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81
편보는 전장을 둘러보고 암담함을 느꼈다.
자기가 떠나올 때도 비세였는데, 지금 다시 와서 보니 거의 전멸 분위기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동료들이 모두 죽었는데, 자기 혼자만 살아남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양호법! 같이 갑시다!”
기수는 그를 위해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편보는 최대한 속도를 내서 기수를 따라가는 내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기수는 갈대밭을 헤치고 지나가는 사람처럼 팔을 좌우로 흔들 뿐인데, 그때마다 적들이 서너 명씩 쓰러졌다.
기수의 검초가 워낙 평범해 보여서 저걸 왜 못 막나 싶을 정도였지만, 현실에선 모두가 일격에 급소를 찔려 쓰러지고 있었다.
편보는 비로소 기수가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태우고 온 게 단지 한 사람이 아니구나.’
적어도 100명쯤 되는 고수를 원군으로 데려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수는 첫 번째 징 치는 자를 발견하고 땅바닥에 꽂혀 있던 부러진 창 자루를 움켜잡아 힘껏 던졌다.
호위병 중 일부가 민첩하게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날아오는 창을 쳐내려 했다.
그러나 창은 호위병의 칼을 부러뜨리고, 그의 흉곽을 관통한 후 징잡이 사내의 심장까지 뚫고 지나가버렸다.
그 뒤 쪽에 있던 호위병까지 죽었으니 일타 삼피!
편보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기수는 이곳 상황이 고수진보다 훨씬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속전속결을 결심했다.
내공 소모가 심하더라고 파천강기를 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은 무기를 던지면서 거기에 강기를 싣는 방식으로 운용한 것이다.
웬만한 고수라도 그걸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창끝보다 강기가 적어도 서너 뼘 이상 먼저 파고들기 때문에 쳐내기에 맞는 타이밍을 잡았다 하면 이미 강기가 몸을 뚫고 있는 것이다.
기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렸다.
편보는 신이 나서 따라가면서 기수가 귀를 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징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기수도 처음엔 그게 이상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곧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밤새 들었던 피리소리와 고수진에서 들었던 피리소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이 광범위하니까 피리 부는 역할도 분담했을 게 분명했다.
최면을 건 사람이 다르니까 반응도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었다.
기수 입장에선 불필요하게 의식을 분산시키지 않고 징잡이 사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다른 징잡이들도 모두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모두 파천강기 실은 무기에 당한 것이다.
워낙 치열했던 전쟁터라 주워 던질 무기는 많았다.
그렇게 모든 징소리가 멈추자 사마 연합군은 기수의 존재를 주목하고 에워싸 왔다.
기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막으면 죽는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오른손엔 남궁가의 검, 왼손엔 끝에 창날이 달린 무림맹 깃발을 주워 들고 양손으로 중거리와 근거리의 적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사마 연합군은 악을 쓰며 달려들었지만 무공 차이는 현격했다.
기수의 걷는 속도를 전혀 늦추지 못하고 시체만 쌓이는 상황.
지휘관들은 발악적으로 외쳐댔다.
“적은 한 놈이다! 막아라!”
편보는 자기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잠깐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은 단지 기수의 무용이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보기에 기수는 전신(戰神)이었다.
아마 사마 연합군이 보기엔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나찰로 보일 것이었다.
당사자인 기수는 고요하고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의지와 몸과 검술이 하나 된 상태.
파천강기로 인한 내공 낭비는 8번으로 족했다.
나머지 적들은 비룡검법으로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삼황맹과 녹림72채, 그리고 일부 천마교로 이루어진 적 중에 신경이 쓰일 정도의 고수는 감지되지 않았다.
어쩌면 피리와 징의 조합을 믿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기수의 걷는 속도를 전혀 늦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적은 신호를 주고받더니 진형을 재편했다.
방어진 형태를 취한 것인데, 실질적으로 항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짝 따라붙은 편보가 떨리는 목소리로 기수에게 물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기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비룡검문의 호법. 양십일이다.”
“아아!…. 비.룡.검.문…!”
편보는 그저 탄식을 토할 뿐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깃발 하나가 들어왔다.
“양호법님! 저기입니다. 저기 우리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기수는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편보의 장백천문뿐만 아니라 청성이나 공손세가 사람들도 보였다.
그 수는 고작 이삼백 명.
다들 전투에 지치고 부상 입은 모습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기수가 다가가자 그들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버티고 또 버텼지만 결국 전멸 당하기 직전에 이르렀는데 징소리가 하나둘씩 줄어든다 싶더니 사마연합의 진형이 크게 흔들리고, 지금 한 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성벽 같던 적 진형을 뚫고 나타난 사람.
장백천문 사람들은 편보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기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호법이다! 비룡검문이 도우러 왔어!”
그것은 보타문의 여제자들이었다.
기수는 패잔병들 사이에서 사하와 공손탁, 공손추등을 차례로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모두 살아있구나.’
특히 사하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까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맹 생존자들은 기수의 뒤를 이어 다른 병력도 속속 도착할 거라 기대했지만 사마연합의 방어진형은 곧바로 닫혀버렸다.
“뭐, 뭐야. 설마…. 혼자 온 건가?”
무림맹 사람들은 의구심에 술렁거렸다.
그런데 혹시 했던 일이 현실이었다.
더 이상의 병력은 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 비룡검문의 호법뿐이었다.
극도의 좌절과 실망감.
그러나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검과 깃대를 든 기수는 단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사마연합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가 좌측으로 가면 적 진형의 좌측이 무너지고, 우측으로 가면 우측 진형이 무너졌다. 깃대의 회전반경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픽, 픽 쓰러지니까 적도 숫자는 많지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무림맹 사람들은 차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기수의 분전, 그리고 가공할 무위가 그들의 전투본능을 일깨운 것이다.
사하가 검을 들고 외쳤다.
“우리도 함께 싸웁시다!”
그리고는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보타문 제자들이 움직였고, 청성파와 공손세가 무사들도 일제히 따라 나섰다.
사마연합군은 크게 당황했다.
안 그래도 기수 한 명 때문에 쩔쩔매던 상황.
거기에 다 죽어가던 무림맹 생존자들이 가세하여 다시 전투를 벌이는데, 그들의 기세가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더 이상 징소리가 힘을 빼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죽어간 동료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없던 힘도 새로 생겨난 듯 한 모습이었다.
한바탕 크게 밀리자 사마연합군은 신호를 올려서 일제히 퇴각했다.
완전히 허물어진 진형을 추스르기 위함이었다.
사하는 기수에게 안길 듯 다가왔다.
“양호법! 와주었구나!”
“하핫! 네가 다치도록 놔둘 수는 없지.”
“고마워!…”
사하의 눈 꼬리엔 살짝 눈물까지 맺혔다.
제자들을 이끌고 온 책임자로서 그나마 남은 제자들의 목숨이라도 보전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한 것이다.
사하뿐만이 아니었다.
청성파 제자들과 공손세가 사람들도 앞 다투어 기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비룡검문의 무공은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고맙습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기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강호 동도로서 당연히 도와야지요.”
공손탁과 공손추 형제도 오랜만에 만나보니 몹시 반가웠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른 얼굴이라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형인 공손탁이 정색하고 말했다.
“양소협의 구명지은에 꼭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같은 무림맹 소속인데 은혜라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저희들은 꼭 죽을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양소협이 징잡이들을 모두 죽이고 포위도 풀어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큰 은혜를 잊을 수야 없지요.”
다른 사람들도 다들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기수가 말했다.
“저는 비룡검문 사람입니다.”
공손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비룡검문의 일이라면 우리 공손세가는 열 일 제쳐놓고 나서서 돕겠습니다.”
그러자 장백천문과 청성파를 비롯한 군소방파 사람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얘기들을 했다.
기수 입장에선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비룡검문에 선물을 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요란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물러났던 사마 연합군이 대열을 정비하고 제대로 공격진을 만든 것이다.
기수는 양측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전력은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적이 예상치 못한 부분을 노려 징잡이들을 처치하고 포위를 뚫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적이 그것을 감안하고 새로 진형을 짠 지금은 다시 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자기 혼자라면 겁날 게 없었다.
그러나 애써 구해낸 생존자들의 안전까지 책임져 줄 자신은 없었다.
기수는 강변을 둘러본 후 모두에게 말했다.
“강가로 가서 저들의 배를 타고 일단 몸을 피합시다.”
각 문파의 간부들은 기수의 의도를 즉시 알아차렸다.
그들이 보기에도 살아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다들 지치고 부상자도 많은 상태에서 육로로 탈출하기는 불가능했다.
공손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저들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길은 내가 뚫겠습니다. 돌격 대형으로 좌우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부상자를 보호하면서 저를 따라 오십시오.”
모두들 좌우를 둘러보았다.
현재로선 어쩌면 유일한 생로. 하지만 기수에게 과연 그런 중책을 떠맡겨도 될지 미안한 마음에 다들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다.
기수가 다시 말했다.
“기회는 딱 한 번뿐입니다. 배까지 직진할 것입니다. 여기서 뒤처지면 다시 구하러 올 여유는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지키십시오.”
모두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가 앞으로 나서서 검과 깃대를 잡고 서자 그 뒤 좌우로 무공에 자신 있고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순서로 좌우 종대가 만들어졌다.
생명이 걸린 단 한 번의 돌파.
선두에 선 기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갑니다!”
그리고 달려드는 적을 향해 돌진하며 닥치는 대로 검과 깃대를 휘둘렀다.
사마연합군도 완강하게 버텼다.
“절대 뚫려선 안 된다!”
“막아라!”
기수는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 돌파는 단지 뚫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속도가 몹시 중요한 요소였다.
자기가 머뭇거리면 가장 약한 후미가 포위되어서 크게 당할 수 있었다.
처지는 사람을 전부 다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상황.
하지만 자기가 빨리 가면 갈수록, 좌우의 종대 대형이 적을 더 멀리 밀어낼수록 살아남는 수는 늘어날 것이었다.
기수는 사실, 생면부지의 남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싸울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하와 공손가 형제들을 구한다는 목적 외에 비룡검문의 이름을 걸었다는 점도 있고, 또 자신의 무학 수위에 대한 일종의 점검이라는 생각도 했다.
‘오로지 눈앞의 적들에만 집중하는 거다!’
그렇게 마음먹자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다시 한 번 의지와 몸과 검이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누적된 피로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오로지 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최단시간 내에, 그것도 비룡검법이라는 제한된 기술만으로 처치한다는 하나의 집중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강변에 도착해 있었다.
정신을 번쩍 차린 기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대형이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다행히 모두 따라붙어 있었다.
무림맹 생존자들이 아무리 지친 상태라고 해도 적 전체와 혼자서 싸우다시피 하는 기수를 따라붙을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그들 뒤로는 몹시 놀란, 그리고 상당히 겁에 질리고 당황한 사마연합군이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수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배에 타시오!”
그리고 자신은 뒤로 갔다.
생존자들이 탈출할 때까지 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마연합군은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한 남자.
깃대는 모래톱에 꽂아 세우고, 다른 손으로는 검을 든 채 당당히 서있는 남자.
입가에 가벼운 미소까지 짓고 있는 기수를 보고 다들 겁을 먹은 것이다.
그들에게 기수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자 악귀였다.
기수의 등 뒤로 무림맹 생존자들이 배에 타는 모습을 보았지만 기수 한 사람을 통과할 자신이 없어서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는 멀리 우회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