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147
53. 기만자들 (2)
노엘이 겁에 질려 몸을 움츠렸다. 유진이 앞으로 걸어 나가자, 그가 유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어이, 너무 떨어지지 마.”
“그 마음가짐입니다.”
“응?”
“내가 이긴다고 말하면 노엘이 너무 안심할지도 모르니, 긴장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긴다는 뜻인가?”
“노엘.”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날 고용한 이유는 내가 최고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우…….”
노엘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수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 세계적인 그룹의 오너다. 그가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유는 언제나 최고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최고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 같은 최고를, 최고들의 자신감을 좋아했다.
“좋아. 자네를 믿지.”
“제 뒤에 있으세요.”
유진은 노엘을 등에 붙인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이거 괜찮은 거 맞나?”
“저 둘 말고도 더 있습니다. 제 옆이 제일 안전합니다.”
“뭐?”
유진은 검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칼끝이 움직였으나 혈마인들의 두 눈은 유진에게 붙박여 있었다.
유진의 칼끝이 조금 더 크게 흔들리자, 그제야 혈마인들이 유진의 칼을 의식했다.
유진은 더 크게 움직였다.
양옆으로.
앞뒤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진의 검이 적들을 향해 누웠다.
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혈마인 하나의 가슴에 검기가 박혔다. 그의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전신에 떨림이 번졌다. 혈마인이 무어라 소리쳤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이젠 혈마인들도 글로벌이로군요.”
하기야 혈교의 교주는 머리가 비상해 무림에 있을 때부터 온갖 언어를 할 줄 알았다.
장로들이 전부 한국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처음 차원을 넘을 때는 한국에서 시작했던 것 같지만, 전 세계로 교세를 확장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혈마인을 양성한 듯했다.
노엘이 투덜거렸다.
“당연하지. 미국에 저런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땅덩어리가 넓으니 여기저기 숨어 산다고. 사회 문제야.”
“내 등 뒤에 잘 붙어 있으세요.”
“어엇!”
몇 차례 혈마인들이 유진을 공격하거나 노엘을 치려고 애썼고, 그렇게 몇 합을 주고받다 보니 그들은 어느새 팔다리가 잘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혈마인들은 유진이 노엘을 지켜야 한다는 약점을 이용하려 했으나 애초에 실력 차가 너무 많이 났다.
다만 혈마인이다 보니 수족을 잃은 것 정도로는 동요하지 않았다.
혈마인들이 도망치려는 듯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유진은 옆을 보았다. 오르크들과 전투를 끝낸 스테이시가 유진을 도우러 오고 있었다.
“스테이시, 노엘을 지켜주세요.”
“알았어요.”
그녀는 노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시는 결코 듣지 않았는데, 다만 유진의 말은 고이 들었다.
유진은 스테이시에게 노엘을 맡기고 혈마인들을 추격했다.
부상을 입은 혈마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열심히 달리는 혈마인들을 따라잡아 무기를 빼앗고는 배를 관통시켜 땅에 박아 버리고,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나머지 혈마인들을 추적했다.
유진이 따라잡힌 혈마인들과 전투를 하는 동안, 다른 혈마인들은 꽤 멀리 도망쳤기에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 방심을 이용했다. 그가 한 걸음을 떼자 순식간에 공간이 좁혀들면서 먼 거리를 날아갔다.
순식간에 유진이 다가오자 도망치던 혈마인들이 대경했다.
“제기랄!”
“뭐야!”
“이런 말은 없었는데!”
얼마 전 주식투자에 실패하고 눈물의 손절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유진은 조화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런 깊은 사연을 알 리 없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평가되는 유진의 무위는 화경이었고, 많이 쳐 주는 쪽은 현경의 초입 정도로 여겼다.
유진의 실제 무위와 알려진 정보 사이에 현격한 격차가 있는 것이다.
“컥!”
유진은 어느새 혈마인 하나의 뒤를 추격해 그의 등을 무릎으로 찍었다. 혈마인이 나동그라졌다. 나머지 혈마인들은 계속해서 달아났다.
“흩어져!”
그들이 사방으로 나뉘었다.
이렇게 되면 모두 잡을 수는 없다.
유진은 다시 기감을 세워 멀어져 가는 혈마인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판타리아는 온갖 괴물들이 사는 끔찍한 곳이다.
유진 정도 되면 고수라면 모를까, 아무리 판타리아가 익숙한 혈마인이라 해도 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유진을 피해 흩어졌지만, 그만큼 각자가 위험해진 셈이다.
죽을 확률이 더 높다.
그러니,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있는 고수만 붙잡으면 된다.
유진은 부채꼴로 퍼지는 일곱 명의 혈마인 중 두 명을 표적으로 삼았다.
둘 정도는 쉽다.
순식간에 하나를 따라가 목을 꺾은 다음, 그를 들어 올린 채 반대편으로 날아가 나머지 표적에게 집어 던졌다. 두 혈마인이 하나로 뭉쳐서 바닥에 쓰러졌다.
유진은 혈마인이 놓친 장창으로 두 사람의 배를 찔러 탕후루처럼 만들고, 어깨에 걸쳐 진지로 돌아갔다.
유진이 두 혈마인을 봇짐처럼 창에 꿰뚫어 오자 모두 입을 벌렸다.
“신기한 운송법이로군.”
노엘을 습격하려던 두 혈마인은 이미 꽁꽁 묶인 채 포로가 되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유진은 잡아 온 두 혈마인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노엘, 설마 심문을 한 겁니까?”
“으응? 무, 물론. 난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업가야. 심문 정도는…….”
그러자 스테이시가 말했다.
“노엘이 간지럼을 태우자거나, 코털을 뽑자는 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줄리앙이 끼어들었다.
“심문은 나한테 맡겨. 자랑은 아니지만 종종 한 적이 있지. 내게 맡기면 순식간에 모든 걸 토해내게 해 주지. 어때?”
줄리앙은 이 기회를 이용해 스테이시에게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고문 실력을 자랑하는 건 별 도움이 안 된다.
스테이시는 들은 척도 않고 유진에게 물었다.
“유진, 어떻게 할까요?”
“혈마인들은 어지간한 심문이 통하지 않기는 한데…….”
이미 잘린 사지가 재생되고 있었다. 고통도 그다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도의 심문 기술을 가진 국정원에서도 리퍼나 혈마인들을 통해 큰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이런 토벌대 내에서 하는 고문이라 봐야 큰 도움이 될 리 없다.
하지만 해 볼 필요는 있다.
유진은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두운 피부 사이에서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유진은 그의 눈빛을 이기지 못했다.
“줄리앙한테 한 번 맡겨 보죠.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래, 날 믿어라.”
스테이시를 위해서라면 줄리앙이 가진 바 모든 기량을 끌어낼지도 모른다. 스테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 보죠.”
그렇게 유진에게 사냥당한 네 무인들은 줄리앙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줄리앙이 유진에게 다가와 가슴을 툭 쳤다.
“고마워, 유진.”
“잘 해보세요.”
“물론.”
“정말 좋은 정보를 얻으면 스테이시가 기뻐할지도 모르죠”
“그런가?”
줄리앙은 어울리지 않게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어쨌거나 저번에는 미안했어. 자네가 나보다 고수라는 건 우유를 줄 때 느꼈지만, 생각보다 더 엄청난 실력자였군. 혹시 현경인가?”
“비슷합니다.”
이번 전투로 인해 유진은 다른 무인들에게 한층 존경을 받게 되었다.
오르크들과 싸울 때뿐 아니라 혈마인들을 추적해 사냥해 오는 솜씨는 인간이 아니라 먹잇감을 낚아채는 독수리 같았다.
노엘이 왜 이 어린 동양인을 호위로 삼았는지 모두가 새삼 납득했다.
“부상자들은요?”
“몇 명 있는데, 의료진들이 살피고 있다. 큰 부상자는 없어.”
토벌대에는 의료진이 있었는데, 그들조차 무인들이었다. 노엘은 전 세계에서 무공을 익힌 인재들을 긁어모은 것이다.
물론 여기는 실시간 통역기의 힘이 컸다.
언어가 달라도 한 팀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놀라운 발명품이었다.
“그럼 계속 가지.”
뒤처리를 마무리한 토벌대는 진지를 세우기 위해 지정한 장소로 나아갔다.
“공기가 안 좋네요.”
유진은 문득 한 무인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
천막에 들어온 유진은 지미에게서 추출한 촉수를 꺼냈다.
촉수는 바늘에 찔린 채 작은 틴케이스 안에 갇혀 있었는데, 축 늘어져 있던 것이 벽을 넘어오고 나서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꾸물거리는 촉수를 내려다보며 유진은 팔짱을 꼈다.
혈교와 싸울 때부터 이 촉수가 나타났다.
무림에 있을 때는 저런 촉수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진혈지체로 추측되는 김하연조차 여느 혈마인을 뛰어넘는 재생력을 가졌지만 촉수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어쩌다 지미의 머릿속에서 나타난 것일까.
유진은 이 촉수가 무언가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형님.”
박유원이 천막 안으로 들어와 유진에게 말했다.
“이 주변에서 혈마인들이 계속 출몰하고 있답니다.”
“혈마인들이?”
박유원의 말에 따르면, 저 멀리서 흑의를 입은 혈마인들이 망원경으로 여기를 지켜보는 것을 무인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이 근처에 혈마인들의 기지가 있는 게 아닐까요?”
“혈마인들의 기지라…….”
“아, 오르크들도 여기저기서 보인대요.”
“오르크까지?”
“네.”
이 벽 안에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엘이 토벌대를 꾸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는 판타리아를 체험하고 싶다거나 심처로 가고 싶다거나 인간의 영역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조사라고 했다.
그의 괴짜 같은 이미지 때문에 넘어간 것이지, 이 정도 규모의 토벌대를 꾸린 동기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이상하군.”
“그렇죠?”
유진은 노엘을 찾아가 묻기로 하고, 촉수에 다시 침을 꽂아 틴케이스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촉수가 거세게 움직였다.
갑자기 몸이 늘어나더니 이빨 같은 것이 돋아나 유진을 물려고 했다.
유진은 표홀한 움직임으로 피한 다음 내기를 실어 촉수를 찔렀다.
혼원기에 제압당한 촉수가 부들부들 떨다가 얌전해졌다. 유진은 혼원기를 더 많이 주입한 다음 촉수를 다시 틴케이스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천막을 나오니, 진지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아, 유진.”
호위라는 역할 때문에 유진의 천막은 노엘의 천막과 붙어 있었는데, 거기서 막 나온 스테이시가 유진에게 다가왔다.
“노엘과 함께 지휘소로 와 주겠어요?”
“무슨 일 있습니까?”
“방문자가 생겨서요.”
“방문자?”
“다른 나라의 레이더들이요.”
“예?”
“우연히 우리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하러 왔대요.”
그리고 스테이시는 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유진이 노엘의 천막을 열자, 그는 막 꽃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오, 유진. 소식 들었지?”
“레이더들이 여기까지 왔단 말입니까?”
“가끔 있지. 한몫 잡으려고 떠도는 친구들이.”
그는 거울을 보고 머리를 넘기고는 유진에게 말했다.
“자, 가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무얼 보았는지.”
유진은 노엘의 곁에 서서 지휘소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노엘의 부하 직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휘소 텐트를 열고 들어가니, 처음 보는 무인 여럿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는데, 생김새로 보아 동유럽 쪽 같았다.
“자, 지금부터 이 사람들에게 실시간 통역기를 줄 겁니다. 우리의 말을 알아듣게 되니 중요한 정보는 말하지 마세요.”
직원 중 하나가 그리 말하고는, 그들에게 실시간 통역기를 건네 귀에 꽂게 했다.
의사소통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온 사설 레이더들이었다.
요약하자면, 한몫 잡으려고 판타리아의 심처로 들어왔다가 길을 잃고 장비까지 고장 나 죽는 줄 알았는데, 천운으로 노엘의 토벌대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라 했다.
“부탁합니다. 그냥 나가면 우리들은 죽어요. 오르크가 너무 많습니다.”
노엘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절친한 친구가 러시아 사람이지. 좋아. 대신 토벌대의 규칙을 얌전히 따라야 합니다.”
“예.”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레이더들은 다섯 명이었는데, 모두 판타리아를 헤매느라 지쳐 보였다.
그들은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남은 것은 노엘과 유진, 스테이시, 그리고 노엘이 직접 데리고 온 직원들뿐이었다.
노엘이 말했다.
“의심스러운데.”
스테이시가 동의했다.
“맞습니다. 사설 레이더가 하필 지금 이곳에 나타나다니, 확률이 너무 낮아요.”
“으음…….”
노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 위험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으니 지켜보자고. 무공이 그리 세진 않았지?”
“예.”
회의가 끝났다. 유진은 노엘을 따라 지휘소 텐트를 나왔다.
“유진, 오늘 저녁이 뭔지 아나? 아주 맛있는 걸 준비하고 있다더군. 내가 챙겨온 위스키가 있는데, 술은 잘 마시나?”
노엘이 수다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유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왜 그래, 유진?”
유진은 여전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오르크, 혈마인, 정체불명의 촉수와 러시아 사설 레이더들.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여기서 유진 외에는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존재.
바로 정령이 토벌대의 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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