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65
#닥터 플레이어 165화
레이몬드는 그날 밤 오든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못할 것 같으면 일찍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국왕 오든의 의중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국왕이 이런 일에 그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을 거란 거다.
‘저들 귀족들도 국왕이 이런 일에까지 일일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니 이렇게 행동하는 거겠지.’
정말 최악의 일이 벌어진 거라면 모를까, 국왕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약속했어. 반드시 해내기로. 그래서 그의 사과를 받아내기로.’
오든과 한 또 다른 약속을 떠올린 레이몬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해결해 내 국왕 오든의 사과를 받아내리라.
그때, 현자 메빈슨이 불안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귀, 귀족들은 어디나 마찬가지이군요.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드로튼 왕국에 있을 시절, 귀족들의 이기심에 좌절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 같다.
레이몬드도 고심했다.
그러던 차, 뜻밖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배, 백작님. 통신 수정구로 연락이 왔습니다.”
레이몬드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시종의 얼굴이 다급했던 것이다.
“누구에게?”
“리머튼 왕자 전하이십니다.”
“……!”
“이번 영주들 사태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레이몬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영주들의 이해할 수 없는 담합.
예상치 못한 리머튼의 연락.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졌다.
‘리머튼 왕자가 뒤에서 수작을?’
* * *
과연 예상대로였다.
수정구 너머로 리머튼이 득의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다.
‘역시 이번 영주들의 담합은 리머튼의 수작이었던 거야!’
리머튼이 뒤에서 주도했다면 지금 사태가 설명되었다.
어째서인지, 이번 라팔드 지방의 새로운 영주들은 리머튼 파가 많았다.
9명 중, 무려 5명이 리머튼의 지지자였다.
다른 귀족들도 모종의 수단으로 회유했을 터.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오랜만이구나. 소식은 들었다. 영주들이 말을 듣지 않아 고생이겠구나.
레이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가 한 일이면서, 능청은.’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전쟁 당시 거하게 실책을 범했다지만, 리머튼을 따르는 귀족들의 세력은 아직도 컸다.
그의 친모의 가문 테른 후작가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테른 후작가는 휴스톤 왕국 서쪽 지역의 제후일 뿐 아니라, 중앙의 귀족들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문이라, 지금도 리머튼을 따르는 귀족들은 많았다.
따라서 괜히 리머튼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살갑게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혹시 무슨 용무로 연락하신 것인지요?”
리머튼은 수정구 너머에서 무거운 눈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부담을 느낄 즈음,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전, 내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네?”
-레이몬드, 내게 충성을 바쳐라. 그러면 내가 왕이 되면 너에게 이인자의 자리를 주겠다.
“……!”
레이몬드는 흠칫 눈을 떴다.
생각지 않은 제안이었던 것이다.
‘진심이야.’
리머튼의 눈빛은 한없이 진중했다.
진심으로 제안을 건넨 것이다.
-만약, 내게 충성을 바친다면 지금 영주들의 사태도 내가 당장 해결해 주겠다. 그뿐만 아니라, 네가 제후가 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겠다. 너는 휴스톤 왕국의 이인자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거야.
레이몬드는 리머튼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이건 협박이야.’
이게 최후통첩이란 것을.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하면, 리머튼은 그를 정적으로 여기고 본격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할 거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리머튼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당장 제후가 되는 데에도 문제가 있을 거다.
리머튼의 지시에 따라 반기를 든 영주들을 굴복시키는 게 쉬울 리가 없으니까.
-지금 당장 답하기 어렵다면, 하루의 시간을 주마.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마.
통신이 끊긴 후, 레이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지?’
레이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만약 리머튼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어쩌면, 그게 현명할지도 몰라.’
레이몬드는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이 너무 컸다는 것을.
두 왕자의 경계를 살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와 손을 잡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안 그러면 둘 모두의 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둘 중에는 리머튼이 나았다.
리머튼은 전쟁 때 실책으로 큰 궁지에 몰렸으니, 그를 더욱 중요하게 여겨주리라.
‘하지만…….’
오만한 리머튼의 눈동자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착 가라앉았다. 도저히 그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절대 리머튼과 손을 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감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구박받아 살아온 레이몬드의 감은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으아아. 어쩌지? 난 그냥 성공해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머리를 쥐어뜯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뜻밖의 연락이 왔다.
“백작님, 통신구로 연락이 왔습니다.”
“누구?”
“소피아 공주마마십니다.”
“……!”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그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연락이 온 것이다.
* * *
인형 같은 차가운 얼굴이 수정구 너머에 나타나 있었다.
워낙 인형 같아 수정구에 그려진 그림 같이도 느껴졌다.
“마마?”
-…….
소피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묘한 시선으로 보고만 있었다.
‘뭐야? 왜 연락한 거야?’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심심해서 시비라도 걸려고 연락한 건가?’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몰랐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간 소식은 들었어요. 여러 훌륭한 일을 해냈더군요.
“과찬입니다.”
레이몬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웬일이야? 저 버릇없는 공주가 이런 칭찬을 다 하고?’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
-하지만 설마 당신의 주제를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잊지 마세요. 당신이 천한 사생아 출신이란 걸.
“……!”
레이몬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싸가지가.’
확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
레이몬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도발하려는 게 아니야. 내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거야.’
소피아는 담담히 그를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차갑고, 싸가지 없는 얼굴이었지만, 무언가 속뜻을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여러 공을 세웠다고, 당신의 처지를 망각하면 곤란해요. 아직 당신을 폄훼해 보는 이들은 많아요.
“……!”
-이를테면 제 오라버니 같은 사람들 말이지요.
그제야 레이몬드는 소피아의 속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경고하고 있는 거야. 리머튼이 날 제대로 된 협력자로 여길 리가 없다는 것을! 협조해 봤자 나는 토사구팽당할 거라고!’
그렇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지만, 그는 사생아.
리머튼같이 자존심 강한 이가 사생아인 레이몬드를 진심으로 자신과 동격으로 여길 리가 없었다.
‘오히려 왕이 되면 처리하려고 들 가능성이 크겠지.’
레이몬드는 소피아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여튼. 말을 해도 꼭 저렇게 기분 나쁘게 할 필요 있나? 진짜 동생이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었을 텐데.’
그때, 소피아가 말했다.
-제 말이 기분 나쁜가요?
“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해지세요.
“…….”
소피아가 그를 똑바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당신이 환자와 백성을 위한 지고한 이상을 지니고 있음은 알고 있어요.
의외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힘없는 이상은 공허할 뿐이에요. 이대로라면 당신은 힘 있는 자들에게 휘둘리다가 희생당할 거예요.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당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살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세요. 그게 당신이 당당히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 수 있는 방법이에요.
“…….”
레이몬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 맞아.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뜻대로 살려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강한 힘을 지녀야 해.’
이번 리머튼의 수작을 넘어가면 끝일까?
아니, 그를 위협하는 수작은 끝없이 이어질 거다.
그가 얌전히 힐러의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위협이 사라질까?
절대로.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컸다.
그가 조용한 삶을 바란다고 해도 끝없는 외압이 들어올 거다.
그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그딴 위협 따위 무시할 만한 힘을 지니는 것.
‘그러려면 일단 제후가 되어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힐러의 삶을 살고자 해도 힘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인 게, 고래로 얼마나 많은 훌륭한 성인(聖人)들이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가?
그들의 공통점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지만, 힘이 없었다는 거다.
레이몬드도 같은 꼴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렇게 되지 않고 뜻하는 대로 살려면 힘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까?”
레이몬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는 소피아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말투만 보면 완전히 싸가지인데, 항상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소피아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특별히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니.
“…….”
그러면 뭔가?
-그저 빚을 갚으려는 것일 뿐이에요.
“빚 말입니까?”
‘이전 내가 치료해 준 걸 아직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소피아가 정말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어린 시절, 저와 놀아주었던 빚을 갚으려는 것뿐이에요. 어마마마가 돌아가신 이후, 저와 진심으로 어울려주었던 사람은 당신밖에 없었으니까.
“…….”
-전 빚 지고 사는 게 싫을 뿐, 당신을 좋아하거나 해서 그러는 건 절대로 아니니…… 그만 끊어요.
소피아는 툭 통신을 꺼버렸고, 레이몬드는 잠시 묘한 눈으로 꺼진 통신구를 바라보았다.
‘……방금 부끄러워한 것 맞지?’
* * *
결국, 레이몬드는 리머튼의 제안을 거절했다.
리머튼은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갈았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찔끔 겁이 났으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뒤였다.
라오와 메빈슨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님?”
“이기적인 귀족놈들이 쉽게 고개를 숙일 리가 없습니다!”
레이몬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물러설 수 없어. 이제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내야 해.’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이 있었다.
혹시나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을 대비해 미리 영주들을 공략할 방책을 몇 가지 준비해 놨다는 거다.
‘영주들이 내 말에 쉽게 따르지 않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하필 공교롭게, 레이몬드가 준비한 방책들은 리머튼 파의 영주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방책을 사용하는 게 꺼려졌겠지만. 리머튼 파의 귀족을 건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리머튼이 먼저 적대적으로 나온 이상, 더는 주저할 게 없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그러니 반격해야 했다.
‘라팔드 지방에서 리머튼의 영향력을 대폭 잘라내야 해.’
그렇게 되면 리머튼에게도 제법 아픈 일격일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방책을 떠올렸다.
‘내 힐러로서의 능력을 이용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