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62
유소진이 채찍을 당기자 기수는 힘없이 끌려갔다.
저항하려고 무의식중에 진기를 끌어 올리자 빨려 나가는 속도만 빨라졌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 서너 배는 빨리 흡수되는 것 같았다.
‘이러다간 진짜 진기는 쪽쪽 다 빨리고 몸은 토막 나고 말 거야!’
기수는 간절한 심정으로 신을 불렀다.
[신님! 제발 저를 좀 구해주세요!]
그러나 야속하게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 지금 죽게 생겼다고요! 적한테 이런 진공청소기 같은 괴물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미리 좀 알려주던가 했어야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기수는 결국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함을 알았다.
기수는 일단 저항을 멈추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진기를 전부 끌어 모아 딱 한 번의 찬스로 염정구심술을 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지금 그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이었다.
파천강기 같은 건 시전 준비 중에 진기를 빨릴 것이고. 설령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고 해도 현재의 진기 레벨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유소진은 단지 혼세흡정공만 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잔백지를 흡수하는 특이한 호신강기도 보여준 바 있었다.
힘으로 안 된다면 남은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유소진이 전혀 방비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살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염정구심술엔 상대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과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술법이 있었다.
처음엔 남을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게 재미있어서 몇 번 써먹었지만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용을 자제했다.
그리고 혈천제의 마옥혈린수에 당한 이후에는 독심술 쪽만 몇 번 사용했을 뿐 조종술은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공연히 성격이 비슷한 술법을 쓰다가 염정구심술의 그 뇌를 쪼개는 통증이 유발되기라도 할까봐 겁먹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 여자한테 몸이 토막 나서 죽게 생겼는데 아무 것도 안 해보고 당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마옥혈린수 때문에 뇌가 터져 죽는다 해도 차라리 그 편이 토막시체 되는 동안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기수는 끌려가는 동안 염정구심술의 요결을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본 후 진기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조종술을 운기했다.
마옥혈린수 때 아팠던 부위에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미약했다.
순간, 유소진의 눈동자 초점이 풀렸다.
“됐다! 성공이야!”
기수는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끌어올린 진기가 몽땅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야 했다. 마지막에 박박 긁어서 전부 끌어올린 진기라 기수의 단전은 텅! 비게 되었다.
기수는 즉시 유소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까지 빼앗아 간 진기를 전부 돌려줘!”
“그건 불가능해. 되돌려주는 방법은 없어.”
기수는 당혹스러웠다.
“마, 말도 안 돼!….. 우, 우선 내 몸과 연결된 이 채찍부터 떼어 내.”
채찍은 곧 몸에서 분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일단 살 것 같았다.
기수는 유소진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비수 자루에 손을 댔다.
진기를 전부 빨아들인 그녀가 미워서 당장 죽이고 싶어진 것이다.
“칼을 내게 줘.”
“뭐 하려는 거지?”
유소진이 손을 움츠리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기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 어째서 조종술이 통하지 않는 거지?’
그러나 다행히 칼에서 손을 떼니까 그녀 눈의 초점은 다시 풀렸다.
‘아! 내게 진기가 없어서 그렇구나!’
염정구심술은 일단 상대의 심리와 동조되고 나면 정신력으로 컨트롤하는 부분이 많아서 어느 정도 조종 상태가 유지되지만 방금처럼 칼을 빼앗는 식으로 생존본능을 위협하는 행동을 하면 깨어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공이 상대보다 강할 때는 그런 상황도 힘으로 눌러서 명령상태를 유지할 수 있지만 지금의 자신은 단 한 줌의 진기도 모을 수 없는 상태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전부 빨아들인 혼세흡정공에 이가 갈렸다.
기수는 유소진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공이 없는 지금의 내가 서툰 공격을 했다가는….’
유소진은 본능적으로 방어할 것이고 염정구심술은 그 순간 깨질 것이었다.
그녀가 깨어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결국 도망치는 정도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인가?’
기수는 무시무시한 적을 제압한 이 천재일우의 기회에 그냥 살려두고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심리장악 상태가 겨우 간당간당 유지되고 있는 이때에 상대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명령을 시키는 것은 모험이었다.
기수는 풀숲에 핀 야생화 하나를 꺾어 건네며 말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너희 오빠 무덤에 놓고 지나간 얘기를 하면서 날이 샐 때까지 앉아있는 거야. 알았지?”
유소진은 꽃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무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시켜서 그나마 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기수는 곧장 돌아서서 선풍비를 시전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 했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습관처럼 선풍비를 시전하니까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어서 마치 계단이 하나 더 있는 줄 알고 발을 헛디뎠을 때처럼 온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스텝이 엉켜버리고 말았다.
“씨발!…..”
욕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유소진을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짱돌 하나 집어 들고 그녀 뒤통수를 찍고 싶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움직임을 고수가 얼마나 쉽게 간파하고 피해낼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도저히 시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 여길 피하고 보자.’
기수는 곧장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한 길로 갔다가는 나중에라도 유소진에게 추격당할까봐 겁이 났다. 추적술 같은 걸 익히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공이 있을 때는 훨씬 더 높고 경사가 급한 낭떠러지도 붕붕 날아다녔지만 지금은 손발이 후들후들 떨렸다.
자일도 없이 암벽 등반하는 기분으로 얼마를 갔을까.
쩌렁쩌렁한 호통이 들려왔다.
“기수! 어디 있느냐!”
기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유소진이 염정구심술에서 풀려나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풀렸지?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조종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나?’
도망치기를 택한 건 잘 한 선택 같았다.
기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여 눈에 덜 띄는 곳으로 이동했다.
자기와 달리 유소진은 이런 절벽쯤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에 발견되는 즉시 끝장이었다.
‘아! 씨발…. 인간 양기수. 어쩌다 이런 꼴이 됐냐…’
존나 서러워서 눈물까지 한 방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우는 건 나중이고 일단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바위와 나무로 가려지는 장소를 찾아 숨은 뒤에야 기수는 겨우 숨을 둘릴 수 있었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버텨야겠군.’
유소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청력도 예전만 못했다.
‘아! 진짜 신세 처량하네.’
일단은 조용히 참고 버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문득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내공이란 것이, 많이 사용한다 해도 운기조식을 하면 보충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도 운기조식으로 새로운 내공을 보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단전을 파괴당해서 무공을 폐하게 된 것은 아니니까 금방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수는 즉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암벽에 매달린 자세라서 좀 애매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기가 모였다.
‘됐다! 성공이야.’
기수는 집중하여 2시간 정도 운기를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분명히 단전은 그대로 있었다. 엄청난 양의 내공을 운용하던 저수지는 그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데, 똑같은 운기조식을 해도 모이는 양이 달랐다.
예전엔 파천강기로 내공을 펑펑 써도 운기조식 한 번 할 때마다 소모된 양 이상을 모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쌓이는 양이 미미했다.
‘왜 이러지? 혼세흡정공이 뭔가 다른 피해도 입힌 건가?’
그러나 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진원지기가 충실하지 않으면 같은 방식으로 운기해도 효율이 떨어진다고 봐야겠군.’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니까 내공이 깊은 고수와 하수 사이에는 운기조식할 때 드나드는 진기의 양도 달라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뭐야! 씨발… 내공도 부익부 빈익빈인 건가?’
예전의 그였다면 그게 당연하다고 했을 것이었다.
고수가 되기 위해 한 노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것이다.
그러나 진원지기가 텅 빈 지금, 그것보다 불공평한 일은 없었다.
‘돈이 돈을 버는 건 그렇다 쳐도, 내공도 바탕이 있어야 빨리 모인다는 건 말이 안 돼. 이건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이 마음에 안 들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면 되지만, 진기의 모이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누구를 상대로 싸운단 말인가.
기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이라면 1갑자의 내공을 모으기 위해 정말 60년이 걸릴지도 몰라.’
60년 걸려 1갑자의 내공을 모으는 게 진정한 의미의 공평함일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10갑자, 잘 하면 20갑자 가까이 되는 내공을 가지고 있던 그이다 보니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는 거고, 눈을 뜨면 탁지연이 예쁜 얼굴로 자기 품에 안겨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말 팔을 꼬집어보기까지 했지만 꿈은 분명히 아니었다.
‘나쁜 년!’
모든 원망이 유소진에게 쏠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모은 내공인데, 그렇게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가져갈 수 있지?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생각할수록 배를 저어오는 도중에 죽이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죽일지 살릴지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살려주는 쪽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미녀고 아니고를 떠나서 아녀자니까…
하지만 상대는 12사도 중 한 명.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죽여야 했다.
그런데 자기 무공에 자신을 가지고, 오빠도 이겼으니까 여동생쯤이야 하는 생각에, 꼴사납게 범장과 기수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도록 배려까지 해준답시고 까불다가 이렇게 끔찍한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번에 만나면 다른 거 없다. 일단 죽이고 본다!’
설령 12사도 중에 유소진보다 더 나약한, 이를테면 10살짜리 소녀가 있다고 해도 일단 죽인 다음에 슬퍼해주겠다고 굳게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건 미래의 일이고 당장은 살아남는 게 급했다.
처량한 분위기 맞춰주느라 그러는지 비까지 내렸다.
그래도 무공의 경기가 높았던 덕분인지 보통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건장한 몸이라 옷이 흠뻑 젖어도 추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면 탁지연부터 빼내와야겠지.’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내공이 없는 그는 범장의 얼굴로 역용을 할 수 없었다. 골격과 근육의 형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꾼 후 유지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절대로 들키지 않는 역용술이긴 하지만 그 대신 진기가 소모되는 것이다.
‘이 얼굴로 수로맹 27채로 접근했다간….’
아마 지금의 몸 상태로는 육대기의 탈백도에 1초식도 못 버틸 것이었다.
‘우리가 늘 가던 창고로 찾아가면?’
그러나 그것도 위험했다. 우선 탁지연이 그리로 자기를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곳은 베개로 입을 막지 않아도 되는 밀회장소일 뿐이었던 것이다.
‘수로맹 쪽으론 아예 가질 말아야겠어.’
탁지연은 워낙 똑똑하니까 혼자서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자기가 더 걱정이었다.
‘백리세가로 갈까?’
거기라면 자기를 극진히 대접해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내공이 제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상황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유소진의 귀에 그 소식이 전해진다면 백리세가 전체가 나선다고 해도 자기를 보호해줄 수 없었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는 가면 안 돼.’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서글퍼졌다.
한 때 자신을 얼굴 없는 히어로라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파워가 사라지고 나니까 보통사람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햐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어디 편히 가서 쉴 집도 한 채 없구나.’
존나 외로움이 몰려왔다.
‘어디 동굴이라도 하나 찾아서 연공이나 하자.’
그게 최선일 것 같았다. 밖으로 싸돌아다니다가 괜히 얼굴을 아는 삼황맹 졸개라도 만나면 창피하게 하수 손에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1갑자 모으기 위해 앞으로 60년이 걸리더라도 그게 자신의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씨발… 60년. 엄마 늙어서 돌아가시겠네.’
이번엔 진짜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가 해주는 찌개하고 밥이 먹고 싶었다.
그렇게 절벽에 매달려 있다 보니 날이 새버렸다.
기수는 아침 햇살을 피해 좀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리고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유소진이 자기 오빠의 죽음에 얼마나 슬퍼하는지 옆에서 봤기 때문에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공이 없어져서인지 평소보다 빨리 배가 고프고 목도 말랐다.
기수는 밤새 내린 비로 젖어있는 나뭇가지와 암벽을 핥아서 갈증을 해소했고 굶주림은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꼬박 하루를 암벽에 붙어 있다가 둘째 날 밤이 되자 비로소 암벽을 마저 내려가 도보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유소진이라고 해도 자기가 하룻 동안 꼼짝 안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할 테니까 아직까지 근처에 머물러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도우심인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보다 훨씬 굵은 빗줄기가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됐어! 이 정도 폭우면 소리도 안 들리고 흔적도 안 남을 거야.’
기수는 최고의 탈출기회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를 꼬박 같은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팔다리가 뻣뻣하게 저려서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폭우로 몹시 미끄러워진 바위.
기수는 아차! 하는 순간 발을 헛디뎠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혹시라도 유소진이 들을까봐 기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