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59
#닥터 플레이어 159화
특사.
정식 명칭은 ‘재난 위임관’이었다.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란 뜻이다.
이번에 생긴 명칭이 아닌, 원래부터 십자연맹제국에 있던 직위였다.
‘지진이나 심각한 홍수 등, 지방 영주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커다란 재난이 발생하면 국왕이 파견하는 직위이지.’
어쨌든 레이몬드에게 어울리는 직위라 할 수 있었다.
이번 일은 그의 능력이 가장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힐러로서 그의 능력이 진가를 발휘할 거다.
‘반드시 성공해 제후가 되겠어!’
레이몬드는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가슴이 부풀었다.
제후는 그야말로 왕 바로 밑의, 지고한 자리!
지금껏 그를 무시하던 재수 없는 귀족 놈들의 머리 위에 서는 건 물론 어마어마한 명예와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다.
또한, 권력을 이용해 환자를 위한 일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기다려라, 제후의 자리여! 이 레이몬드가 간다!’
레이몬드는 속물적 마음과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눈빛으로 제후의 꿈을 외쳤다.
그렇게 황금빛 미래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단 하나 아쉬운 건 있었다.
특사가 되었으니, 수도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수도 백성도 크게 아쉬워하였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떠나시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레이몬드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 페닌 치료원은 힐러로서 내 고향인 곳이나 마찬가지인데 계속 있지를 못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은 하나였으니까.
‘특사 일이 끝나도 제후가 되면 한동안은 라팔드 지방에 머물러야 할 텐데.’
물론 영주가 된다고 해서 그곳에만 속박되어 있지는 않을 거다.
그는 힐러였으니까.
환자들이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을 생각이었다.
‘처음에 기반만 잘 닦아놓으면 돼. 이후에는 믿을 만한 대리인을 두고, 나는 영지와 치료원을 왕래하며 환자를 치료하는 거야.’
이와 같은 일은 다른 여러 제후도 하는 일이었다.
영지와 수도를 왕래하며 정계 활동 등 다른 일을 하는 제후도 많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제후 이전에 힐러니까.’
제후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것 아니냐고?
아니.
레이몬드는 여전히 목말랐다.
‘제후는 내 여정의 중간 단계에 불과할 뿐이야. 내 진짜 목표는 대륙 최고의 힐러가 되는 거니까.’
한 지방의 제후.
그리고 대륙을 호령하는 최고의 힐러.
과연 둘 중 누가 더 크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어볼 것도 없었다.
후자였다.
레이몬드는 이왕 한 번 사는 것, 그 누구보다도 끝장나게 성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대륙 최고의 힐러가 누리는 권력도 제후 이상이고 말이야.’
현 대륙 최고 힐러 중 한 명, ‘광휘의 성자’를 생각해 보면 안다.
그의 위세는 결단코 일개 제후에 비해 못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높다.
제후는 기껏해야 한 지방, 혹은 왕국 단위의 권력이지만, 광휘의 성자가 누리는 권력은 ‘제국’ 단위, ‘대륙’ 단위였다.
권력 면에서도 그러한데, 명예와 부귀영화 면에서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누리는 부귀영화는 가히 대륙 최고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물론 그건 아득한 머나먼 미래의 꿈.
지금은 당면한 눈앞의 일을 해야 할 때였다.
라팔드 지방을 성공적으로 안정시키는 것.
그게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저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왕자님!”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레이몬드 만세!”
“마제스티 레이몬드!”
수도 백성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레이몬드는 라팔드 지방으로 떠났다.
* * *
레이몬드가 떠날 때, 백성과 정반대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었다.
왕자들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리머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바마마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 건, 레이몬드를 왕위 계승권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대로 있을 겁니까?”
“있지 않으면? 우리 강아지가 무서워 호들갑이라도 떨어야 하나?”
“형님! 그렇게 안이하게 말씀할 때가 아닙니다!”
리머튼이 외쳤다.
“지금껏 아바마마가 우리 중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지지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왕위가 레이몬드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결국 차기 왕위를 정하는 건, 국왕 오든의 뜻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만약 오든이 작정하고 레이몬드를 민다면 그에게 왕위가 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미 아바마마께서는 속으로 레이몬드를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
리머튼은 심지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레이몬드에게 이번에 제후 직을 내리려는 건, 사생아인 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한 중간 공작이 아닐까, 하는.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리머튼은 미칠 듯 초조했다.
하지만 카이른은 시종일관 여유 있는 태도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형님! 일단 우리끼리라도 힘을 합쳐 레이몬드 놈을 짓밟아야……!”
“쯧. 시끄럽게. 그렇게 강아지가 무섭다면, 네가 알아서 해보려무나. 난 관심 없으니.”
리머튼은 얼굴이 시뻘게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절 무시하면 어쩔 수 없지요. 레이몬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시길.”
문이 쾅! 소리 나며 닫혔다.
카이른은 휘파람을 불었다.
“단단히 화났군.”
그때, 곁에 있던 수하가 조심스레 말했다.
“외람되지만, 이번엔 리머튼 전하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더 기세가 오르기 전, 그 사생아 놈을 짓밟아야 합니다.”
“괜찮아.”
“전하.”
“괜찮다고.”
“……!”
카이른이 빤히 수하를 바라보았다.
카이른 특유의 묘한 광기에 휩싸인 그 눈동자에 수하가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카이른은 다시금 말했다.
“괜찮아. 놈은 라팔드 지방에서 철저히 몰락하게 될 테니까.”
확신을 넘어 반드시 일어날 사실을 말하는 음성.
그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때 놈을 짓밟으면 돼.”
* * *
카이른의 방에서 나온 리머튼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는 지금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몬드를 절대 가만히 두면 안 돼. 지금 짓밟을 수 있을 때 짓밟아야 해.’
원래 리머튼은 항상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점차 추악한 본성이 나왔다.
‘레이몬드, 네놈이 라팔드 지방을 안정시키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할 거다. 이 리머튼이 그렇게 놔두지 않겠어.’
리머튼은 레이몬드가 제후가 되는 걸 막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국왕 오든이 레이몬드를 속으로 차기 왕위로 내정하고 있어도 레이몬드가 제후가 되는 데 실패하면, 그때는 그걸로 끝이었다.
고작 이런 일조차 해내지 못한 이를 왕위에 올린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심지어 사생아를 말이다.
‘두고 봐라.’
그렇게 리머튼은 추악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 * *
레이몬드 일행은 라팔드 지방에 진입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도 루인 성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일단 재난 위임관으로 주도인 루인 성을 먼저 복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곳이 내가 받기로 약속된 루인 영지?’
레이몬드는 가슴이 쿵쾅 뛰었다.
‘생각보다 훨씬 크잖아.’
그는 전쟁 당시 루인 성에 온 적이 없었다.
루인 성을 공략한 건 레이몬드가 있었던 중군이 아니라, 다른 갈래의 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오늘 처음 루인 성을 봤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커다랬다.
“역시 라팔드 지방 최고의 도시답군요. 저 성 안의 인구만 해도 7만에 가까울 겁니다.”
라오였다.
참고로 라오는 새로운 부임지로 라팔드 지방을 택했다. 국왕의 뜻을 대리하는 행정관으로서 레이몬드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라오는 레이몬드 곁에 있는 게 자신에게 훨씬 이득임을 걸 잘 알고 있었다.
‘형님은 현재 휴스톤 왕국의 중심. 형님 곁에 있는 게 수도에서 고리타분한 서류만 보는 것보다 새로운 공로를 세울 기회도 많을 거야.’
라오는 속으로 생각했다.
“……7만 명?”
“네, 성 밖 영지의 주변 인구를 합치면 훨씬 더 넘고요.”
레이몬드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주가 되면 그렇게나 많은 이를 이끌게 되는 거라고?’
그는 태생이 소심쟁이.
장밋빛 미래만 꿈꾸다 막상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니 덜컥 긴장되었다.
“그러면 들어가시지요.”
끼익.
낡은 도개교가 내려왔고, 레이몬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건…….’
여기저기 타고 무너진 집들.
퀭한 얼굴의 사람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들이었다.
전쟁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새롭게 들어온 레이몬드 일행을 보며 경계 어린 얼굴을 하였다.
“누구지?”
“휴스톤 왕국의 새로운 통치자?”
적대심과 경계가 백성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들 입장에서 새로운 통치자는 정복자였으니까.
그런데 한 백성이 경악에 찬 외침을 내뱉었다.
“설마? 저분은 휴스톤 왕국군의 빛, 레이몬드 님?”
“뭐? 정말?”
“맞아! 저 기품있는 외모! 휴스톤 왕국군의 빛이야!”
백성들이 술렁였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흘렀다.
레이몬드의 이름은 드로튼 백성에게도 유명한 것이었으니까!
“베라드 악마 놈을 몰아내고 국왕 전하를 구해주었다는 휴스톤 왕국의 영웅?”
“우리 국왕 전하께서 저분에게 친필 감사패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그 말에 맞추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이템, ‘드로튼 국왕의 친필 감사패’의 효과가 발현됩니다!] [감사패의 소유자를 향한 드로튼 백성의 호의가 올라갑니다!]한 백성이 떨리는 음성으로 레이몬드에게 물었다.
“호, 혹시 당신께서 우리를 다스릴 영주님이십니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백성을 마주하는 거라 긴장되었지만, 다행히 스킬들이 발현되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는 이들을 돕고자 합니다!] [스킬, ‘강철의 심장’이 발현됩니다!] [스킬, ‘의사의 카리스마’가 발현됩니다!]“아니, 저는 영주가 아닙니다.”
“아……!”
이곳 루인 영지를 약속받긴 했지만, 받은 건 아니다. 그러니 아직 그는 영주가 아니었다.
영지민들이 실망하는 찰나.
레이몬드가 말을 이었다.
“저는 국왕 전하의 특사, 재난 위임관입니다.”
“……!”
“당신들을 돕고자 오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특사. 재난 위임관.
그게 정확히 뭘 뜻하는 직위인지 학식이 짧은 그들은 몰랐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바로 휴스톤 왕국군의 빛, 레이몬드가 그들을 위해 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