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60
잠시 후. 더욱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진송이 갑자기 기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사숙을 뵙습니다!”
기수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키려 했다.
“진노대. 왜 이러십니까? 사숙이라니요?”
“제가 잠시 생각이 깊지 못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조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으셨으니 제게는 사숙뻘 되십니다. 절 받으십시오.”
그러더니 이마를 땅에 대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강제로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어서 그와 마주 절을 했다.
“노대. 이러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우리 비룡검법의 참모습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부디 사숙께서 우리 문파를 이끌어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사숙께서는 사조님의 신물과 검술을 모두 전승하셨으니 당연히 말이 됩니다.”
기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파를 맡으라니.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옛날에 숱하게 읽은 무협지 중엔 주인공에게 문파도 주고, 손녀도 주고, 간도 주고, 쓸개도 주는 내용이 종종 있었지만 자기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리고 현재의 기수에겐 문파도, 간도, 쓸개도 다 필요 없었다.
무슨 무림 통일의 원대한 계획이라거나, 척마멸사의 사명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남의 문파나 세력을 갖다 뭐에 쓴단 말인가.
그는 오로지 남은 사도 6명을 처단하면 그걸로 족했다.
그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 남의 눈에 띄면 오히려 불편했다.
그래서 역용술까지 활용하여 은밀하게 강호행을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미 혈매궁 궁주로서 사매들과 60명의 부하들, 일월신교가 쳐들어와도 막아내는 기문진의 산채까지 보유한 상태.
비룡검문까지 가질 이유가 없었다.
대충 얘기를 들어 보니 남궁세가에게 당해 세력이 무너진 후 긴 세월동안 꽤 어려운 시간을 보낸 모양인데, 그렇다면 득보다는 짐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진노대. 일어나십시오. 전 이미 다른 곳에 매인 몸입니다. 비룡검문와의 인연은 검과 무공을 전해드리는 것 이상은 힘듭니다.”
“사숙!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십시오! 우리 비룡검문이 혈매궁의 휘하에 들어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정통을 이을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받아들이겠습니다.”
표정이나 말투로 봐서 정말 진지한 제안이었다.
원래 그들의 무공이었던 것을 돌려주면서 문파를 거저 받는다면 계산 상 큰 이익이기는 했다. 하다못해 문도들 앵벌이라도 시키면…
그러나 역시 도리상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얘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전 떠나겠습니다.”
기수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진송은 급히 사태를 수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문파의 호법을 맡아주십시오.”
“호법이라면…”
“검술을 전수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굳이 직책을 맡지 않아도…”
“이것은 운명입니다. 사조님의 영혼이 분명히 사숙을 우리 문파로 안내해주신 겁니다. 제발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진송은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애원했다.
기수는 그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데 뿌리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라도 들어주지 못하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검술을 모두 전수해드린 다음에는 언제든지 호법을 그만둘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사숙이 아닌 호법, 즉 아랫사람으로만 대해주십시오. 그 두 가지를 보장해주지 않으시면 하시라도 비룡검문과의 인연을 끝내겠습니다.”
“호법을 언제든지 그만둔다고요?”
“예. 그러니까 임시직입니다. 검법 전수만 수행하는…”
“으음….”
진송은 한참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대를 부탁합니다.”
“알겠네. 양호법…”
진송은 자기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조와의 인연이 이어졌다는 사실에 몹시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얼굴에 기쁨과 감동의 미소가 가득했다.
기수도 기분이 좋았다.
남궁세가 혼내줄 방법을 못 찾아서 일단 현지 상황을 봐가며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온 것인데, 비룡검문의 복수를 도와주면 자기는 손 안 대고 코풀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사매들이나 대장군부에 부담을 주지도 않으면서 무림맹에 속한 남궁세가를 혼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송이 말했다.
“이제 내 본명을 말해줘도 되겠군. 난 진백이라고 하네.”
“전 양기수입니다.”
실명을 밝히고 나니까 뭔가 더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다.
기수가 진백에게 청했다.
“문주님.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동안 놈들의 경비와 기문진 배치상황은 완벽히 다 파악했네. 제자들을 동원하여 들이치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하지만 이제 양호법을 만났으니 계획을 수정해야지. 사조님의 검술을 배워 제대로 된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그게 좋을 것 같군요.”
기수는 남궁세가 가주와 겨뤄 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림맹 소속 다른 문파의 장문인 정도 실력이라고 가정한다면, 진백의 현재 실력으로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최종 보스한테까지 가기도 어려운데, 보스를 이길 확률도 높지 않다면 아무리 명예를 위한 싸움이라고 해도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새벽이라면 언제라도 시간을 낼 수 있는데, 양호법도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매일 여기서 만날까요?”
“아니. 훨씬 좋은 곳이 있네. 나를 따라오게.”
진백은 좌우를 살핀 후 앞장서서 담을 넘었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장원 밖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경비가 삼엄하지만, 바깥쪽으로는 순찰 무사들을 한 번만 피하면 간단히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진백이 안내한 곳은 장원 담 밖에 조성된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다.
“이 안이라면 방해받지 않고 연공이 가능하지.”
진백이 죽림을 가리켰지만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주님. 저곳엔 기문진이 펼쳐져 있습니다.”
기수에겐 민감한 부분이었다.
진백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네. 남궁세가에서 펼친 진법이지. 그래서 안전하다는 거야. 내가 일부를 변형시켰거든. 어차피 기문진 쪽으로는 순찰도 안 돌지만, 돈다고 해도 내가 변형시킨 쪽으로 돌아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놨지.”
기수는 깜짝 놀랐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무극환혼진을 바꾸는 건 기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남이 만든 기문진을 변형시킬 정도라면 보통 실력이 아닌 것이다.
진백이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우리 비룡검문이 검술 다음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게 바로 기문진법이라네. 개파조사님이 본래 모산파의 속가제자이셨는데 엄청난 양의 기문둔갑 비서들을 남기셨지. 그건 전부 전해져 내려와서 익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검술에선 진전이 없었으니 부끄러운 일이지.”
“혹시…. 일월신교의 진법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일월신교? 거기라면 탈각왕이란 자가 제법 실력이 있지. 그는 혈영재천진과 혼천귀마진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 진법이 상당히 신묘하다고 들었는데, 혹시 파해법을 아십니까?”
“하하! 내 자랑은 아니네만, 탈각왕 정도의 실력으로는 내 이목을 속일 수 없지. 그가 자랑하는 두 진법은 천성만의보록이란 책에서 나온 것을 개량했을 뿐이거든.”
기수는 뛸듯이 기뻤다.
‘역시 사람은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거야!“
모른 척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법의 주인을 찾아주겠다고 결심했더니 이런 행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탈각왕의 기문진을 문제없이 뚫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옆에 있어준다면 이제 세상에 겁날 게 없었다.
“문주님. 남궁세가의 기문진 파해법을 제게도 가르쳐주십시오.”
“그야 어렵지 않지. 들어가면서 설명해주겠네.”
기수는 진백과 함께 죽림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설명을 들었다.
역시 기초부터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문진은 여전히 벽이 너무 높았다. 근본원리는 포기하고 그냥 새로운 타입의 기문진 하나 더 외우는 식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수분해부터 시작해서 삼각함수, 미분, 적분 다 체계적으로 공부하면 좋기야 하겠지만 무림에 공부하러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남들 잘 못 푸는 함수의 극한과 연속 관련 고난이도 문제 몇 개만 집중적으로 달달 외우는 현재의 스타일이 자기한테는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림 안에는 충분히 넓은 공간이 있었다.
기수는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검술 전수를 시작했다.
호법이 문주에게 검법을 가르치는, 좀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진백의 태도는 진지하고 경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일파의 문주답게 검술에 정통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도도 빨리 나갔다.
그렇게 이틀, 사흘 연속으로 새벽 연공을 함께 하다 보니 검술의 형을 완전히 전할 수 있었다.
진백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기수는 그런 그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지금 문주님은 예전만 못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조님의 검술을 배웠는데…”
“평생 익혀온 습관이 남아 있는 위에 약간은 이질적인 초식을 덧 씌웠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둘이 혼란을 일으켜서 위험해질 것입니다.”
진백도 노련한 고수라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었다.
“어쩌면 좋겠는가?”
“저와 집중적으로 대련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부탁하네!”
두 사람은 대나무를 잘라 만든 검을 들고 대련을 시작했다.
기수는 비룡검은 물론 월영검법, 때로는 탈백도와 혈매궁의 검법까지 자유자재로 섞어가며 진백을 몰아붙였다.
진백은 진땀을 흘렸다.
기수의 말대로 다급한 상황이 되니까 예전 버릇이 나와 버렸다.
거기엔 미세하지만 약점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도 기수는 정확하게 응징을 했다.
진백으로서는 진땀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정진했다.
기수와의 대련은 혼자 연공하는 것보다 10배는 더 효과가 있었다.
진백은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양호법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절륜한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그리고 이 압도적인 내공은 또 무엇인가?’
그가 비록 임시직을 선언했지만, 어떻게든 잡아둬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사조님이 정말 대단한 인연의 선물을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파의 흥망성쇠는 고수의 존재 유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법.
양호법 정도의 고수가 있다면 옛날의 영광을 되찾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남자를 잡아둘 수 있을까?’
딸이라도 있으면 사위를 삼고 싶었다.
얼굴엔 하자가 많지만, 사나이는 얼굴보다 능력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딸은 커녕 아내도 없는 홀아비였다.
제자도 전부 남자만 거두어 들였고, 사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방법이 있겠지.’
만약 양호법이 비룡검문의 이름을 걸고 강호행을 해주기만 한다면 당장 자기 목숨을 내어달라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평생 추구한 것은 비룡검문의 부흥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매일 대련으로 밤을 지샜다.
처음엔 진백이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상황은 조금씩 나아져갔다.
그러나 기수에게 문제가 생겼다.
새벽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진백 말고도 또 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 후 휴식시간에 찾아온 이향이 따져 물었다.
“너. 요즘 밤마다 어디 가는 거야?”
“어디 가다니? 숙소에서 자는데. 헤헤헤…”
기수는 뜨끔했지만 캐릭터에 충실했다.
이향이 계속 추궁했다.
“내가 네 방을 안 본 줄 알아? 침상이 비었던데?”
“아!… 요즘 들어 밤마다 설사가 잦아서…”
“웃기지 마! 마님이 날 들볶아서 그동안 죽는 줄 알았단 말야. 그동안 어디 갔었는지 바른대로 말해. 어서!”
남궁세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비룡검을 연마하고 있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
“내가 오늘 마님에게 가서 해명할게.”
“오늘 안 나타나면 너 내 손에 죽는다.”
이향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마님에게 엄청나게 시달렸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 마. 꼭 갈게.”
기수 입장에선 진백에게 오늘 새벽 수련에 빠져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게 고역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실대로 얘기했다.
“하하하! 젊음이란 좋군. 걱정 말게. 그녀와 만나는 날은 나 혼자 연공하도록 하지.”
다행히 진백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할 것 없네. 그보다, 양호법. 조심해야 하네. 그녀는 십절금왕문 문주의 딸 백서옥이니까. 자칫하면 정체가 탄로 날 수도 있어.”
“아!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십절금왕문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무림맹에서 만났던 백서린. 들어갈 데 잘록하게 들어가고, 나올 데는 확실하게 튀어나온 몸매의 소유자. 마님이 바로 그녀의 언니였던 것이다.
‘어쩐지 볼륨감이 남다르더라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얼굴도 좀 비슷했다. 동생 쪽이 좀 더 매력적이긴 하지만…
‘남궁세가와 십절금왕문이 사돈지간이었구나.’
명문정파끼리는 다들 끼리끼리 혼인하는 게 기본인 것 같았다.
기수는 그날 밤 이향을 만나 오랜만에 마님, 백서옥의 방으로 갔다.
“마님. 제가 왔습니다. 헤헤헤….”
그러나 반갑게 맞아줄 줄 알았던 그녀는 도끼눈을 부릅뜨고 노려볼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수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불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