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325
제 325화
제갈린은 뒤에서 사람 기척 하나가 화살처럼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일견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나 다음 행보를 예지하기 어려운 움직임.
‘삼재보법이 거기까지 성취할 수 있는 거였나.’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것은 강호를 통틀어도 단 한 명뿐.
헛웃음이 나왔다.
‘삼재보법은 기초로 좋다 말하긴 하였지. 그러나 극성 뒤에 다시 극성을 찾을 줄은 몰랐거늘.’
그의 제자는 그런 존재였다.
그가 하나를 이야기하면 둘이나 셋을 들고 오곤 했고.
설령 들고 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과정을 무척이나 즐겼다.
특히나 보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생포할 때든, 환자를 이송할 때든 어디 하나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다.
진천희의 가장 큰 성취를 꼽는다면 아마 보법일 터.
특히나 현원전단신공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먼저 내딛는 방위는, 적에게 결코 승기를 내주지 않았다.
이기진 않으나 지지는 않는다.
지지는 않아도 도망칠 수는 있다.
일견 합리주의자의 실용적 선택으로 보일 수 있으나.
‘내 제자는 목숨 앞에서 도망치는 법이 없지.’
제자가 도망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등 뒤에 짊어질 목숨이 없을 때뿐.
지금도 마찬가지.
진천희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졌다.
사람의 목숨.
그 아이는 왜인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평범한 아이가 대체 어떤 과거를 겪으면 그렇게 광적인 집착을 갖게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아이는 천재이고.
그 아이는 선인이며.
그 아이는 제자이니.
스르릉-
“조금만 더 자기 자신을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
제갈린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키가 십 척에 가까워 제갈린조차도 고개를 들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괴인.
과거에 그와 싸웠던 혈선교의 동천군은 이제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 나타났다.
제갈린은 그의 모습을 무심히 눈에 담았다.
진천희와는 조금 색이 다르나 그래도 푸른빛.
‘그래도 강시가 되어 오는 것보다는 낫나……?’
옛날부터 강시를 죽이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죽여도 죽여도 일어나는 송장을 때리는 건 성가시다.
‘사실, 이 쓰레기가 어찌 변하든 상관은 없지. 오늘 처분할 테니까.’
부러진 부채는 제자가 가지고 있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눈처럼 반짝이는 연검을 꺼내들었다.
마치 종잇장처럼 얇은 칼날로 이루어진 이 연검은 허리띠 안쪽에 숨겨져 그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강호에서도 제갈린이 이 연검을 사용하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는 신병이기를 들고 다니기 보다는 공격해 오는 상대의 무기를 뺏어서 도륙하는 것을 즐겨 했고.
이 연검을 꺼냈을 때 살아있는 이는 없었으니.
“크르르르르! 준비는 끝났겠지? 그렇다면 순순히 죽어 주실까!”
괴물이 된 동천군의 몸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거세게 만들어져 휘몰아쳤다.
주변의 지면을 흡사 믹서기처럼 갈아 버리며, 모든 조각이 나선으로 회전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상태로 그의 거구가 돌진해 온다.
찰나의 순간.
시간으로 치면 눈 한 번도 깜빡이지 못할 정도로 짧은 사이.
동천군은 기이하게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몰아(沒我)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무를 버려, 등선의 길마저 포기한 그에게 무학의 축복은 오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감각인 것인가.
한없이 느리게 지나가는 기괴한 감각 속에서.
동천군으로서도 평생 동안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체감 공간 속에서 그는 제갈린의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말았다.
“그것은 악수로구나. 쓰레기.”
동시에 그는 제갈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느린 시간 감각 속에서 오로지 ‘그’만은 보이지 않는다니.
흩날리는 나뭇잎 한 장, 튀어 오르는 돌멩이 하나 모두가 선연할진대.
그 순간, 드디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제갈린의 연검.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얇은 칼날이 흡사 빛처럼 변하여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스커커컥!
동천군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크아아아아악!”
핏줄기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 무슨,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속도라니?! 거기에 금강불괴인 내 육체를 단번에 잘랐단 말인가!’
푸확!
팔이 잘려 나가면서 생겨난 충격파가 그를 덮친다.
동천구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가고. 그가 두르고 있던 소용돌이는 폭발하며 흩어졌다.
불과 눈 한 번 깜빡일 그 순간, 그는 그대로 처참히 나가떨어졌다.
콰광!
동천군의 거구가 흡사 월면의 크리에이터처럼 깊숙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이…… 어찌, 어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태을단선검 초월오의. 심무절학 초속극쾌일섬.”
“……!”
제갈린이 현경을 목전에 앞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심무절학을 저리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니!
무(武)를 버린 자에게 제갈린은 차분히 답했다.
“짐승이 되어 버린 네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저승길 가는 선물로 가르쳐 주마. 의념보다 빠른 것은 검이니. 그 이치를 네가 알겠느냐?”
차갑게 내려다보는 눈은 흡사 버러지를 바라보듯 경멸에 차 있었고.
이 가벼운 무학조차 생사비무의 형식이기에 마지못해 조금 읊어 주는 것일 뿐.
제갈린은 눈앞의 벌레를 엄지로 으깨고 싶을 뿐이었다.
오만했다.
등선조차 포기하고 더욱 강해진 자신을 그런 경멸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동천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네노오오오오옴!”
“어떤 방법으로 인지할 수 없을 만큼의 극한의 속력을 얻어냈는지까지는 답하기 귀찮다.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저능한 놈이 혈선교의 최고 간부라면 고작 그만한 집단인 거겠지.”
“감히 네가 나 동천군을 멸시하느냐!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혈선님의 권속이 된 이 나를 무시해에에에에?!”
위우우웅-
잘려져 땅을 구르던 팔이 스스로 허공에 떠올랐다.
허공섭물의 묘리가 담긴 팔이 동천군의 잘려 나간 팔에 도로 달라붙었다.
치이이이익-
피 연기가 솟아오르며 팔의 단면이 재생하여 달라붙었다.
그제야 제갈린의 눈에 이채가 조금 생겼다.
“흐음, 그 재생력은 정말 진귀하군. 네 녀석의 표본을 잘라 가져가면 제자가 아주 좋아하겠어.”
잘린 팔이 부술도 없이 달라붙었음에도, 제갈린은 태연했다.
오히려 약간의 호기심과 기대감이 조금 생겼다.
그의 제자는 가만히 있는 법이 없는 사람이고, 그 녀석을 붙잡아 두려면 괜찮은 장난감이 필요했다.
어쩌면 저 팔을 표본으로 가져간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인류의 진보’니 ‘신약 개발’이니 떠들면서 스승을 좀 더 즐겁게 해 줄지도 몰랐다.
“내 반드시 네놈을 으스러뜨릴 것이다!”
동천군이 포효했다.
전투 재개.
동천군이 만들어 낸 폭풍이 주변을 터뜨렸다.
단순히 권풍이라고는 취급할 수 없는, 흡사 자연재해와도 같은 위력!
제갈린은 그저 푸른 안광으로 적의 공격보다 조금 먼저 움직일 뿐이었다.
현원전단신공은 이미 동천군의 무공을 뜯어냈다.
어떤 초식을 날릴지, 그 위력은 어떨지, 권로는 어떤 모습을 그릴지.
이미 모든 것을 분해하고, 재조립을 마쳤다.
제갈린은 태을단선검 초월오의로 놈의 사지를 토막 쳤고, 그때마다 놈은 노호성을 터뜨리며 스스로의 몸을 도로 붙였다.
베는 자와 붙이는 자의 싸움이었다.
상식과 무의를 파괴하며,
결코 무인과 무인의 싸움이라고 할 수 없는 아득한 전투.
그러다가 문득.
동천군은 제갈린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군. 놈이 인간인 이상 지칠 수밖에!’
자신이야 무한에 가까운 체력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졌다고나 하나 제갈린은 고작해야 인간.
피륙으로 이루어진 이상 상처와 피로는 누적되어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장기전으로 시간을 끈다면 자신이 승리할 터.
빛과 바람의 폭풍우 속에서 동천군은 더욱더 제갈린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쿠과가가가각!
제갈린의 검이 폭풍우를 찢는다.
허나, 다시 폭풍우가 재생된다. 인간은 결코 자연재해를 막을 수 없으니!
그 순간, 제갈린의 입술이 벌어졌다.
“장군이다.”
그가 만들어 낸 빛이 달빛을 찢었다.
달이 바닥으로 핑그르르-
‘어? 돌고 있는 건 내 머리인가?’
동천군은 자신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린 머리를 향해 제갈린이 말했다.
“네 녀석의 행동이 어떨지 이미 알고 있으니. 네 녀석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이야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콰직-
벌레를 밟듯.
제갈린의 신발이 그의 두개골을 으깨고.
동시에 연검이 잘린 머리를 수십 조각 내며 흩었다.
“이 정도면 살아남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살점이 꿈틀거리고 있다.
“유호.”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제갈린 뒤로 유호가 나타났다.
“이 시체를 보관해 주게나. 좋은 표본이 되겠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일찍 죽어 주지 못해 미안하군그래. 그 녀석이 내 목숨을 결국 살려 주었으니 말이네. 좀 더 인계(人界)에 있어야 할 터인데 괜찮은가?”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후후후, 언제나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네.”
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도련놈은 안 도와주시렵니까?”
“기왕 미끼를 물러 갔으니, 어찌 해결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스승이 된 도리겠지. 내가 여기서 도와주러 움직인다면 필시 그걸 이용해 사람을 더 살리러 할 거네. 허나, 나는 그들을 그렇게까지 도와주고 싶지는 않거든?”
“허면.”
“적당히 파괴되고, 적당히 복구되는 게 좋겠지. 중용(中庸)의 도가 필요할 때라고나 할까?”
이상한 사제 관계다.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를 향해 수 싸움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희가 새 표본을 즐거워해야 할 텐데.”
스승은 제자의 성장을 여전히 기뻐하고 있다.
* * *
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음에도 진천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승리하시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 지존천마에서도 불세출의 천재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실제로 같이 지내며 겪은 스승 제갈린은 소름 끼치도록 탈인간을 한 능력자인 것은 맞았으니까.
‘거기다가 질 것 같은 싸움에 만용을 부릴 분도 아니시지.’
천하 십 대 고수에 필적하는 십천군.
그것도 한층 더 강해진 동천군을 어찌 상대하실지 걱정은 되나, 그래도 믿자.
그는 진천희 자신을 능가하는 천재이자, 하늘 같은 스승님이시니.
그보다는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겠지.
‘마교와 무림맹의 전투를 어떻게든 말린다!’
다행히 술제의 일갈에 사도련의 무인들이 일제히 퇴각을 한 게 호재였다.
만약 사도련이 끼어 있었다면 진천희로서도 방도가 없었을 터.
‘스승님은 사도련이 없어진 이 상황을 오히려 제자 쫓아내는 데 쓰셨네.’
이런 식으로 책략을 쓰는 걸 보고, 어찌 보면 스승님이 인간성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허나, 진천희는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승님께서는 알고 계셔.’
지금은 혈선교의 수작에 양측 모두 전력이 손실된 상태.
이거라면 상당한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