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나를 신뢰할 수 있겠소?”
개방의 무사라는 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이 작자, 대체 지금 나하고 뭐 하자는 거야?’
협상!
개방의 무사가 의도하는 건 다름 아닌 협상이었다.
만약 둘의 협상이 좋은 방향으로 타결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용하의 간절함이 통했던 걸까. 개방의 무사는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 그리고 신뢰감을 쌓기 위해 저만의 방법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일단 사람들 눈이 있으니, 며칠만 내가 안내하는 곳에서 잠자코 있으시오. 아마 밥은 먹여줄 것이오.”
용하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인공과 장설을 바라보았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용하 또한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기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끼리 너무 깍듯이 대하면 우리가 친구 사이라는 걸 망각하게 되니, 우리끼리 있을 땐 말 놓이시게.”
깊이 공감했다.
“그래도 괜찮겠는가? 자네가 좋다면 나는 얼마든지 상관없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인공 형님!”
“목소리 낮춰.”
“장설 형님!”
“쟤가 목소리 낮추라잖아.”
“두 분 형님께는 죄송하지만,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누추한 곳에서 지내게 될 것이니, 미리 알고 계십시오.”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살아 있는 것만도 우리는 감사할 따름이니.”
“감사합니다. 헤아려주셔서.”
“용하야.”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냥 편하게 얘기하세요. 너무 그러면 오히려 의심만 사요.”
하지만 인공은 여전히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 생각엔 말이다. 용하 네가 예전의 창의부흥원 원장으로 있을 때의 부귀영화를 다시 누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구나.”
창의부흥원이라는 말에 질색하며 인공이 더는 말을 못 하게 그의 입을 막는 데에 급급했다.
그때였다. 개방의 무사가 인공을 바라보며 매섭게 물었다.
“거기! 그대가 창의부흥원을 어찌 아는 것인가?”
“네?”
인공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제가요?”
“조금 전에 창의부흥원 어쩌고 하지 않았느냐?”
무사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 그럴 리가요. 이 작자와 저는 돈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는 사이입니다.”
인공은 최선을 다해 둘러대고 있었지만, 지켜보는 용하는 매 순간이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가슴을 조이며 보고 있던 용하는 마침내 개방의 무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만하지, 친구! 귀한 시간 이런 노인 때문에 다 보내고 말 거야?”
보다 못한 용하가 분연히 나선 덕분에 개방의 무사는 더는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인공과 장설은 적잖이 놀랐다. 두 사람의 휘둥그레진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 눈빛 그대로 용하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이번에는 형형했다.
“아니, 너희 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공과 용하는 어정쩡하게 펴든 손가락으로 용하와 개방의 무사를 번갈아 가리키며 무어라 옹알거렸다.
“시간 없다. 저들을 다시 포박하여 이송하라!”
무사의 말에 나머지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용하는 무사들이 하는 대로 순순히 따르며 조금 전 친구가 된 개방의 무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용하는 바라보는 무사의 눈빛은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무사의 눈빛을 찰떡같이 알아차린 용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차례 끄덕였다.
‘개의치 말게, 친구!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개방은 평등하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방을 알리는 경계석을 지났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특히 협객이 휘두른 칼에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던 남채화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끔찍했던 그날의 기억이 그냥 놔주지를 않았다.
“이보게, 친구.”
조금 앞서가던 개방의 무사가 흘깃 돌아보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용하의 말에 무사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무엇인가? …말해 보게.”
“잠시 시간을 좀 주게.”
“시간을?”
“긴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부탁하네.”
“얼마나 주면 되겠는가?”
“잠깐이면 되네. 이곳에서 비명횡사한 자의 넋을 잠시 기리고 싶어 그러네.”
“비명횡사한 자?! 그자가 누구인가?”
“남채화일세.”
용하가 힘없이 대답했을 때였다.
“그 일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개방의 무사는 다소 놀란 눈으로 용하를 바라보았다. 용하의 지난날을 알고 놀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행히도 일개 무사 따위가 용두방주의 궁에 들어가 보았을 리 없으니, 창의부흥원 원장이었던 용하를 봤을 리 만무했다.
“보아하니, 자네도 그날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날 좀 헤아려주게.”
무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지만 매우 깊은 사색을 하는 듯했다.
“잠깐 쉬어가겠다. 이자들의 포박을 풀어라!”
용하, 인공, 장설.
세 사람은 남채화가 살해된 그곳에서 경건하게 묵념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용하는 침통하게 말했다.
“부디 어느 곳에 가시든 이승에서와 같은 참혹한 일은 당하지 마세요.”
그 순간 용하의 뇌리에 무엇인가 전광석화처럼 스쳤다. 다름 아닌, 21세기 어린이 장학재단 총무의 얼굴이었다. 인공의 눈에도 얼핏 눈물이 고였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가?”
“아니, 그만 가세. 오늘의 빚은 조만간 갚도록 하겠네.”
개방의 무사들은 용하 일행을 다시 포박하려 했다. 그 순간 인공이 무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하소연했다.
“꼭 이렇게 포박해야만 하겠소? 보아하니, 우리 막내와 친구 사이인 것 같은데, 굳이 나이 많은 사람들을 그 고생을 시키고도 끝까지 이렇게 욕을 보여야 하겠느냔 말이오?”
“우리 막내?”
“그렇소. 장설 형님과 용하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의형제요. 장설 형님이 맏형. 그리고 셋 중에 제가 가운데. 다시 말해 제가 중심이란 뜻이죠.”
인공은 잘 나가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 횡설수설했다.
개방의 무사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던지, 용하에게 물었다.
“이보게, 친구! 이 늙은이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
“뭐, 사실인 것도 있고…,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착각인 부분도 좀 있고…, 아무튼 의형제인 건 사실인데, 내 얼굴 봐서 봐주고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
용하는 냉정하게 말하고는 인공을 향해 혓바닥을 메롱 내밀었다.
인공은 혀를 내둘렀다.
“하, 세상 참 무섭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야. 어떻게 용하 네 녀석이 감히, 이 인공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니? 뭐, 네 녀석 얼굴 봐서 봐주고 그럴 필요 없다고?”
“형님! 너무 고까워하지 마쇼. 세상살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소.”
“뭐, 뭣이라!”
당장에라도 혈압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인공은 붉어진 얼굴로 치를 떨었다.
이제 막 서산으로 해가 저물었다.
용하 일행이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햇빛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느다란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곡식 창고에 갇힌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배식을 위한 개구멍 같은 작은 문이 아닌, 커다란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시야를 자극하는 눈 부신 태양 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강렬한 태양광 속에 개방의 무사가 압도하듯 서 있었다.
“대체 몇 날이나 우리를 이곳에 가둬둔 것이오?”
“미안하게 됐소. 사흘을 넘기지 않으려 했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보름이나 가둬두게 되었소.”
“뭐, 보, 보름!”
용하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모아 기함했다.
그리고 곧 인공이 절규하듯 물었다.
“유월이! 우리 유월이는 어찌하여 안 보이는 것이오?”
만일 유월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인공보다 더 오열해야 할 용하는 되레 담담했다.
“용하야! 너는 어찌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저자와 친구하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 인공을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는 용하의 뇌리에, 보름 전 그날 밤이 빠르게 스쳤다.
“이보게, 친구!”
“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친구!”
“우리 유월이, 말 못 하는 우리 유월이 좀 부탁하네. 사람 못지않게 심성이 고운 아이일세.”
개방의 무사는 유월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무사의 시야로 보이는 유월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 눈빛이 무사의 눈에는 ‘저는 괜찮으니, 우리 주인님 좀 잘 부탁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월이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개방의 무사가 한 말에 인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유월이, 유월이가 무사하다는 것이오?”
“그렇소.”
“고맙소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크게 잘못 본 것 같소이다.”
“별말씀을요. 그리고 곧 백의개(白衣丐)가 되기 위한 심사에 들어갈 것이니, 그리 알고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정갈히 하고 기다리시오.”
무사의 말에 인공은 용하 쪽을 곁눈질하며 속삭였다.
“얘, 용하야. 백의개가 무엇이냐?”
“형님!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이곳 무림의 속사정은 저보다 형님이 더 잘 알잖습니까? 늘 제가 물어보는 쪽이고 형님이 대답하는 쪽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형님이 제 스승이셨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제게 물으시는 건지요.”
“나라고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으냐?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면 어서 대답해 보아라.”
“백의개란 말입니다. 처음 입문하여 삼 년 동안 의결이 없는 거지들을 말하는 겁니다.”
“삼 년은 뭐고, 의결이 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리냐?”
“개방에서 다른 거지들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지만, 언제 어떻게 퇴출당할지 모를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삼 년은 개방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남아야 비로소 개방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의결이 없다는 건 매듭 하나 없는 새끼줄을 허리춤에 차게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제일 말석이란 얘기군. 이를테면 수습사원 말이야.”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장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삼 년이라……. 짧지 않은 세월이구나. 우리에게 그만한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느냐?”
“남았다고 생각하냐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 계획 말일세.”
장설의 말에 용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부터는 눈 한번 깜박하는 시간조차도 계획적으로 써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러고는 무사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묻겠네.”
“얼마든지 말하게, 친구.”
“심의하는 자리에 방주도 참석하는지 궁금하군.”
“오늘 심의에 방주님께선 참석하지 않을 걸세.”
“방주 없는 심의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초벌 심의일세.”
“초벌 심의라면, 앞으로 이런 심사를 또 거쳐야 한다는 것인가?”
“백의개가 되는 게 그리 만만한 줄 알았는가, 친구?”
용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길고 긴 시간과 싸워야 할 것이니,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야.”
백의개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용하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했다.
아니, 간파는커녕 오히려 조바심만 낼 따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방주를 만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