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0
기수는 어려서부터 중원에서 자라온 것은 아니지만 사하에게 얘기해줄 것이 많았다.
어차피 중원에서 자랐다고 해도 무슨 뉴스나 신문, 인터넷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사는 제한된 동네 이상은 경험하지 못하는 게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동안 천하 곳곳을 돌아다닌 기수가 보고 들은 게 꽤 많다고 할 수 있었다.
자기 얼굴. 가장 없어 보이는 버전에 피부병 붉은 얼룩이 표범 혹은 치타처럼 찍힌 얼굴을 보고도 한결같은(물론 처음엔 놀랐지만) 사하이기에 기수도 차츰 마음을 열었고, 말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걷는 내내 조잘조잘, 키득키득 거리는 두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사하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있던 형산파의 조재학이었다.
그도 귀가 있어 소문을 들었기에 양호법이 금랑대 대장을 이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상대.
하지만 그냥 좌절감, 패배감에 젖어 있기는 싫었다.
적어도 얼굴만큼은 자기가 양호법보다 10배는 낫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와 사하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아가 치밀고 질투심이 일어났다.
장안을 지나 처음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머문 객잔.
조재학은 양호법이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렸다 가까이 가서 말을 걸었다.
“강호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기수는 조재학에게 억지 미소를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묻지도 않고 맞은편에 털썩 앉는 것도 그렇고, 땡글땡글한 광대뼈와 볼 살, 그리고 뭔가 자기한테 불만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비룡검문의 미래를 위해 문주가 극진하게 대접하는 사람이니 자기도 거기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 정파가 이길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조재학이 씩 웃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비룡검문은 참 대단하십니다.”
“뭐가 말입니까?”
“적당한 시기에 무림맹에 슬쩍 발을 들여놓고 있잖습니까?”
기수는 조재학의 말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않고 노려보고 있자니 조재학이 한 술 더 떴다.
“뭐, 사실 마교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본래 무림맹이란 곳이 머리를 들이민다고 전부 다 받아주는 곳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화산의 장도장과 제가 어떤 식으로 보고하느냐에 따라서 입맹 여부가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지요.”
“그렇군요.”
“하하하!… 뭐, 그냥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조재학은 앉을 때처럼 제멋대로 일어나서는 얼굴 가득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멀어져갔다.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이거 뭐였지? 나보고 알아서 기라는 건가?’
고전하는 무림맹에 힘을 보태주겠다고 나섰는데 자기한테 밉보이면 입맹을 안 시켜줄 수도 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솔직히 무림맹 내에서 형산파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9파 1방 4문 5가 중 제갈세가를 빼면 18개 문파가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형산파는 그 중 서열 18위라고 할 수 있었다.
비룡검문은 남궁세가를 무림맹에서 제거시킨 주인공.
파워 면에서 중위권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그런 바룡검문의 입맹을 하물며 형산파 장문인이 나선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말까일 텐데, 고작 제자 한 놈이 자기 보고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저 새끼. 죽여 버릴까?’
진심으로 살의를 느낀 기수는 진백에게 가서 물었다.
“문주님. 장개심과 조재학이 혹시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아까 조재학이 저한테 와서 말하기를, 자기가 보고하기에 따라 입맹 여부가 결정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진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장사를 하다보면 이보다 더 아니꼬운 일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네. 나라가 허락해준 관리라는 도적놈들이 온통 도사리고 있거든.”
“아!… 문주님에게도 저들이 그런 얘기를 비쳤군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감독관으로 따라붙었을 때부터 뻔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기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는 사하와 어울리기만 하고 장개심과 조재학 상대하는 일은 전적으로 진백에게 맡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맡지 않은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진백은 장사하면서 익힌 처세술로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고 있지만, 자기는 죽일 생각부터 하지 않았는가.
비룡검문의 호법 역할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엄연히 따지면 자기는 제자라기보다는 전달자, 협력자였다.
성질에 안 맞는 일까지 해가면서 충성을 바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그렇게 입장을 정리했는데 조재학은 기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길 떠날 준비를 하는 그의 옆에 와서 다시 살살 긁었다.
“요즘 보타문 여제자와 그림이 보기 좋더군요.”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냥 대답했다.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붕대를 새 것으로 갈았다.
조재학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입 꼬리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자기가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붕대 안쪽의 실체를 보니 완전한 압승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기수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그는 눈을 반짝이더니 다른 얘기를 꺼냈다.
“백화방의 세력권까지 가려면 관문이 하나 있는데, 강호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한 비룡문이 그걸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정작 목적지인 천수엔 도달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꺾이면 안타까운 일이 될 텐데 말입니다.”
기수는 ‘꺼져 씨발아!’ 하고 한 대 패주고 싶었지만 최소한 비룡검문의 앞길에 장해물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꾹 참았다.
그리고 ‘옛다. 관심!’ 하는 기분으로 질문을 해줬다.
“관문이란 게 무엇입니까?”
“석고진이란 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의 여러 방파들이 하나로 뭉쳐 통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지요. 우리 무림맹이야 그들과 얘기가 잘 되어서 중원과 감숙성 사이를 오갈 때 아무 문제없이 통과하지만, 비룡문은 아직 무림맹 소속이 아니니 맹주님 직인이 찍힌 문서가 없지 않습니까?”
기수는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참고 다시 한 번 관심을 주었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하! 걱정 마십시오. 장도장과 제가 그쪽 방파의 수장들과 면식이 있으니 잘 얘기하면 무사통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서로 돕고 살아야죠. 하하하!….”
기수는 진짜 가소로웠다.
무림맹 소속인 남궁세가도 박살낸 비룡검문인데 고작 촌 동네 방파가 길 막을 걸 걱정한단 말인가? 문주나 자기가 나설 것도 없이, 그동안 실력이 꽤 는 순우광이나 조치성, 둘 중 하나만 내보내도 충분히 길을 열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조재학이 나서서 돕겠다니까 말릴 생각은 없었다.
조재학이 입술에 침을 바른 후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들과 얘기를 하려면 돈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통행료를 내야 한단 말입니까?”
“하하! 녹림도도 아닌데 무슨 그런 말씀을…. 다만, 맹주님 도장 찍힌 서류가 없으니까 최소한의 고마움을 표시하는 정도면 될 겁니다.”
결국 통행세를 걷겠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즉, 돈을 받아 놓고 고의로 배달 사고를 내도 통과만 하면 비룡검문 쪽에선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 죽여 버리자.’
좌우를 둘러보던 기수는 진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수의 속마음도 모르고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수는 입맛을 다셨다.
자기 기분만 생각하면 파천강기 한 방. 아니. 너클파트에 전해지는 타격감을 제대로 즐기며 때려죽이면 가장 속이 시원할 것이었다.
그러나 비룡검문 호법이 임무는 수행 않고 도움을 주려고 동행한 형산파 제자를 죽이면 뒤를 감당할 수 없었다.
기수의 시야에 진백뿐만 아니라 제자들 면면도 들어왔다. 무림맹에서 지내는 동안 호법과 제자로 수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에 다들 정이 든 상태였다.
그들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그래. 나 한 명 굽히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데…’
기수는 한숨을 내쉰 후 조재학에게 물었다.
“얼마 정도를 드리면 될까요?”
정신수양 하는 셈 치고 맞춰주기로 한 것이다.
조재학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글쎄요…. 문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 저희들로서는….”
“아닙니다. 그런 쪽의 지출은 모두 제가 담당하고 있으니 문주님께 말씀드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우선…. 은 스무냥 정도는….”
기수는 주먹을 쥐었다.
제자들에게 옷을 사줄 때는 금원보를 써도 전혀 아깝지 않았지만 이런 놈한테 쓰는 돈은 구리 동전도 아까웠다.
“그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러자 조재학이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장도장과 제가 있으니까 그 정도까지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은 열 냥 정도는 되어야 체면치레가 될 겁니다. 그쪽 식구도 많으니까요. 헤헤헤….”
기수는 조재학의 달라진 태도에 주목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볼 때 뭔가 기분 나쁜 표정이었는데, 돈이 나올 구멍이라고 판단한 다음부터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햐!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나?’
그렇다면 돈을 아끼려고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적당히 쓰는 게 그를 다루기 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손짓으로 그를 객잔 뒤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이미 충분히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쥐어주자 조재학의 입이 더 찢어졌다.
“하하하! 이렇게 바로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어라? 그런데 이건 모두 스무 냥 아닙니까? 방금 열 냥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석고진까지 가서 수고를 해주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두 분이 나눠서 여비로 쓰십시오.”
조재학의 입이 한 번 더 찢어졌다.
“하하하!… 역시 양호법은 영웅이십니다. 이처럼 통이 크고 씀씀이가 호탕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곧바로 영웅이란 단어가 나왔다.
기수는 그동안 무공 고하로 생과 사가 갈리는 무림의 법칙에 입각하여 살아왔고, 돈에 대해서는 점점 초연하게 되었다.
실력이 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무공 연마에만 집중하다 보면 금덩이, 은덩이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수 정도의 고수는 숫자가 많지 않았다.
무림맹이란 조직 안에서 형산파 제자인 조재학 같은 경우는 위치가 거의 굳어졌다고 볼 수 있는 상태.
그런 그에게 있어 세상을 돌리는 힘의 원천은 역시 돈이었다.
기수는 처음에 조재학의 언행에 화가 났지만, 은 5냥에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재미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으로 어느 정도까지 사람을 다룰 수 있나 실험해볼까?’
그렇게 길을 떠나 저녁때가 되자 장개심이 다가와 싱긋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도 참 먼 길이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동안 동행하면서도 처음에 인사 소개할 때 말고는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사이였는데 은 닷 냥 줬다고 마주 앉아 식사까지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식사 시간 내내 담소가 끊이지 않았다.
뒤늦게나마 기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너도 화산파 제자라지만, 사실은 별 거 아니구나.’
그에게도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장개심과 조재학은 일행보다 한 발 앞서 출발했다.
석고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난 후 진백이 기수에게 말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저 두 사람. 어제부터 태도가 변했어.”
“어떻게 말입니까?”
“전보다 공손해졌다 싶더니, 오늘은 자청해서 석고진의 위험을 먼저 확인하겠다고 나서네. 참 이상한 일이야.”
기수는 자기가 한 일을 얘기하려다가 참았다. 그랬다가는 진백의 성격 상 자기가 돈을 대겠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여정 동안 두 사람은 자기 혼자서 가지고 놀고 싶었다.
사용할 실탄은 얼마든지 있었다.
일행은 정오 무렵이 되어 석고진을 통과했다.
기수의 예상대로 그냥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포구와 대규모 역사가 있는 게 다른 마을들과 다르긴 하지만 마을 사람 전체가 덤빈다 해도 큰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통과하고 저녁시간에 객잔을 잡게 되자 기수는 장개심과 조재학을 따로 으슥한 뒷담 밖으로 불러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석고진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저희들이 뭐 한 게 있다고요. 하하!”
정말 한 것 없지. 기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들 손에 각각 은자 닷 냥씩을 쥐어주었다.
조재학과 장개심 모두 돈을 확인하고 입이 쩍 벌어졌다.
“뭘 이렇게 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두 분 덕에 아무 일 없이 일정을 단축시킨 게 고마워서 드리는 겁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안 받을 수도 없군요.”
이미 돈은 소매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장개심이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 일에 은자를 여덟 냥이나 받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하하하!…”
기수는 조재학 쪽으로 홱! 시선을 돌렸다.
‘이 새끼. 삥땅쳤구나!’
조재학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산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