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308
307화 칼을 간 이유
‘…….’
공주가 박살 난 후, 레오볼드는 한동안 의식을 놓고 타이탄과 함께 부유대륙 상공을 떠돌아다녔다.
잔여 에테르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무시무시한 기상 현상을 일으켰다.
지금의 레오볼드는 아스테라 판테온 중 기상과 날씨를 다루는 신 그 이상의 권능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이렇게 둥둥 떠다니는 건 에테르의 여파가 버거워서가 아니었다.
‘아르마, 오메가 퀸이 이쪽을 보고 있지?’
「자세히는 아니겠지만 마스터의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관측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럼 조금 더 약한 척을 해야겠군.’
에테르를 차단해 시선을 가리는 것보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게 나은 판단이었다.
레오볼드는 한동안 부유대륙의 전경을 구경했다.
‘지금 보니 여기도 경치가 꽤 괜찮아. 온도가 조금만 더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에테르 오리진만 완성되면 온도를 유지하는 것쯤은 손쉽습니다.」
‘그놈의 에테르 오리진 이야기는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않겠어. 하여튼 기후 변화까지 조종할 수 있다 이거지? 지구는?’
「현재 지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므로 확답하기가 어렵네요.」
얼핏 듣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데이터가 나오진 않나 보다.
지구를 떠난 지 55년이 넘었으므로 환경은 더 박살이 났을 것이다.
물론 물질 우주와 에테르 우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지만 100% 확신은 금물이었다.
‘결국 가봐야 안단 말이지…….’
레오볼드는 한동안 하늘을 떠다니다가 작은 게이트를 열어 제롬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르마의 도움 없이도 게이트를 열고 유지하는 게 쉬워졌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리고 게이트가 커질수록 에테르의 정밀한 제어가 필요하지만 이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게이트가 보편화되면 교통수단은 싹 사라지겠군.’
「다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에테르가 막대하게 소모돼서,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교통수단을 대체하기는 어려워요.」
엘브랑데와의 전쟁이 끝나고 유민들을 받아들였던 사례가 그것이다.
당시 유민들은 놀라워한 걸로 끝이었지만 사실 상당히 버거운 작업이었다.
세틀러호의 에테르 융합로를 처음으로 최대출력으로 가동했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에테르 방출을 차폐하느라 아르마는 엄청난 공을 들였다.
덕분에 드워프 100만 명과 물자, 설비를 순식간에 이동시킬 수 있었지만 융합로를 수리하느라 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이 게이트는 유용하지만 모든 개인에게 적용하기는 곤란해. 역시 언더시티에 스마트 모빌리티를 깔아놓고 보조적인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참 게이트를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던 레오볼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건 그가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대략적인 로드맵과 방향성은 그가 정해야겠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밑의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
언제까지 아르마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놈들부터 족쳐야겠지.’
이번 사건과 루시아를 통해 계속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으니 이제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레오볼드는 예전에 비해서는 강해졌다. 하지만 군단타격함대를 버리고 오느라 전력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 틈을 노린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정말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가능했다.
지금 그녀는 부리나케 소환진을 수리하고 부하들의 영혼을 부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공주가 패배한 것보다는 내가 허덕였다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으로 하여금 오판하게 만드는 것이다.
레오볼드는 오메가 퀸보다 몇 년 앞서 이 행성에 왔고 많은 준비를 했음에도 상당 부분 감추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링 월드와 본체를 소환하는 순간, 승리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역전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냐.’
링 월드를 어디까지 지배하고 있는가가 문제였다.
아르마가 레오볼드의 기억을 통해 분석한 바로는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링 월드라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했기에 방심은 할 수 없었다.
‘동력원도 없고 일부 구조물이 떨어져나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다.’
어쩌면 링 월드 자체가 선지자의 유산이기에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선지자의 진정한 후계자는 그녀가 아니라 레오볼드였으므로.
‘진정한 후계자가 너라고 했지? 지금부터 그걸 증명해 봐라.’
전쟁은 시작되었고 이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그리고 결말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 *
레오볼드가 전쟁을 선포했지만 막상 인류제국에 대단한 변화가 찾아오진 않았다.
이는 목표가 오메가 퀸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둥지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게 칼을 갈다가 일격에 제압해야 하므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오메가 퀸이나 공주는 이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단 말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아스테라를 망가뜨리는 데 관심이 많겠죠. 마스터에게 절망을 심어주고 싶을 테니까요.”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강제로 빼앗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를 굴복시키기가 어렵다면 주변을 공략하는 방법이 차선책이다.
다만 공주 단독으로는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조만간 다른 부하들을 불러올 확률이 높았다.
“베헤모스급이 단체로 튀어나와서 깽판을 치면 나 혼자서 대응하긴 좀 그렇지. 우리 쪽도 강화를 해야겠어.”
“강화 계획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르마가 최초로 제시한 것은 지갈레온 강화 계획이었다.
에테르 오리진에서 힘을 공급받는 것을 전제로 육체를 어마어마하게 강화해 크라켄, 베헤모스급 이상과 맞먹을 정도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레오볼드는 녀석이 나이트급에도 형편없이 깨졌다는 걸 떠올리곤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력은 그렇다 치고 자신이 밀린다는 생각이 들면 꼬리부터 마는 그 패배 근성이 문제였다.
“워낙 겁쟁이라서 낭비가 아닐까 걱정이 되는데.”
“시뮬레이션을 통해 전투 훈련을 하고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일단 불러와.”
지갈레온은 대충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불려 와서는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뭐, 왜. 설마 나한테 또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건 아니지?”
“미안하지만 농담할 시간 없어.”
레오볼드가 진지한 얼굴을 하자 그도 얼굴을 굳혔다.
“설마… 드디어 그날이 온 거냐? 오메가 퀸과 한판 붙는 거야?”
“이미 한판 붙었어. 승리는 했지만 전황에 별 영향은 못 줘. 아무튼 앞으로는 아스테라 여기저기에 위험이 닥칠 것 같으니 네가 좀 나서줘야겠어.”
“전의 그놈들보다 더 위험한 놈들이 온다면 미안한데 싸우고 싶지 않아. 진짜 무서웠다고.”
“걱정 마. 앞으론 지지 않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아르마, 데려가.”
“어? 응?”
지갈레온은 영문도 모른 채 아르마에게 손을 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은 처절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발가드와 티렌델이 불려왔다.
둘은 플레이그를 상대로 싸운 뒤 자기들끼리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서 나이트급 한 마리도 버거운데 앞으로의 싸움에서 어떻게 버티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르마의 권유대로 에테르 감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레오볼드는 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외부에서 에테르를 강제로 주입하는 거지. 지금 자네들의 육체는 훌륭한 편이지만, 그 에테르를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어. 해서 개조를 좀 할까 해.”
그가 어설트 아머를 타기 위해 받았던 시술에서 몇 가지를 더 추가한 버전이다.
발가드가 물었다.
“우리 몸을 개조한다는 거요?”
“현재 등록되어 있는 기사들 전부. 곧 재난이 닥칠 테니 준비를 해둬야지.”
“재난이라면… 드디어 오메가 퀸과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거군요.”
티렌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 다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에겐 자네들을 강화시킬 여러 플랜이 존재하니까. 개인마다 한계치는 다르겠지만 시술이 끝나고 새로운 골리앗을 지급받으면 나이트급은 아주 쉽게 잡을 수 있을 거야.”
“…그건 안 좋은 소식이군. 나이트급보다 더한 놈들이 나타난단 소리잖소.”
“나이트급은 병졸 수준이지. 더 크고 강력한 놈들이 떼를 지어 나올 거야.”
“…….”
발가드는 새삼 눈앞의 황제가 겪어왔던 싸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우주를 직접 보게 된 것도 경외심을 더했다.
그는 알테마의 챔피언으로서 신살자라는 호칭을 받고 적수가 없다는 평을 들었지만 레오볼드와 우주에 비해선 한없이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알테마도 신들도 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거군…….’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되니 그가 알테마에게 가지고 있었던 연민 등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알테마는 아스테라의 발전을 원하고 그 과실을 자신이 가지길 원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레오볼드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알테마를 되찾는다면 그에게 주는 쪽이 현명할지도 모르겠군.’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말이다.
발가드는 레오볼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의 싸움은 힘들 거야. 내가 가진 건 많은데 상대가 가진 건 아직 드러나지 않았거든.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까진 버텨야 돼. 자네들이 내 버팀목이야.”
티렌델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이미 폐하께 목숨을 바쳤습니다. 마음대로 써주십시오.”
“좋아. 우선은 방금 말한 대로 시술을 받아야 돼. 밖에 나가면 시녀가 안내할 거야.”
“분부대로 하겠소.”
발가드는 문을 열고 나가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알테마는 무사하오?”
“영혼이 먹혔는지는 모르겠어. 오메가 퀸의 목표는 그녀가 아니니까 굳이 건드릴 이유는 없다고 보지만.”
“확신은 못 한다는 거군. 그런데 만약에 말이오.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왕의 부하가 되기를 간청한다면, 받아들여 줄 수 있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안 될 것 없지. 손에 피를 묻힌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녀가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그녀라면… 아마 어렵겠지. 그래도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가 나갔고 레오볼드는 아르마를 통해 마레의 상황을 지켜봤다.
공주가 패배한 뒤 오메가 퀸의 병력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숫자가 두렵지는 않지만 아스테라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르므로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때에 따라서는 신생 군단타격함대를 동원해서 선제공격을 해야겠군.’
현재 우주 플랜트를 포함한 군단타격함대는 아르마가 아공간에 숨겨놓은 상태였다.
오메가 퀸이 그걸 알게 되면 드디어 전력을 꺼냈다며 착각할 것이다.
‘계속해서 방심을 유도해야 돼.’
그리고 일격으로 전쟁을 끝난다.
레오볼드는 최후의 전쟁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다.
* * *
“삼촌, 아무래도 우리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나도 그런 것 같구나…….”
제 2차 메가시티 평화보장회의에 출석한 배성민 대통령과 소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회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만 되어가는 메가시티간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설립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인류연합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인류연합에 유지하 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들을 가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단일 세력으로 메가시티 3개, 인구수 3억은 존재하기에 너무 크다.
―스마트팜도 그렇고 유지하 그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안겼다. 인류연합의 중추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인가?
―그가 있던 시절에야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류연합은 절대 중추 역할을 할 수 없다. 다양한 국가와 세력을 포용한 연합국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우리가 인류연합에 주문하고 싶은 것은 하나, 메가시티 퍼시픽을 중동에 양보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가 나오게 된 까닭은 중동이 의외로 현재 위기의 키플레이어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유지하가 있었을 당시에야 찍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그가 없는 지금 유력한 원자재인 석유를 생산하는 중동의 입김이 상당히 거대해졌다.
셰일 등 생산단가가 높은 방식은 대부분 사장되었고 북해와 러시아의 시설이 박살이 났기에 당분간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통의 산유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동 국가는 버림받았다며 메가시티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12개의 메가시티 중 중동에 건설된 건 하나도 없다. 왜 우리는 죽어야만 했나?
―대재앙 당시 전체 인구 중에서 무슬림이 차지하는 비율은 18%였다. 그러나 유지하는 우리를 적대시하며 단 하나의 메가시티도 할당하지 않았다.
―인류연합은 한반도에 인구를 분산 수용할 수 있지 않나? 그곳은 피해가 적은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메가시티 퍼시픽을 양도해라.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연합과의 모든 교류를 끊겠다.
이건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슬픈 것은 이 주장에 대해 인류연합 내부에서도 은근히 동조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인권주의자와 평화주의자, 그리고 인류연합에서 한국 출신의 권력을 가급적 배제하고 싶은 타국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메가시티 반환 운동을 벌였다.
―메가시티는 2개면 충분하다. 하나는 무슬림 형제들을 위해 양보하자.
―지난 십수 년 사이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았고 해안가가 후퇴하고 있다. 이제 온난화는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인류 생존의 문제다.
―오는 4월 바그다드의 기온이 61도까지 치솟았다. 중동의 여러 곳이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바뀌었다. 그들을 살려야 한다.
이에 맞서 배성민을 지지하는 측에선 굳이 퍼시픽으로 올 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쪽은 같은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흐마드 마수드가 암살된 이후, 메가시티 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이라크 등지에서 몰려온 시아파 무슬림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배성민은 급히 우주선을 파견해 파티마와 연관이 있는 인사들을 빼내는 데 성공했지만 시아파의 점령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메가시티 아프간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인구의 절대다수가 시아파 무슬림이 되었다.
수니파 무슬림을 거기에 밀어 넣으면 화약고 옆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보다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배성민을 비롯한 인류연합의 수뇌부는 이 건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회의에 들어갔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품과 유지비 문제로 타이탄 개발이 늘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중동의 석유는 꼭 필요했다.
이런 상황을 포착한 평화보장회의에선 공개적으로 인류연합에 메가시피 퍼시픽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메가시티 아메리카의 티투스 프랭클린 대통령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오늘날 우리 인류는 미증유의 환경 급변화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해안선은 이미 크게 후퇴했으며 기온은 날이 갈수록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대재난을 빗겨간 인구는 고작 12억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8억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교적 안전한 메가시티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메가시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단지 외부의 인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온에 시름하고 있는 중동의 형제자매를 구출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프랭클린 대통령의 뒤에 폭염에 고통 받고 있는 중동의 무슬림 사진들이 보였다.
젖을 빨 힘도 없는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있었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바짝 말라붙은 것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한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도 고통스럽지만 중동 쪽은 훨씬 심한가 보군요.”
“식량도 극히 부족하고 이대로라면 1억 5천만 인구 전체가 사망할 위기입니다.”
“인류연합이 버티는 건 역시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이겠죠?”
“그 사람은 무슬림을 싫어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인류 전체를 싫어했죠. 통치를 몇 년씩 했는데 측근이 한 명밖에 없었잖습니까.”
“능력은 있었지만 인덕은 모자랐던… 하기야 그런 사람이니까 대량 학살을 일으키고도 뻔뻔할 수 있는 거겠죠.”
이제는 배성민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는다.
그가 입술을 깨물자 소냐가 손을 잡아주었다.
사실 유지하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강해진 것은 새로이 권력자가 된 이들이 책임을 떠넘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레이그의 공습에 지구 환경은 박살이 났고 살기는 팍팍하다 보니 원성을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원성을 감내하기보단 편한 쪽을 택했다.
그리하여 유지하를 악마로 만들기 위한 여론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측근이라곤 한 명밖에 없는 인덕이 부족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그중 하나였다.
배성민이 보기에 그가 측근을 만들지 않은 이유는 21세기의 지구에 정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사망한 시점에서 그의 영혼은 22세기에 남겨져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21세기에 온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움직이는 기계 같은 존재였다.
배성민은 그가 돌아오길 바랐지만 선지자의 고향이라는 곳에서 안식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곳에 돌아오시면 또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유지하에 대한 증오와 인류연합에 대한 압박 등은 배성민을 포함한 수뇌부가 안고 가야 할 짐이었다.
이제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놓고 메가시티 퍼시픽을 내놓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메가시티 애틀란틱의 캐번디시 대통령에 이어 여러 권력자들이 한 마디씩 하고 내려가더니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왕자가 올라섰다.
그는 배성민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유지하는 인류에 죄를 지었소. 메가시티를 몇 개만 더 만들었다면 보다 많은 무슬림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요. 그러니 우리는 유지하를 계승한 배성민 대통령에게 요구하오. 메가시티 퍼시픽을 우리에게 돌려주시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배성민이 발언권을 얻어 말했다.
“메가시티 퍼시픽은 인류연합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실력 행사로 나설 수밖에 없소.”
중동이 실력 행사에 나서봐야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 정도일 것이다.
배성민은 거기까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과의 마찰을 감수한다면 발해만에서 소량이나마 석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여러 메가시티의 대통령들이 잇따라 중동에 대해지지 연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안, 혹은 요청이 아니라 내놓지 않으면 원자재 관련 제재를 먹이겠다는 수준에 이르렀다.
겉으로는 무슬림들을 신경 쓰는 척하지만 인류연합의 힘을 어떻게든 빼고 싶다는 속내였다.
이건 전쟁을 하자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걸 위해 칼을 갈아온 건가.’
각 메가시티에 반응탄 재고가 있는 이상 전쟁은 곧 공멸을 뜻한다.
배성민의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