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5
#닥터 플레이어 15화
다음 날.
“뭐라고요?! 선배가 그 환자를 치료했다고?!”
랑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최소 B급 이상 되는 힐을 전력으로 퍼부어야 살릴까 말까 한 환자였다.
그런데 F급도 안 되는 한심한 낙제생 레이몬드가 그런 위중한 환자를 살렸다고?
‘고대의 비술을 사용한 건가?’
하지만 랑스는 곧 고개를 저었다.
‘고대의 비술이라고 해 봤자, 잡술에 불과할 뿐이야. 그런 위중한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잡술.
그게 벨런드 치료원 치료사들의 의술에 대한 인식이었다.
힐이 아닌 치료술은 모조리 잡술로 여겼고, 그건 세상 모든 치료사의 생각이 다 비슷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해!’
랑스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병실에 도착한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었다!
어제 실려 온 거렁뱅이 환자가 평온한 얼굴로 색색 잠들어 있었다. 딱 봐도 고비를 넘겼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랑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거렁벵이 환자의 옆에 굉장히 지체 높은 신분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귀족?’
랑스는 한눈에 중년 남성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고가의 옷, 액세서리, 허리에 찬 보검,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기품.
분명 귀족이었다. 그것도 하급 귀족이 아니라, 굉장히 높은 계급의 귀족.
그때, 랑스의 눈에 중년 남성 가슴팍에 수놓아진 가문의 문장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아는 문장이었다.
‘남부의 어거스트 백작가! 왜 저런 대귀족이 이곳에? 병실에 아는 환자라도 있나?’
하지만 지금 이 병실에는 저 거렁뱅이 환자밖에 없었다.
도저히 짐작이 안 돼 어리둥절해하는 순간, 중년의 귀족이 랑스를 돌아보았다.
절로 긴장이 되는 강철 같은 눈빛.
랑스는 허겁지겁 과도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거스트 백작가의 나리를 뵙습니다! 벨런드 치료원의 수석 치료사 랑스라고 합니다.”
평소 보이던 태도와 완전히 딴판인 모습이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못난 이의 모습이었다.
상대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
아무런 대답 없이 날카롭게 랑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네놈이 랑스라고?”
“……나리?”
“내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 둔?”
“……!”
랑스의 얼굴이 혼비백산해졌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란 말인가?!
‘내가 언제 어거스트 백작가의 공자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하지만 그 순간, 한 가지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저 거렁뱅이가?’
랑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닐 거다. 절대로 그런 끔찍한 일은…….
하지만 그때 누군가 나타나 랑스가 한 일을 고대로 일러바쳐 버렸다.
“맞습니다, 백작님. 저기 수석 치료사 랑스가 백작님의 자제분을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버려두라고 시켰습니다.”
“……!”
랑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레이몬드였다!
어느새 나타난 레이몬드가 랑스를 향해 얄밉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넌 이제 죽었다.
“그대로 놔두면 죽음을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걸 알고 있음에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였습니다. 공자분께서 평민 복장을 하고 와 돈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지요.”
레이몬드의 말을 들은 어거스트 백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고작 돈 몇 푼 따위 때문에 내 아들을!”
랑스의 얼굴이 하얘졌다.
“레, 레이몬드 경! 제가 언제?!”
“언제기는. 젊은 나이에 벌써 건망증이 왔나. 어제 그랬잖아. 한슨, 너도 똑똑히 듣지 않았니?”
마침 간병용 수건을 들고 들어온 한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랑스 치료사님이 공자분을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그걸 레이몬드 경께서 나서서 살리신 거고요.”
어거스트 백작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랑스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시체처럼 변했다.
난데없는 날벼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지막 결정타는 당사자인 클리앙 공자 본인이 날렸다.
“맞…… 습니다, 아버님. 저 빌어먹을 치료사가 절 죽도록 방치하게 했습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탓에 잠깐 의식을 차리고 결정적 증언을 날린 것이다.
“감히……!”
“아, 아닙니다, 백작님. 이건 무언가 오해가……!”
“오해라고?”
어거스트 백작은 서릿발처럼 말했다.
“내 아들을 죽도록 방치해 놓고 계속 변명만 하는군. 랑스라고 했나? 네놈은 본 백작과 어거스트 가문이 우스운가 보지? 귀족을 능멸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가 보군.”
“……!”
랑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는 덥석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부디 자비를……!”
하지만 늦었다.
용서를 구할 거면, 처음부터 구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의 행색을 보고 죽든 말든 내팽개치면 안 됐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치료사로서 말이다.
“어거스트 백작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네놈은 이 휴스톤 왕국. 아니, 십자 연맹 제국 어디서도 치료사로서 활동하지 못하게 될 거야.”
랑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배, 백작님……!”
하지만 백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옆에 동행한 보좌관에게 물었다.
“이놈에게 정확히 어떤 죄를 적용할 수 있지?”
“치료사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고 고의로 대공자님을 죽을 위기에 빠지게 한 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한 한 점, 거짓 변으로 귀족인 백작님을 능멸한 행동. 전부 처벌 가능합니다. 모두 귀족을 향해 저지른 죄이니, 특별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대로 처리하도록.”
털썩.
랑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났다.
그것도 치료사로서만 끝난 게 아니었다. 법정에 서야 했고, 커다란 벌을 받을 게 분명했다.
“나, 나는…….”
랑스가 덜덜 떨며 떠듬떠듬 입을 열었지만,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간 그가 한 잘못이 있었기에 모두 냉랭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특히 레이몬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 벌도 싸지. 치료사 자격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
그렇게 벨런드 치료원의 전도유망한 젊은 수석 치료사 랑스는 철저히 몰락해 끌려나갔다.
이제 앞으로 치료원에서 랑스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이번엔 어거스트 백작이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랑스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참을 수 없는 감사가 백작의 눈동자에 차올랐다.
“경황이 없어 지금껏 제대로 인사도 못 했구려. 정말 감사하오.”
그러며 어거스트 백작은 살짝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아, 아닙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백작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레이몬드는 허겁지겁 손사래를 쳤다.
대귀족 어거스트 백작의 고개 숙인 인사를 받다니!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성공했구나! 지금껏 살아 있길 잘했어!’
평생 더러운 오물 취급만 받았는데.
찌릿 감동의 해일이 밀려왔다.
물론 겉으로는 일절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겸손한 척(?) 말했다.
“치료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몬드가 이렇게 근엄한 성자(?)처럼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최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놔야 해. 그래야 좋은 소문이 돌며 끊임없이 환자가 몰려오겠지.’
레이몬드는 이미 치료사로서 스스로의 컨셉을 정해 두었다.
-환자를 생각하는 이 시대 진정한 치료사!
‘이런 이미지가 잡히면 벌 떼처럼 환자들이 몰려오겠지, 흐흐.’
이른바 이미지 마케팅이랄까?
환자를 생각하는 치료사로 소문이 나면, 대박이 날 게 분명했다.
음흉한 속셈이었지만, 뭐 어떤가?
그는 대박 나서 좋고, 환자들은 좋은 치료사를 만나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보라.
당장 눈앞의 어거스트 백작도 깜빡 속아 이렇게 감탄했다.
‘그 못난이 사생아가 이런 훌륭한 치료사가 되었다니.’
어거스트 백작은 당연히 레이몬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다만 아는 척은 안 했다.
그게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레이몬드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우리 어거스트 백작가는 후계자를 잃었을 거요.”
“공자께서 무사하셔서 저도 무한히 기쁩니다.”
“그대는 우리 백작가의 은인.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그 말에 레이몬드는 침이 바짝 말랐다.
‘드디어 왔다! 보상 타임!’
환자를 치료하고 난 후 그가 백작가의 후계자인 걸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좋아 죽는 줄 알았다.
‘백작가의 후계자를 살렸으니, 큰 보상을 내려줄 게 분명해!’
분명히 말하지만, 레이몬드는 성자가 아니었다.
환자를 위하지만, 동시에 속물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다.
보상을 마다? 그런 일 없었다. 그냥 땡큐였다.
‘이번에 받을 건 정해져 있지.’
돈?
아니다. 돈도 좋겠지만, 대귀족의 후계를 살린 기회를 십분 살려야 한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걸 요구해야 해.’
그렇게 생각한 레이몬드는 짐짓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별히 바라는 건 없습니다. 전 치료사.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보상 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밑밥 깔기였다.
“허허.”
레이몬드의 의도대로 어거스트 백작은 더욱 감탄하였다.
‘왕성에서 전하께도 저런 청렴한 발언을 했다고 하더니, 정말 이런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니. 대단하구나. 훌륭해.’
어거스트 백작은 더욱 보상을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 감사한 은혜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도록 하시오. 모두 들어주도록 할 테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판단한 레이몬드는 말을 꺼냈다.
“정 그렇다면,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저?”
“절 마음속으로 지지해 주시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
레이몬드의 말뜻을 알아들은 걸까?
어거스트 백작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단어 뜻 그대로 마음속으로 응원만 해달라는 게 아니다.
지지. 즉, 그의 뒷배경이 되어달라는 뜻이다!
‘……인품이 훌륭할 뿐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하군.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
어거스트 백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레이몬드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돈?
아니다.
그의 힘이 되어줄 이였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알고 있고, 딱 적절한 보상을 요구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훌륭하군. 그 못난이 사생아 왕자가 이렇게 뛰어나게 성장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훗날이 기대되는군.’
생각을 마친 어거스트 백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하지만 고작 그런 것만으로는 아들을 구한 은혜를 갚기는 부족한 것 같으니, 더욱 큰 보상을 하도록 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