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71
기수는 조재학의 괘씸한 소행을 벌주고 싶었다.
자기가 나서지 않고 그냥 액수만 말해줘도 장개심이 분노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조재학이 계속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기가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사실을 밝혀서 자기를 원망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 해버렸다.
과연, 그 일 이후 조재학은 기수에게 더 잘 해주었다.
하루는 사하가 조재학이 자꾸 말 거는 게 싫다고 하기에 그에게 가서 넌지시 얘기했더니 그 이후로는 아예 사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해 봐도 안 넘어오니까 포기할 생각이 있던 터에 기수가 얘기하자 선심 쓰듯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사하는 기뻐했다.
“양호법. 정말 대단한데? 다른 문파 사람까지 다룰 줄 알고.”
“내가 원래 좀 그래.”
“잘난 척은…”
“난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야. 사람이 잘난 걸 어쩌라고.”
“그래. 너 잘났다.”
“아무렴.”
잠시 적막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동시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석고진을 지난 이후엔 아무 문제도 없이 천수현까지 이동했다.
높은 언덕 앞에 이르러 장개심이 말했다.
“이제 저것만 넘어가면 바로 백화방의 장원이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진백은 수레를 숲에 숨기고, 제자들도 모두 관도에서 먼 곳에 임시 군막을 치고 머무르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과 양호법, 두 제자 순우광, 조치성의 네 사람만 정찰을 나갔다.
백화방의 장원은 작은 시골 도시에 자리 잡은 것 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컸다.
네 사람은 경공을 펼쳐 멀찍이서 장원을 한 바퀴 돈 후 두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았느냐? 얘기해 보거라.”
“예. 창고와 수레로 보아 취급하는 화물의 양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 인원은 200명 정도고 경비 상태는 다소 허술해 보입니다.”
“장원 주변에 경비초소를 구궁팔괘의 형태에 맞춰 건설해놓았지만 인원 배치엔 허점이 보입니다. 손방으로 치고 들어가면 중궁을 점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기수는 관심을 기울여 들었다.
그 역시 기문진법의 기본은 알고 있기 때문에 순우광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지면서 이해가 되었다.
진백은 제자들이 충분히 자기 의견을 말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나서 고쳐야 할 사항, 보완해야 할 사항,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항 등을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두 제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기수도 속으로 감탄했다.
예전에 진백이 일월신교 탈각왕의 기문진을 별 것 아니라고 말한 게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문진 이론을 단순히 진법 만드는 데뿐만 아니라 병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구나.’
진백이 제자들 가르치는 시간이 기수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삼국지를 읽어 보면 몸 쓰는 장수와 머리 쓰는 모사가 따로 있는 게 이해가 되었다.
‘역시 둘 다 잘하기는 힘든 거구나.’
그래도 진백이 세우는 복잡한 진법 응용 작전을 한 번 듣고 단번에 이해한 걸 보면 자기에겐 양쪽 모두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우광을 제외한 세 사람은 본진으로 돌아왔다. 순우광은 조치성과 둘이 맞교대 하면서 적의 경비 상태를 감시하기로 해서 남겨 둔 것이었다.
진백은 장개심, 조재학, 사하 등을 불러 정찰결과를 얘기하고 대략의 작전 계획도 통보했다.
장개심과 조재학은 감독 역할이기 때문에 좋다고만 할 뿐 개입하거나 고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사하는 달랐다.
“우리 보타문에도 할 일을 주세요.”
진백은 살짝 당황했다. 자기 작전에 그녀들이 낄 자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수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의 공격이 성공하면 적은 남문 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 길을 막아주십시오.”
사하도 평소와 달리 정색하고 기수에게 말했다.
“우리 보타문에겐 패잔병 처리나 맡으라는 건가요?”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보타문이 여자들만의 문파라고 얕보시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이번 일은 우리 비룡검문의 무림맹 입문이 걸린 중요한 전투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방해도 도움도 원치 않습니다.”
기수의 단호한 말에 사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선선히 응했다.
“좋아요. 이번은 특별한 상황이니까 시키는 대로 하죠.”
그렇게 역할이 정해진 뒤에도 진백은 이틀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정찰에 소요했다.
그리고 파악이 끝나자 마침내 공격시간을 정했다.
“내일 인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곧장 출발한다.”
비룡검문 제자들은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직전에 일어나 건량과 국물로 아침을 먹은 뒤 다들 전복을 챙겨 입고 무기를 들었다.
기수는 그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했다.
“내 명령을 절대 어겨선 안 된다.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전투 중 부상을 당했으면 뒤로 빠져라. 오늘 같은 전투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건 바보짓이다. 그건 나중에 진짜 우리 문파가 위험에 처했을 때를 대비해서 남겨두어라.”
“알겠습니다.”
공격은 25명씩 4개조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그 각각을 진백, 기수, 순우광, 조치성이 지휘하여 장원의 네 방향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가는 게 기본 틀이었고, 적의 장원 배치 형태 중 기문진의 사혈에 해당해서 상대적으로 경비가 약한 고리를 순차적으로 끊는 게 세부 계획이었다.
장개심은 진백과, 조재학은 기수와 동행했다.
은밀하고 조용한 이동 이후 모두가 제자리를 잡자 진백이 신호를 보냈고, 동서남북에서 각각 청기, 백기, 홍기, 흑기를 든 비룡검문 제자들이 함성을 지르며 내달렸다.
“와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백화방은 비룡검문의 선두가 담을 넘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된 방어를 해내지 못했다.
불침번들이 경보를 울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수적 열세로 곧 목숨을 잃었고, 잠옷차림에 무기를 들고 뛰어나온 방도들이 정신을 차리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비룡검문 제자들은 계획대로 착착 요처를 점열하고 적을 쓰러트렸다.
수적으로는 백화방이 2배 이상 많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일 정도였다.
기수 옆에서 조재학이 말했다.
“방주를 잡아야 합니다. 다른 놈들은 내버려둬도 됩니다.”
기수 역시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정찰 때 봐둔 건물을 향해 갔다.
과연 그쪽은 지키는 자들의 무공수위로 다른 곳보다 높았다.
기수는 선두에 서서 싸우는 틈틈이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건물 문을 부수고 취의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부서진 문짝 조각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암기?’
기수는 정신을 집중하고 검을 휘둘러 가려진 시야 너머로 다가오는 위협들을 전부 다 쳐냈다. 손바닥과 손목에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는데, 벽과 바닥으로 튕겨져 떨어진 것을 확인해 보니 그것은 앞이 무거운 형태의 단검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취의청 맞은편에 단검을 쥔 남자가 수십 명의 호위와 함께 서있었다.
그는 회심의 일격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한 모습이었다.
“너, 너희들은 누구냐?”
기수 대신 조재학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백화방 방주 여철상이냐?”
“그렇다! 넌 형산파의 도사로구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난 무림맹과 손잡고 일한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흥! 처음엔 그랬을지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제갈세가와도 손을 잡지 않았느냐?”
그러자 여철상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급히 안색을 고치고 말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하는 것이냐? 정사대전은 무림맹의 승리로 끝날 게 뻔한데 내가 왜 제갈세가와 손을 잡겠느냐?”
“그야 너희 방파에 이득이 되기 때문이겠지. 사람은 욕심 때문에 자기 몸을 망치기 마련이다. 우리 무림맹을 속였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억울하다! 나를 군사님과 만나게 해다오!”
“흥! 이 작전을 명령하신 분이 바로 군사님이다!”
그 말을 듣자 여철상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 번졌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독한 결의로 바뀌었다.
“어쩔 수 없구나. 너희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사마연합군 쪽으로 가는 수밖에.”
“흥! 네 능력으로 그게 될 것 같으냐?”
조재학은 그 말을 하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까지 혼자 떠들어댔지만 막상 싸움엔 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기수는 그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지금 이 싸움의 목적은 비룡검문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니까 형산파 제자가 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가 나서려고 할 무렵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바로 순우광이 이끄는 제자들 일부였다.
뒤 이어 진백과 장개심, 그리고 조치성도 속속 들이닥쳤다.
그들 역시 방주 잡는 게 우선이라 이 건물을 향해 왔는데 기수보다 약간 늦은 것이었다. 그나마 기수가 앞장서서 위협을 대부분 제거했기 때문에 취의청 근처에선 오히려 더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밖에서 잔당을 제거하는 중이고 취의청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30여명에 불과해서 대치한 양측이 수적으로는 비슷했다.
그러나 실력엔 차이는 느껴졌다.
기수와 진백의 기도가 여철상보다는 우위로 보였다.
그 사실을 감지한 조치성이 나서서 진백에게 청했다.
“사부님. 제가 저 자와 싸우도록 해주십시오.”
진백은 잠시 여철상의 기도를 읽은 후 기수 쪽을 봤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치성이라면 딱 맞는 매치업이 될 거라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수장과 싸우는 것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조치성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자기가 도와줄 작정이었다.
허락을 받은 조치성은 심호흡을 한 후 앞으로 나서서 검을 겨누었다.
“난 비룡검문의 조치성이다!”
“흥! 비룡검문이라면 남궁세가를 봉문시켰다는 바로 그놈들이로나.”
“뚫린 귀라고 들을 건 다 들었구나. 와라! 승부를 가리자.”
그리고 진기를 끌어 올리자 그의 옷자락이 부풀며 취의청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진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기 제자의 성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은 워낙 만날 사람이 많고, 바빠서 제자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동안 양호법에게 조련을 맡겨 놓았는데, 오늘 보니 자기가 변한 만큼 제자들의 검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기수식만 봐도 그 차이가 느껴졌다.
진백은 양호법 쪽을 보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철상은 비룡검문의 문주도 아닌 제자에 불과한 조치성의 무공이 자신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기습에 당해 갇힌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다.
적을 한 놈씩 모두 죽이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적이 한꺼번에 몰아닥치지 않고 한 놈만 내보낸 것이 그나마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슬쩍 좌우를 둘러보았다.
비룡검문이 문주 아닌 제자를 내보냈으니 자기편도 방주가 아닌 방도가 나가야 격에 맞겠지만 믿고 내보낼 놈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양손 손가락 사이에 단검 여섯 자루를 끼고 취의청 한 가운데로 나가 조치성과 마주 섰다.
조치성은 상대가 단검을 손가락 사이게 끼고 있는 것을 보고 간격을 좁혀야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고 곧장 몸을 날렸다.
동시에 단검 두 자루가 날아왔다.
조치성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것들을 쳐냈지만, 중간에 살짝 검로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처음에 던진 단검이 포물선을 그리는 사이, 두 번째 던진 단검이 직선으로 빠르게 날아왔기 때문에 균형이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여철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나머지 네 자루의 단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조치성의 요혈을 향해 날아왔다.
비룡검문 측에선 다급성이 터져 나왔다.
기수는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위기에 처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아직 파천강기를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였다.
경공으로 날아가 대신 막아주기에도 늦은 상태.
위기의 순간에 쨍! 쨍! 거리는 파공음이 연달아 네 번 울리고 단검들은 모두 튕겨 나가 천장에 박히거나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두세 걸음 급히 물러서면서 간신히 검막을 펼쳐 위기를 모면한 조치성은 크게 놀란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그런 동작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지 기수 쪽을 한 번 돌아봤다.
기수는 씩 웃어주었다.
그것은 조치성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공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기수는 열 손가락에 제대로 파천강기를 준비했다.
조치성이 놀람을 벗어나 자신감을 가지는 사이, 여철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조치성이 검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자! 이제 단검이 다 떨어졌으니 어쩔 셈이냐?”
“흥! 뭐가 떨어졌다고?”
그가 양손을 펼쳐 한 번 흔들자 양손에 다시 여섯 자루의 단검이 나타났다.
기수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 했다. TV에서 마술사들이 카드마술 할 때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노련한 손놀림이었기 때문이다.
조치성은 검을 겨눈 채 자세를 낮추었다.
“오냐. 네 놈이 몸에 암기를 몇 개나 감추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다 소진하도록 해주마. 간다!”
조치성의 돌진에 여철상은 다시 단검을 던져 응수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복잡한 움직임. 거의 천장을 향해 던지는 것까지 포함에서 여러 각도와 속도로 단검들이 날아다녔다.
그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치성은 상대의 재주가 별 것 아닌데 고전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때 기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건 저쪽이다! 서두르지 마라!”
조치성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사부님과 호법님, 사형, 사제들, 그리고 화산파와 형산파 사람이 보는 앞이라고 해서 자신이 너무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심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은 후 검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