터 정보 사이트에서는 나를 찾는 글이 올라와 있긴 했었다.
‘화염 스킬과 창을 쓰는 20대 초중반의 중급 헌터 남성,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음.’
나에 대한 정보는 이러했다. CCTV와 블랙박스는 없었으니까 납치범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일 터였다.
‘흑염도 없고 창이 변하는 것도 없고. 송 실장님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했고.’
일부러 흑염을 써봤건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웬만해선 내가 한유진이라는 사실을 들킬 리 없겠구만.
‘예전 시그마와 비슷한 상태인 걸까.’
그때도 시그마의 외모는 그대로에 스킬도 그대로였지만 몇 년을 같이 싸운 부하들도 알아보지 못했었지. 만약 죽은 한유진의 인지도를 넘기지 못한 채 들킨다면 시그마처럼 공격당하려나. 그건 곤란한데.
‘역시 유현이는 진짜 조심해야겠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정면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 거 같지만 말이야. 애들 살짝 보고 오고 싶지만 유현이가 근처에 있겠지. 유현이 던전 들어갈 때 가서 기웃거려 볼까. 아무튼 동생만 잘 피하면 맘 편하게 움직여도 되겠다 싶었다.
– 삐약!
“아우, 꺄르륵!”
어디선가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모루 같은 걸 물고 와 둥실둥실 날아다니는 삐약이를 향해 빈이가 손을 뻗으며 까르르 웃었다. 71번이 있긴 해도 또 두고 나가려니 미안해졌다. 아직은 여느 아기들보다도 잠이 더 많아 깨어 있는 시간이 훨씬 적고 기지도 못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터였다. 걸음마 시작하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래야 나도 애 옆에 붙어 있지.
빈이를 아기 침대에 눕히고 71번을 불렀다. 이번에는 송 실장님이었다. 송 실장님과 아기라니, 언제 봐도 어울리지 않은 듯 찰떡같다니까.
“음… 아기 한번 안아 보시겠어요?”
“네, 주인님.”
저 호칭 진짜 못 고치나. 71번을 지금처럼 바꾸는 것만으로도 장악력이 모자라서…. 송 실장님의 외모를 한 71번이 빈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아기가 더 조그맣게 보이네. 뭐랄까, 흐뭇한 모습이었다. 역시 송 실장님이 애들 선생님 해주셔야 하는데, 어떻게 안 되나. 사진 찍고 싶었지만 자칫 남들이 봤다간 송 실장님이 곤란해지실 테니까 참았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빈아, 삐약아 아빠 열심히 일하고 올게.
* * *
아직 헌톡은 나오기 전이라 공략팀 모집 사이트를 열심히 뒤졌다. 헌톡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투자 듬뿍 해주고 이름 알리기…엔 돈이 없구나. C급까진 아니어도 D급 던전은 가고 싶었는데 경력 없는 F급을 받아 주는 팀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결국 E급 던전 중에서 돈 되는 곳을 찾아 쪽지를 보냈다. 오늘 점심 출발에 보조 공격계 인원을 구하는 거라 답장은 이내 왔다.
[고구마순: 죄송하지만 무경력 F급은 안 됩니다.]그래도 친절하네. 등급 안 되는 신청에는 대뜸 욕부터 보내는 사람도 많은데.
[사이트 오늘 가입해서 기록이 없는 거고 아는 길드 공략은 몇 번 따라갔어요. 장비도 D급입니다. D급 마석으로 인증 가능합니다.]장비 인증이 가장 확실하지만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것인 만큼 남에게 쉽게 쥐여 줄 순 없었다. 하급 등급 증명 가지고 계약서를 쓰긴 아깝고, 대신 마석이나 기타 양산형 아이템을 교환 식으로 건네며 공략 가능 등급을 확인하곤 했다. 속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D급 마석이면 무경력 하급 헌터가 손에 넣긴 힘드니까.
다행히 고구마순 씨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모임 장소를 알려 주었다. 점심으로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에너지 바 하나를 먹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F~E급 던전은 보통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간단히 식사를 하는 편이었다. 냄새가 많이 나는 음식을 먹거나 과식해서야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짜가 아니고선 길어도 다섯 시간 이하로 공략 가능해 몸을 가볍게 하고 들어가 공략 후에 든든히 먹곤 했다.
‘오랜만이네.’
낯선 사람들과 섞여 던전에 들어가는 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승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옆구리에 ‘고구마농장’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팀 이름인가.
“안녕하세요~ 한유진입니다~.”
차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네 명. F급 하나 E급 셋. E급 하나는 공격계, E급 하나와 F급은 방어계, 마지막 E급은 보조계였다. 하급 팀에 힐러가 있는 경우는 드무니 밸런스 괜찮네. E급 방어계 헌터가 내 인사를 받아 주며 두 손을 내밀었다.
“김시영입니다.”
나 역시 두 손을 내밀었다. 한 손에는 D급 마석이 들려 있었다. 다른 헌터 하나가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촬영을 한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의 마석을 교환했다. 김시영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력은 확실히 아니네요.”
“이래 봬도 꽤 굴렀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던전 공략을 한다 싶으니 키워드를 적용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이젠 키워드가 없는데도 오랜 습관이다 보니 말이야. 애들과 같이 다닐 땐 안 그랬는데, 옛날로 돌아간 거 같구만.
“박혜령이에요. 저도 창이 주 무기고요.”
공격계 헌터가 자기소개를 하고 박세령, 정지훈도 인사를 건네 왔다. 저 둘은 자매인가. 부모님 반대가 컸을 거 같은데. 이어 분배 조건에 더해 서로의 포지션과 스킬을 확인했다.
“D급 공격 스킬 강력한 찌르기를 주로 사용합니다.”
능력치는 어느 정도 감추는 게 보통이지만 같이 공략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수밖에 없는 류는 미리 말하고 맞춰 보고 들어간다. D급 공격 스킬이라는 말에 다들 반가워했다.
“그 정도면 E급은 나오지 않아요?”
“그냥 F급으로 시작하고 싶어서 감췄어요.”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박혜령 씨가 내 이어링을 쳐다보았다. …왜 이 이어링은 인식 방해 안 붙고 다들 알아보는 거지. 너무 흔한 생김새라서인가.
“한유진 소장님 팬이시구나. 그렇죠?”
“어…….”
“그러고 보니 이름도 같네요? 등급이야 올리면 그만이니 저 같아도 F급 받아 보고 싶었을 거예요~.”
저도 소장님 좋아해요, 하며 혜령 씨가 내 등을 팍팍 쳤다. 저 스탯은 F라 좀 아픕니다만. 피스 정말 귀엽지 않느냐며 키링도 보여 준다. 음, 귀엽네.
“피스야 당연히 귀엽죠.”
“어제 도담에서 올려 준 동영상 보셨어요?”
“…네? 동영상이요?”
그런 게 있었냐! 혜령 씨가 곧장 폰을 켜 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냥 사육장을 지나가는 피스 모습일 뿐이었지만 무척 반가웠다. 우리 피스, 잘 지내고 있구나!
“뭐 해, 빨리 타.”
휴대폰을 붙잡고 떠들어대는 혜령 씨 다리를 세령 씨가 발로 툭 치며 차에 먼저 올랐다. 우리도 얼른 차에 탔다. 물론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요, 사육소 직원 SNS인데 허가받은 사진과 영상을 올려 주거든요? 근데 실력이 엄청 좋아요.”
“그러네요, 진짜 잘 찍었어요.”
우리 애들이 같이 찍힌 사진은 없나. 앗, 예림이다! 마르랑 같이 찍혔구나! 마르도 그새 더 컸네. 혜령 씨로부터 내가 찾아보지 못했었던 그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휴대폰과 파손 위험이 있는 물건은 여기 넣고요.”
보관함이 없는 던전인지 휴대폰 등은 차에 두고 내렸다. 하급 던전은 시설이 미비한 경우도 흔하지.
“여긴 그리 위험하진 않은 던전입니다. 대신 마석이나 기타 부산물의 수확도 적은 편이죠.”
앞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며 김시영 씨가 설명했다. 게이트 앞에서 곧장 몬스터와 마주칠 수도 있으니 방어계가 스킬을 사용하며 앞장선다. 정석이었다.
“주로 나오는 몬스터는 절벽을 타고 다니는 깡총도마뱀 E급으로 별다른 공격 스킬은 없지만 갑자기 튀어 오르는 걸 조심하십시오. 이따금 F급 노랑이끼박쥐 무리가 튀어나옵니다. F급이지만 비행형인 만큼 적당히 쫓아내고 지나치는 게 편합니다.”
공격계가 둘 다 근거리니까 말이지. 던전 내 환경은 높게 치솟은 너른 계곡이었다. 천장이 굽어진 암벽과 무성한 나무로 막혀 있어 넓은 동굴처럼도 느껴졌다. 벽에 붙은 노란색 이끼가 반짝반짝 빛을 퍼뜨려 어둡지는 않았다.
– 끄르륵.
얼마 가지 않아 납작한 도마뱀들이 하나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형견 정도의 크기에 속도도 느린 편이다. 이빨은 날카롭지만 독도 없고, 간신히 E급에 턱걸이한 수준의 몬스터였다.
“시영 언니가 선두 중앙에, 우리는 양옆에 서면 돼요~.”
가운데에는 보조계인 세령 씨가, 가장 뒤에는 방어계인 지훈 씨가 자리했다. 혜령 씨가 능숙하게 도마뱀 머리를 창으로 찔러 즉사시켰다. 나 또한 창을 꺼내 두었다. 미리 평범한 검은색 창 모양으로 변형시켜 둔 신살창이었다.
“창 멋지네요! 무기 등급 높아 보여요!”
“그쵸? 저도 멋지다고 생각해요.”
혜령 씨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네. 수수하게 바꿔도 원본이 워낙 잘났다 보니 티가 난단 말이야. 그때 도마뱀 한 마리가 꼬리를 바싹 펼쳤다. 꼬리 끝의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그 반대쪽 허공을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텅!
굵직한 꼬리가 바닥을 강하게 두들기고 도마뱀이 튀어 오른다. 그 직후.
콰득-
마치 스스로 창끝에 몸을 던진 것처럼 도마뱀이 꿰뚫렸다.
“방금 어떻게 된 거예요?”
“뛰기 전 꼬리가 팽팽하게 펼쳐지잖아요. 그때 꼬리 끝이 미세하게 틀어지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뛰어올라요.”
“여기 많이 와보셨어요?”
다른 헌터한테 들은 거라며 적당히 변명했다.
공략은 수월했다. 귀찮은 박쥐 떼도 나타나지 않고 위험한 순간도 없었다. 다만 역시나 수확은 적었다. 보자,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잠깐만 멈춰 보세요.”
내 말에 팀원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에 말라붙은 붉은 꽃들이 흩어져 있다. 열매를 맺고 떨어진 꽃들. 고개를 꺾어 까마득한 계곡 위쪽을 바라보았다. 저 덤불 안쪽이구만.
“부수입이 좀 있으니까 아래에서 받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곤 절벽에 발을 디뎠다. 살쾡이 신발 참 유용하긴 유용하단 말이야.
“아이템이에요, 아이템.”
장비 말고 아이템. 괜찮은 사람들이지만 혹 모르니까 소모용 템이라고 말해 두고 절벽을 걸어 올라갔다. 직각을 넘어서 구부러지다시피 한 암벽을 딛고 서서 창대를 내밀어 덤불을 뒤졌다. 역시 있다.
“한 알에 이백만 원짜립니다! 깨지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내 외침에 아래쪽에서 급히 무기를 넣고 겉옷이나 수건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다만 박세령 씨는 창을 쥐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사하게 오래갈 만한 팀이지 싶었다.
덤불을 헤집고 그 안쪽에 자라난 풀에 달린 작은 열매들을 창끝으로 가지째 잘라 떨어뜨렸다. 푸른색 열매들이 아래로 후두둑 떨어진다. 해독 포션의 재료 중 하나로 하급 던전에도 가끔 자생하지만 이렇게 다른 식물 사이에 숨겨져 자라기에 찾긴 쉽지 않았다. E급 던전산이라 양은 적었지만 그래도 스무 알은 넘어 보였다.
“여기 이 꽃 보이시죠? 이게 말라 떨어져 있으면 익은 열매가 근처에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아래로 내려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 던전에는 자주 나타나니까 새 장비 마련할 만큼 버시고 나서 정보를 퍼뜨려 달라고. 아이템 안 써도 E급 정도면 안전장비 챙겨서 암벽타기를 해도 된다.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부수입 톡톡히 챙기고 다시 공략을 진행했다. 일반 몬스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 퍼센트 이상 처리하고 계곡의 끝에서 버티고 있는 보스 몬스터 앞에 도착했다.
쏴아아아-!
계곡 위에서 굵은 물줄기가 햇빛과 뒤섞여 눈부시게 떨어져 내린다. 물웅덩이 근처 커다란 바위 위에 머리의 장식 깃털을 펼친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E급 보스 몬스터 왕관 파도꼬리새였다.
“비행형이라 원거리 공격수가 없으면 까다로운 보스예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김시영 씨가 설명했다.
“꼬리로 폭포수를 두들겨 물덩이를 날립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제대로 맞으면 나뒹굴게 될 거예요. 상대가 쓰러지면 날카로운 부리로 공격하죠. 제가 방패로 물덩이를 받고 쓰러지는 척을 할 겁니다. 꼬리새가 저를 노리고 덤벼들면 그때 공격하세요.”
공작새의 절반 크기쯤 되는 새가 머리를 바싹 치켜들고 주위를 살핀다. 덩치는 작아도 E급 보스인 만큼 힘은 만만찮겠지. 그런데 어째 하는 행동이……. 감각을 끌어올려 주위에 흐르는 마나를 살폈다. 물웅덩이의 얕은 쪽에서 이질적인 마나 덩어리가 느껴졌다. 이건.
“…날아오르지 않을 겁니다.”
“네?”
“물웅덩이 안에 알이 있어요. 유난히 경계하는 저 부근일 겁니다.”
김시영 씨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 좀 다르군요. 보통은 이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거든요.”
“알 주위를 떠나지 못하니 더 사납게 굴긴 하겠지만 잡기는 편하겠죠.”
짧은 작전 논의 후 시영 씨, 혜령 씨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 찌르르르륵!
꼬리새가 경고의 울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역시 바위 근처를 벗어나진 않았다. 탓, 방패를 앞으로 든 김시영이 먼저 뛰쳐나갔다. 알이 있는 곳을 향하는 강한 돌진에 꼬리새가 당황하면서도 부리를 치켜세웠다.
텅!
내리찍은 부리가 방패에 막혀 튕겨 나가고,
“지금!”
김시영의 뒤를 바싹 따라붙은 나와 박혜령이 양옆으로 몸을 빼내며 동시에 창을 내찔렀다. 콰득! 꼬리새의 날개와 목을 창날이 꿰뚫는다. 퍼득거리던 한쪽 날개가 이내 멈추었다.
“여기 알이 있어요!”
박혜령 씨가 첨벙, 물에 뛰어들며 말했다. 푸른빛 도는 하얀 알을 건져 가지고 온다.
“진짜 알이네.”
세령 씨도 신기한 듯 알을 살펴보았다. 혜령 씨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기분 좀 이상해지네요. 알은 어쩌죠. 몬스터 알은 부화도 안 된다던데. 도담에서 빼고요.”
“하지만 도담은 이런 하급 몬스터 알은 받아 주지 않을걸?”
“나도 알아. 상급 몬스터 전문이잖아. 삐약이가 있긴 하지만.”
물에 젖은 알이 반들거렸다. 곧 부화할 알이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럼 조금 이르게, 지금 깨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탁-
알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알을 함께 감싸 쥔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방금!”
“움직였어!”
다시금 탁, 탁. 작은 부리가 알껍데기를 두들긴다. 이윽고 금이 가고 부서지며 조그만 머리가 튀어나왔다.
– 삑!
“으악, 어떡해!”
“어쩌긴 뭘 어째! 그러니까, 따뜻하게 해줘야 하나?”
“물에 있었는데? 반대 아냐?”
“그럼 물을 부어?”
– 삑! 삑! 삑!
알 밖으로 완전히 나온 새끼 새가 젖은 날개를 펼치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배, 배고픈가?”
“마수 고기! 언니, 데리고 있어 봐봐!”
박혜령이 뛰어가 도마뱀 고기를 잘라 왔다. 여기서 서식하는 상위 몬스터의 새끼니까 도마뱀 고기가 주식일 가능성이 높겠지. 아니나 다를까 새끼 새는 고기를 잘도 받아먹었다.
“…우리가 키워야 하나? 새끼 몬스터는 성장시키기 힘들다던데.”
“하급은 아니에요. 먹이만 잘 주면 금방 자랄 겁니다. 먹이 구하기도 쉬울 듯하고요.”
D급까지 성장 가능한 몬스터로 밥만 잘 챙겨 먹으면 성장한다, 라고 느껴졌다.
“하급 몬스터 테이머는 국내에도 있고 새끼라 비용도 그리 비싸진 않을 테니까요. 한번 잘 키워 보세요.”
“저희가요? 얘 엄마를 제가 죽였는데…….”
“부모도 두 분이 데리고 가길 원할 거예요.”
리셋되는 던전이 아닌 바깥세상으로. 물론 하급 몬스터는 리셋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다. 하늘이 말로는 화염뿔사자 같은 최상급 개체들이나 던전의 이상을 느낀다고 하였다.
‘차라리 그편이 다행이겠지.’
모르는 게 약일 것이다. 모든 몬스터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한은. 설사 나간다 해도 리셋되면서 새롭게 생겨날 테니 던전이 존재하는 동안은 어쩌지 못하는 문제였다. 빈이가 성장해 근원의 힘을 다루게 된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시영 언니, 얘 우리가 키워도 될까?”
“마음대로 해. 잘 키우면 도움도 되겠지.”
그에 더해 세령 씨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듯하고 말이야. 최적화 스킬이 테이머나 몬스터 사육 계통인 거 같은데 그쪽 소질을 최적화 각성하긴 힘들다 보니 단순 보조계 스킬만 얻었다. 새끼 새를 키우다 보면 최적화 스킬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내 영향도 좀 받았을 테고.’
새 알도 그렇고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양육자 칭호의 효과가 약간은 발휘되는 듯했다. 나와 서로 친근감을 느낀 혜령 씨는 한동안 성장 속도도 확 늘어나지 싶었다. 안 들키게 조심해야지 이거 알려지면 탐낼 사람들이 한가득이겠는걸.
“유진 씨, 우리 회식할 건데 같이 가실래요?”
던전을 나와 짐을 챙기는데 시영 씨가 권유했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어서요. 봐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빨리 들어가 봐야 해요.”
“아이요? 결혼했어요?”
“결혼은 안 했지만… 애는 있습니다.”
다들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다보니 말입니다. 다음에도 공략을 같이 가고 싶다며, 팀에 들어올 생각이 있으시면 말하라면서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집에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였다.
‘운이 좋네.’
무작정 공략팀에 들어가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지. 내일 헌터 마켓 가서 마석과 열매 팔아야지. E급 마석은 몇 개 안 나왔고 품질도 별로라 이백 남짓이었지만 열매가 다섯 명이서 나눴음에도 팔백쯤 나오지 싶었다. 이 정도면 생활비 빼고도 방송 장비 살 수 있나.
‘…꼭 방송을 해야 할까.’
빈이가 더 크기 전에 돌아가긴 가야 하지만. 으으음.
[☆★☆매니저 박하율 등장!☆★☆]“헉!”
그때 돌연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내 눈 바로 앞으로 커다랗게, 반짝반짝거리면서. 흠칫 뒤로 물러서는 나를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박하율 이 자식이…….
[유진이 형의 귀염둥이랍니다!(* ̄3 ̄)╭♥]‘귀엽긴 개뿔이!’
야 이 자식아 시스템 관리자로서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눈앞에다 그렇게 들이대면 어쩌라고. 전투 중이었으면 헛손질해서 머리가 날아갔다.
‘…명우야, 그냥 네가 도와주면 안 되겠냐.’
벌써부터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붙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시스템 메시지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혀어어어어엉! 이 매니저를 봐주세요오오오~(>_<。)]“아 방송 안 한다고, 안 해!”
얼른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며 외쳤다.
[박하율 매니저는 무슨 일이든 도울 수 있답니다! 역시 폭탄 테러인가요! 여의도를 날리러 가는 건가요!]“미쳤냐!”
[미안해요, 허니! 이제 막 시스템 메시지 연결이 끝났는데 갑자기 뛰어들어서… 제대로 교육시킬게요!]하늘이의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가 나타나고 박하율이 조용해졌다. 어휴, 하늘아 부탁한다.
‘어쨌든 이제 시작이구나.’
자금도 그럭저럭 준비되었고, 본격적으로 집에 돌아갈 여정을 시작해야지.
* * *
“한유현, 봤어?!”
박예림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신발 벗을 시간도 아까워 그대로 비행 스킬을 쓰며 거실로 향했다.
“메시지! 명우 오빠가 보내온 메시지!”
조금 전 시스템 메시지가 오랜만에 나타났다. 유명우의 이름표를 달고서.
“아저씨 무사하대!”
한유진은 무사합니다. 저와 함께 있으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 짧은 메시지에 박예림의 가슴은 크게 뛰었다. 그동안 한유현을 보면서 한유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왔다. 그럼에도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었다.
“집에 오려고 하는 중이란다!”
하지만 유명우까지 한유진의 무사를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세계에 되돌아오지 않아 바깥세상의 존재로서 한유진을 인식 가능할 수 있는 시스템 관리자가.
“결이도 봤어요, 고모!”
한결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박예림을 맞이했다. 한별도 그 뒤를 쪼르르 따라 박예림을 향해 폴짝 뛰어올랐다.
“별이도 봤어!”
“내게도 왔어.”
한설도 고개를 끄덕였다. 셋 모두 메시지를 받았다. 피스가 끄웅, 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피스에게도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죽은 사람이 무사하며 돌아오려 한다는 소리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응, 현아 언니랑 소영 언니랑- 마지막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메시지 다 갔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던데 명우 오빠가 너희한테는 특별히 보내 줬나 봐!”
뒤늦게 신발을 벗어 신발장 쪽으로 휙휙 던지며 박예림이 한유현을 째려보았다.
“넌 왜 반응이 없냐?”
“나도 봤어.”
“그런데 왜 그래? 기쁜 티도 안 내고.”
한유현이 빨래를 마저 개며 대답했다.
“형이 이미 왔다고 느꼈으니까.”
“알 깨어났을 때 말이야? 그거 벌써 며칠 됐잖아. 하지만 아저씨는 감감무소식이고 명우 오빠 말론 아직 못 온 모양이던데 착각이었나 보지.”
“…….”
마지막 남은 빨랫감을 각 잡아 갠 한유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명우의 메시지는 한유진이 자신과 함께 있다고 하였다. 이 세계 밖에서. 하지만 한유현은 감각은 아니었다. 한유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아저씨가 너무 그리워서 그런 거야. 이해해, 이해해. 아저씨 빨리 왔음 좋겠다! 오래 걸리려나? 막 몇 년 걸리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오늘 저녁은 파티하자면서 박예림이 방방 뛰며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들도 뛰었다. 한유현은 묵묵히 미간을 좁혔다.
‘…형.’
이상했다. 그러나 한유진이 정말로 돌아왔다면 자신을 보러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곧장,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을 만나러 왔을 터인데. 박예림의 말대로 착각인 것일까. 한유현은 옅게 한숨을 내쉬며 정리한 빨랫감을 들고서 일어났다. 일순 조용해진 거실의 한쪽에 둥지가 있었다. 아직 어린 뱀이 잠들어 있는 옆을 지키던 벨라레가 문득 머리를 치켜들었다.
– 삐약.
– 시잇.
새하얀 새끼 새 한 마리가 벨라레에게 인사하듯 날갯짓했다. 그리곤 이내 다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