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59
검은 그림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하게 이곳저곳을 살핀 후 지붕에서 내려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라? 지금 가는 곳은?….’
검은 그림자의 목적지는 놀랍게도 자신과 같았다.
숙소 앞에서, 기수는 그 검은 그림자가 바로 진노대, 진송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노대가 무림고수였다니… 놀랍군.’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다.
그가 왜 하인 행세를 하는지, 무엇을 얻으려고 잠입했는지 알고 싶었다.
진노대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하는 중에도 계속 그 생각이었다.
‘나와 비슷한 목적이라면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 반대로, 어쩌면 서로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기수는 결국 그와 얘기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늦은 점심 식사 후 이어진 짧은 휴식 시간.
기수는 진송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진노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 양십일. 말해보게.”
“여기 말고 조용한 곳에서 단 둘이 얘기했으면 좋겠는데요….”
“그레? 하하! 무슨 고민이기에?”
진송은 기꺼이 기수를 따라왔다.
창고 뒤에 단 둘이 있게 된 기수는 좌우를 살핀 후 물었다.
“어제 새벽에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그러자 이제까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던 진송의 표정이 급변했다.
부릅뜬 두 눈에선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검결한 손이 민첩하게 기수의 요혈을 찍어 왔다.
기수는 손을 저어 그의 공격을 막고 오히려 역으로 완맥을 잡았다.
순간, 진손의 손목이 뒤집히면서 강한 반탄력으로 기수의 손을 쳐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양십일…. 너….!”
“진노대…!”
진송은 기수가 자신의 기습을 방어하고 오히려 역공을 취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기수는 자신의 금나수를 진송이 쳐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정묘한 수법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쳐낸 것은 진송의 무공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남을 의미했다.
“너, 너는 누구냐!”
“진노대. 나야말로 그게 궁금합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왜 여기에 숨어 들어왔고, 세가 내부를 정찰하는 것입니까?”
진송은 대답 없이 곧바로 살초를 펼쳤다.
아까보다 훨씬 강력하고 진기가 가득 실린 공격이었다.
기수도 정신 바짝 차리고 맞섰다.
순식간에 20여 초를 교환하면서 진송의 눈은 점점 더 놀라움에 커져갔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가해도 양십일이 전부 방어해냈기 때문이다.
기수도 미간을 모았다. 진송의 초식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었다.
기수가 말했다.
“계속 이럴 생각입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우리 둘 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겁니다. 먼저 대화를 한 후에 싸워도 늦지 않을 겁니다.”
진송은 공세를 멈추었다.
자기는 기식 조절할 틈도 없이 전력을 다하는데 반해, 상대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음조로 말을 하면서도 완강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양십일이 자기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전 양십일입니다.”
“흥! 거짓말하지 마라!”
“진노대가 진송인 것처럼 저도 양십일입니다.”
진송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졌다.
어쨌거나 상대도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기보다 무공이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풀자고 한다는 점에서 일단 살기는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 좋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냐?”
“노대나 나나 남궁세가에 좋은 의도로 들어온 건 아닌 것 같군요. 잘 하면 우리 둘이 힘을 합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힘을 합친다….”
진송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양십일이 아니었다.
슬쩍 드러낸 그의 기도는 보면 볼수록 위압적이라서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그가 물었다.
“남궁세가에 무슨 원한이 있는가?”
“거창하게 원한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들이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으로는 손을 잡을 수 없지. 내게 이들은 불구대천지 원수거든.”
“남궁세가에서 노대의 아버지라도 죽였습니까?”
진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어쨌거나 목숨을 걸 정도의 원수가 아니라면 굳이 연합으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봐야지.”
기수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각자의 길로 가야겠군요. 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없어져야 하다면, 그게 누구일지는 얘기 안 해도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진송의 표정이 굳었다.
이미 겨루어봤기 때문에 승패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그에게 양십일은 저승사자나 마찬가지였다.
“동지가 될 수 없다면 적이란 뜻인가?”
“그렇습니다.”
진송은 반박할 수 없었다. 자기가 더 고수였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처음부터 양십일을 향해 살초를 쓰지 않았던가.
기수가 진송에게 말했다.
“노대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좌절하기를 바라지는 않겠지요?”
그에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함께 하고 싶었다.
진송은 깊이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좋다. 우리가 남궁세가의 멸문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일이 끝날 때까지 힘을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겠지.”
“현명한 선택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저녁 먹고 나서 다시 하도록 하지.”
“좋습니다.”
두 사람은 일단 헤어졌다. 그리고 일과가 끝난 뒤 다시 만났다.
힘을 합치기로 한 이후의 진송은 예전의 그 넉넉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기수도 어리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진짜 모습이 따로 있음을 알았다.
진송이 먼저 기수에게 물었다.
“남궁세가가 망하기를 바란다고?”
“그렇습니다. 노대는 남궁세가 사람들 전부를 죽일 생각입니까?”
“진짜 목표는 가주를 쓰러트리는 걸세.”
“암살을 계획 중입니까?”
“아니. 당당하게 겨뤄서 이기고 싶어.”
“노대가 가주에게 도전하도록 다른 사람들이 그냥 놔두고 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준비하는 중이지. 우리 측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어디로 진입해야 가주한테까지 방해 없이 갈 수 있는지 미리 알아내려고.”
“가주와 대결하여 쓰러트린다…”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거대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이른바 최종보스인 셈인데, 도전자에게 바로 대결을 수락해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스테이지 1부터 클리어하면서 올라오렴.’ 이라고 할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피를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노대는 명예 때문에 온 것이군요.”
독살, 암살이 아닌 정당한 대결을 원한다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 셈이지.”
“하지만 남궁세가는 무당, 화산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검의 명가입이다. 노대의 실력으로 가주를 이길 수 있을까요?”
진송이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못해낼 거라고 보나?”
“글쎄요. 남궁세가에서 장작 패는 하인한테도 못 이기셨잖습니까?”
진송은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세가 병력의 삼분지 이 가까이가 장원을 비우고 있지 않은가.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앞으로 영영 없을 거야.”
“그렇긴 하네요.”
진노대 입장에선 마교가 고마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송이 기수에게 물었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남궁세가가 망하기를 바라나?”
“저들이 저의 지인을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자네 혈매궁 소속인가?”
기수는 그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남궁세가에서 현상금을 거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대부분 자기 손으로 직접 처리하니까. 혈매궁은 뭔가 특별한 일로 세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더군.”
기수는 씩 웃은 후 말했다.
“맞습니다. 전 혈매궁 소속입니다. 노대가 속한 문파는 어디입니까?”
진송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기수가 재촉했다.
“한시적이라고 해도, 손을 잡기로 했으면 신뢰가 바탕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송은 다시 기수를 살펴봤다.
그동안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 왔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워낙 깊고 맑아서 왠지 모르게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보다 고수인 그가 도와준다면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송은 긴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난 비룡검문의 제 17대 문주일세.”
“비룡검문?”
기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송이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젠 강호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문파들도 여기저기 많이 생겨버렸고…”
그러나 기수는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읽은 적이 있는데…’
황궁 비고 쪽을 생각해 보았지만 연결되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번쩍! 하고 기억이 살아났다.
“진노대. 아까 나한테 펼쳤던 초식 한 번만 더 해보십시오.”
“무슨 뜻인가?”
이미 무공 고하는 판가름 났는데 다시 초식을 시전할 이유가 없었다.
기수는 구석에 세워져 있던 장작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자기가 초식을 펼쳐 보였다.
초식이 진행되자 진송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자, 자네…. 어, 어떻게…”
기수가 웃으며 손을 내렸다.
“하하! 어떻습니까? 비슷했습니까?”
“어, 어떻게 우리 검문의 초식을 알고 있는가? 그것도, 아까 내가 펼치지 않았던 부분까지 전부 다…”
진송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기수가 대답했다.
“실은, 인연이 닿아서 비룡검문의 옛 문주가 남긴 검술을 배웠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기수가 수로맹에 있던 시절. 유소진에게 내공을 빼앗겨 도망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동굴. 바로 그곳에서 검술을 배운 바 있었다.
그 당시엔 동굴 주인이 새겨 놓은 신세 내력에 관심이 없어서 대충 한 번만 훑어보고 말았지만, 오늘 진송이 펼친 초식이 어딘가 눈에 익어서 돌이켜 보니 검초를 검 없이 펼쳐낸 것이었다.
원래 보통보다 훨씬 무거운 검으로 펼치는 초식을 맨손으로 하니까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였지만, 장작을 들고 해보니까 확실히 같은 검법이었다.
‘햐! 동굴검법의 후인을 만나다니… 이런 인연이 있나.’
그러나 기수보다 진송의 놀라움과 감격이 훨씬 더 컸다.
“자세히 말해보게. 전대 문주님을 어떻게 뵈었나?”
기수는 지난 일을 최대한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모두 들은 진송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그 분이 바로 비룡검왕으로 불리던 15대 문주님, 내 사조님일세. 명성을 탐하여 달려드는 도전자들을 전부 다 받아주시다가 내상을 입으셨는데, 그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남궁세가 가주가 무리하게 대결을 요구해왔지. 그와 대결하고 오겠다는 서찰 한 장만 남겨놓고 떠나신 뒤 소식이 끊어졌다네.”
기수는 이럴 줄 알았으면 동굴 벽에 새겨진 얘기들을 좀 더 자세히 읽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내가 그 동굴의 위치를 정확히 아니까 나중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 검! 비룡검은 어떻게 되었나?”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좀 보여주게. 그 검은 문주님의 신물이고 우리 문파의 상징일세.”
“여기로 가지고 올 수 없어서 산에 숨겨놓았습니다.”
“아! 그렇군….”
진송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물었다.
“자네… 비룡검법을 모두 익혔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자네가 보여준 초식 중에 좀 다른 게 있는 것 같던데…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없겠나? 처음부터 끝까지.”
기수는 다시 나무토막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차례 보여주었다.
심각하게 지켜보전 진송의 표정이 여러 차례 변했다.
특히 뒷부분으로 가서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게 다입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뒷부분은 전해지지 않던 초식들이네.”
“예? 그럴 리가요.”
“내 사부님과 사숙들은 사조님이 떠나실 당시에 비룡검술을 대성하지 못한 상태였네. 그러다보니 나와 사형제들도 그 뒷부분의 초식들은 배우지 못했지. 오늘 처음으로 보게 되는 셈이야. 그리고 앞부분도 우리가 배웠던 것과는 차이가 있구만. 격이 달라!”
감격에 겨운지, 진송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수는 살짝 미안했다.
사실, 그가 펼친 검술은 비룡검 원본과는 약간 달랐다. 자신의 무공 지식이 가미되어 몇 군데 수정이 된 것이다.
“제가 미숙해서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진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내 비록 일신의 무공이 그 정도는 되지 못한다고 해도 초식의 격조를 알아볼 정도의 눈은 가지고 있네.”
기수 입장에선 다소 난감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