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17
#닥터 플레이어 217화
“치워.”
“소피아, 사랑하는 내 동생.”
“경고할 테니 치워.”
“너에게 기회를 주마.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널 살려주마. 널 이인자의 자리에 앉혀주마.”
소피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짜악!
그리고 카이른의 뺨을 후려갈겼다.
“……!”
“더러운 손 치우라고 했지.”
카이른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호되게 맞은 탓에 그의 뺨이 빨갛게 변하였다
그는 곧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실례를 범해 미안하구나. 네 뜻은 알겠다. 이만 돌아가거라.”
소피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등을 돌렸다.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등에 꽂혔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거라. 안 그러면 넌 죽게 될 테니.”
소피아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밖으로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네, 궁으로 돌아가겠어요.”
“모시겠습니다.”
소피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서고 있긴 하지만, 사실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카이른은 왕위에 오르게 될 거다.
카이른의 말처럼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말이다.
‘기적.’
소피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레이몬드밖에 없었다.
* * *
늦은 밤.
레이몬드는 영주 성 꼭대기에서 가만히 성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펠로우로 승급하면서 얻은 지치지 않은 괴물 속성 덕분인가?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진 않네.’
레이몬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도통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부스럭 인기척이 들려왔다.
올라온 인물을 보고 레이몬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제자님?”
크리스틴이었다!
“마스터? 여기 계셨어요? 거참, 우연이네요.”
그녀는 우연히 만난 거라는 듯 어색하게 놀란 눈을 하였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잠이 안 와서 바람이나 쐬려고요. 마스터도 한잔하실래요?”
그녀는 술병을 내밀었다.
레이몬드는 술병을 보고 놀란 얼굴을 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비싼’ 와인이었다!
한 병당 천 페나를 넘는!
‘이거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와인이잖아.’
소심쟁이 레이몬드는 떨어뜨릴까 봐 긴장하며 와인 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와인 가격이?”
“비싸요. 한 병에 2천 페나?”
“2, 2천 페나?”
“본가에 갔을 때 몇 병 훔쳐왔어요. 잘했죠?”
“네, 아주 잘했습니다. 역시 자랑스러운 제자님답습니다.”
역시 크리스틴!
환자도 잘 보고, 돈도 잘 구해오고, 비싼 와인도 잘 훔쳐오고.
완벽한 제자였다.
“자, 여기 마스터도 같이 드세요.”
레이몬드는 피식 웃었다.
우연히 만난 거라면서 잔은 두 잔을 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비싼 와인이라 그런지, 목 넘김이 예술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안주로 큐브 스테이크도 가져왔다.
“이 스테이크는?”
“한슨 경한테 부탁한 스테이크예요.”
역시 한슨.
큐브 스테이크도 예술이었다.
비싼 와인과 한슨의 스테이크를 먹으니 조금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다.
‘아, 나도 아무런 걱정 없이 이런 와인이나 맨날 맨날 사 먹으며 살고 싶다.’
레이몬드는 실없이 그런 생각을 하였다.
‘물론 지금도 사 먹을 수는 있긴 하지만. 어차피 빚더미라.’
빚을 어마어마하게 지니 좋은 게 있긴 했다.
과소비해도 별반 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빚쟁이 처지를 위안하다가 레이몬드는 더 울적해져 버렸다.
‘아니야. 테른 후작이랑 이야기도 잘 되었으니, 운하가 개통되고, 의료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빚도 금방 갚을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크리스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없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그녀 덕분에 복잡한 마음이 상당 부분 가셨다는 걸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네?”
“저 위로해 주려고 온 거죠?”
“아니요? 그냥 술 마시러 온 건데요? 비싼 술이라 맛있죠?”
크리스틴은 싱글 웃음을 지었다. 칠흑 같은 머리에 맑은 달빛이 닿아 비산했다.
그녀는 다시금 성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 쓰지 말라는 듯.
그런 그녀의 배려가 레이몬드의 마음을 잔잔히 적셨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게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레이몬드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잠시의 정적 후.
레이몬드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제자님.”
“……네?”
“정말 미운, 가장 증오하는 원수를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
크리스틴은 잠시 흠칫했다.
레이몬드가 한 질문의 뜻을 알아차린 거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 치료할 것 같아요.”
“그게 힐러의 자세니까요?”
레이몬드는 그녀가 이전에도 작은 성녀로 칭송받았다는 걸 떠올렸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만은 레이몬드 이상인 그녀!
그런 그녀라면 당연히 원수라도 치료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의외의 답을 하였다.
“그대로 죽게 하면 너무 싱겁잖아요.”
“네?”
“살려서 제대로 원한을 갚아줘야죠. 제대로 된 속죄도 안 해놓고 죽긴 누구 멋대로 죽어요?”
“…….”
“살린 다음, 살아난 게 후회스러울 정도로 복수를 해줘야죠. 아, 그리고 뜯어낼 수 있는 게 있으면 다 뜯어내고요.”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무시무시한. 그녀다운 답변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무서운 면도 있는 제자님이셨지.’
이후,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레이몬드는 생각에 잠겼고, 크리스틴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내려가 볼게요. 마스터.”
계단으로 사라지기 전, 크리스틴이 불쑥 말했다.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마스터께서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가장 후회가 남지 않을 선택을 하세요.”
“……!”
“어떤 선택을 하든, 나 크리스튼 드 래번은 마스터를 지지할 테니까요.”
그녀는 풀네임을 언급했다.
만약 레이몬드의 선택으로 안 좋은 상황이 생겨도 래번 공작가의 힘을 동원해 그를 돕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아직 아버지는 카이른 전하를 지지하고 있지만.’
그녀가 후계로 입지를 다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공작가의 주인은 래번 공작이었다. 그리고 래번 공작은 카이른을 지지했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경우, 아버지, 래번 공작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레이몬드의 힘이 되리라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크리스틴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등을 돌린 채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레이몬드는 한숨을 내쉰 후 잔에 남은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켰다.
“복수…… 라.”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래 나는 속물이었으니…… 나쁜 힐러가 되어도 되겠지.”
* * *
다음 날.
레이몬드는 갈먼과 만났다.
“치료해 보겠습니다.”
“……!”
재상 갈먼은 눈을 부릅떴다.
“정말 고맙네!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아네. 자네의 마음 이해하니……!”
하지만 레이몬드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거래이니까요.”
“거래?”
“네, 전 라팔드 지방을 책임지는 제후입니다. 확실한 대가를 약속하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겠습니다.”
레이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살려서 제대로 원한을 갚아줘야죠.’
크리스틴이 어제 한 말이었다.
‘그래, 이번 기회로 국왕 전하께 커다랗게 한 방 먹이고 말겠어.’
레이몬드는 어젯밤 깊게 고민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깊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 내렸다.
단순한 증오감으로 외면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사안이란 걸.
‘이대로 카이른이 왕위에 오르면 어떤 후폭풍이 몰아칠지 몰라. 그걸 증오심 때문에 외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이 있었다.
‘제자님의 말이 맞아. 이대로 국왕이 죽으면, 난 어떤 복수도 못 하고 허무하게 가장 증오하는 이을 잃게 되는 거야.’
그렇게 잘못해놓고 죽긴 누구 마음대로 죽는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짧은 사과?
가당치도 않았다.
고작 그런 거로 지금껏 쌓은 그의 한을 풀 수 없었다.
‘정확히 어떤 복수를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명확한 건 있었다.
‘어마어마한 보상을 뜯어낼 수는 있겠지.’
레이몬드는 ‘나쁜 힐러’가 되기로 했다.
환자의 사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탈탈 터는 나쁜 힐러 말이다.
‘날강도 소리가 나올 정도로 탈탈 털어주겠어. 아예 빈털터리 왕으로 만들어주겠어.’
레이몬드는 다짐했다.
국왕 오든을 그의 ‘호구 뜯기 프로젝트’의 최고 호구로 만들겠다고.
마침 기분 좋은 퀘스트가 떠올랐다.
[최악의 진상에게 보상을 뜯어내라!](인술 퀘스트)
선행도 : 없음.
난이도 : 하
퀘스트 설명 : 당신에게 상처를 준 최악의 진상이 치료를 청하고 있습니다! 진상이라도 환자는 환자. 대신, 나쁜 힐러가 되어 보상을 뜯어내십시오! 그간 당신에게 했던 잘못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 보상 뜯기
보상 : 뜯어내는 보상에 따라 다름
특전 : 통쾌한 기분
그전에 레이몬드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짚었다.
“먼저 한 가지 분명히 약속해 주어야 할 게 있습니다. 치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말아주십시오.”
중요한 문제였다.
S급 힐로 치료하지 못했다면, 굉장히 심각한 상태일 터. 레이몬드도 치료를 장담하지 못했다.
“그거야 당연히…….”
“각하의 모든 걸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재상 갈먼은 레이몬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카이른이 수작을 부리려 해도 그의 정치적 역량을 모두 동원해 막아달라는 것이다.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지. 자네에게 어떤 책임도 묻는 일 없도록 하겠네.”
갈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가는? 어떤 보상을 주면 되겠나?”
“첫째로 치료비로 400만 페나를 지불해 주십시오.”
“……!”
재상 갈먼은 눈을 부릅떴다.
어마어마한 치료비였다!
세상에 어떤 힐러도 이만한 치료비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건……!”
“싫다면, 치료는 없습니다.”
단호한 음성.
레이몬드가 진심임을 깨달은 갈먼은 침음을 삼켰다.
“400만 페나는…….”
“아, 세금을 올려서 마련하는 건 삼가주십시오. 그래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왕가의 보물을 모두 팔아서라도 말이지요.”
레이몬드는 어린 시절 왕성에서 봤던 유서 깊은 예술품과 보물들을 떠올렸다.
역사 깊은 왕국답게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보물이 작지 않았다.
그 보물들을 모조리 처분하면 400만 페나는 마련할 수 있을 거다.
‘아니, 모자라려나? 모자라면 국왕의 갑옷과 보검을 팔아서라도 알아서 마련하겠지. 왕관의 보석을 녹여 팔아도 되고. 이참에 조금 간소한 왕관으로 바꿔도 되잖아? 어쨌든 최소 400만 페나는 받아야겠어.’
돈 말고도 받아낼 게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