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82
기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림맹 생존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떠나는 배가 늘어갈수록 기수의 입 꼬리도 올라갔다.
잠시 후 사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호법! 어서 와. 우리가 마지막이야.”
기수는 전방을 주시한 채로 대답했다.
“먼저 가. 난 할 일이 남았어.”
“무, 무슨 일인데?”
기수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남은 배에 전부 구멍을 뚫을 생각이야. 그래야 놈들의 발이 묶이지.”
“알았어!”
사하의 대답을 듣고 배가 떠나는 기척을 느낀 기수는 적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진짜로 시작해볼까?”
그동안 비룡검문의 양호법 신분을 유지하느라 능력발휘에 어느 정도 제한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무공 연마를 위해서라면 확실히 도움이 되었지만 기분으로만 보자면 개운하고 시원한 맛은 없었다.
이제는 목격자가 없으니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수가 한 걸음 내딛자 사마연합군 전체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기수는 씩 웃었다.
“너희들이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런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의아해서 돌아보니 사하였다.
그녀가 배에 손을 흔들다가 돌아서서 기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기수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왜 안 갔어?”
“혼자 배들을 다 부수려면 힘들잖아. 도와주려고 남았지.”
“으으….”
기수 입장에선 그게 도와주는 게 아니었다.
“어서 다른 배를 타고 동료들 따라 가. 네가 없으면 누가 그들을 돌보겠어?”
“내 일을 대행할 제자가 둘이나 있어. 걱정 마.”
그러면서 기수 옆에 나란히 서서 검을 뽑아 전방을 겨누었다.
기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 입장에선 정말 큰 각오를 한 것일 터였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이었다.
“외롭게 죽지는 않겠군.”
기수가 슬쩍 약한 척을 해보였다. 그러자 사하가 대답했다.
“넌 죽지 않아. 내가 지켜줄 거니까.”
“하하하!….”
기수는 정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 누가 더 많이 죽이나 내기라도 할까?”
“좋아!”
내기감들 입장에선 소름 끼치는 대화였다.
기수는 사하를 위해 자기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죽여야 한다 생각하고 즉시 적진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사하는 기수와 함께 싸울 작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휘두르는 깃대의 반경 안에서 보호받는 처지가 되었다.
처음엔 자기 때문에 기수의 움직임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쓰러지는 적의 수엔 별 차이가 없었다.
‘이 남자의 무공은 도대체 깊이가 얼마나 되는 걸까?’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연합군의 움직임은 미온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충분한 전과를 올린 상태.
패잔병들이 배를 타고 도망쳤지만 그건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악귀 한 명과 싸우면서 사망자 수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결단을 내렸다.
총퇴각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어딜 도망가려고!”
기수는 강변으로 가는 길을 막고 좌우로 움직이며 적을 닥치는 대로 찍어 넘겼다.
그러자 사마연합군은 퇴각로를 바꾸어 육로로 동쪽을 향했다.
기수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사마연합군이 배만 타지 않는다면 어느 쪽으로 도망치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 많던 적군이 썰물처럼 모두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보고 사하는 검을 늘어뜨리며 탄성을 토했다.
“양호법. 너 도대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많은 적을 혼자 힘으로 물리치다니…
그런데 그녀가 보니 기수의 표정은 뭔가 탐탁지않아 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적이 전부 도망쳤는데 기쁘지 않아?”
기수는 깃대를 버리고 검을 시신의 옷에 닦으며 말했다.
“너희들을 구한 건 기쁘지만, 적은 도망친 게 아냐.”
“그러면?”
“승전 이후에 병력을 이동한 거라고 봐야지.”
사하는 입맛을 다셨다.
큰 그림으로 봤을 때 그 얘기가 맞았기 때문이다.
기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난주가 위험할 거야.”
사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본진이?”
“응. 고수진과 이곳에서 싸운 적들을 놓고 봤을 때 고수가 별로 없었어. 그렇다면 다른 어딘가가 진짜 목표였다고 봐야지.”
“서, 설마…. 우리가 이렇게 심하게 당했는데….”
“적은 무림맹을 하루 만에 전부 다 쓸어버릴 계획을 세웠을 거야. 음종의 술법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방비할 틈을 안 주고 한 날 한 시에 몰아치는 거지.”
“무림맹을 하루에….?”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직접 당해봤기 때문에 무모한 계획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징소리를 듣는 순간 사매들과 숲에서 열매도 따먹고 바닷가에서 조개도 줍던 어린 시절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면서 검 든 손에 힘이 쭉 빠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앞에 적의 창칼이 왔다 갔다 하는 데도 집중이 안 되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무공이 자기보다 고강한 사람도 이곳에서 많이 죽었다.
음종의 술법은 고수와 하수를 가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었다.
사하가 기수에게 물었다.
“만약 화양문 장원이 당했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위기 시 집결지가 따로 있었던 걸로 아는데… 기억이….”
처음 입맹해서 얼핏 지나가는 투로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우린 이제 어쩌지? 화양문으로 가봐야 하나?”
“아니. 난 고수진으로 돌아갈 거야.”
만약 본진이 당했다면 그보다 서쪽에 있는 고수진이나 홍성진은 배후가 차단되어 앞뒤로 적에 둘러싸일 가능성이 있었다.
비룡검문이 안전한 곳까지 철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야 했다.
사하가 말했다.
“나도 너와 함께 가줄게.”
기수는 씩 웃었다.
“날 보호해주겠다는 거군. 그 호의 고맙게 받지.”
이제 와서 그녀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안전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해야 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말이나마 그렇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하는 젠 체 하며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호호!… 앞으로 날 알아서 잘 모시라고.”
“예! 그러겠습니다.”
마주보고 웃은 두 사람은 강변으로 가서 고수진까지 타고 갈 배를 찾았다.
다들 큰 배라 두 사람이 타고 젓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편보와 타고 왔던 배를 찾은 기수는 나머지 모든 배마다 바닥에 구멍을 여러 개 내서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사하와 노를 하나씩 들고 배를 저었다.
사하는 섬 출신답게 배를 능숙하게 다뤘고, 두 사람은 해가 질 무렵 고수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래톱에 배를 걸치고 땅에 내린 기수는 언덕 위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나서 보니 군영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디 간 거지?”
기수는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 보았다.
는 쪽지 한 장이 덜렁 침상에 놓여 있었다.
기수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당한 게 아니고 자진해서 철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하가 그 쪽지를 본 후 말했다.
“퇴각명령이 내려졌다면 정말 본진이 당했을 가능성이 크네. 그런데 세 번째 집결지가 어디야?”
기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고수진과 홍성진을 오가면서 정말 멋지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폼 나게 활약을 펼쳤는데 기본 전략사항을 몰라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투덜거렸다.
“왜 이런 식으로 적은 거야? 마을 이름을 적었으면 간단한데.”
“적이 먼저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너. 세 번째 집결지가 어딘지 아냐?”
“난 첫 번째와 두 번째도 몰라.”
“자랑이다.”
“뭐, 나만 그런가?”
기수는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일단 동쪽으로 가보자.”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것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 무림맹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이곳만 벗어나면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허기를 느낀 기수는 식당으로 쓰던 곳을 찾아 버리고 간 건량 약간을 찾아 사하와 나누어 먹으면서 잠시 쉬었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경공보다 도보를 택한 것은 낮에 내공 소모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하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남에서 감숙까지 먼 길을 오던 때처럼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녀는 주로 신성진에 배치되어서 오늘까지 있었던 주변 문파들 얘기를 했는데, 기수는 내용에 상관없이 그녀 목소리를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유쾌했다.
마침 달도 밝게 떴고,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데이트를 즐기는 기분이었다.
‘집결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멀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피 묻은 옷 입고 있는 여자를 보고 섹시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은 중원무림이 유일할 것 같았다.
특히나 사하와는 사심 없이 오랜 대화를 나눈 사이라 친밀감이 더했다.
“양호법. 너. 피부병 거의 다 나았네?”
“응. 이젠 말끔해졌어.”
“역시 보타문의 금창약이 최고지?”
“아! 그게 말야. 사실은…”
“사실은 뭐?”
“….고마워.”
“호호!… 내 말만 들으면 다 잘 풀린다니까.”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침이 자꾸 넘어가는데, 두 사람의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긴장하여 귀부터 막고 자세를 낮추었다.
소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기수가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손을 떼자 사하가 놀라서 말했다.
“그걸 그냥 다 들으면 어떻게 해?”
“이건 무슨 목적이 있어서 부는 게 아닌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해?”
“우선 곡조가 자유롭고 제멋대로야. 게다가 방향이 감지 돼.”
사하도 조심스럽게 귀 막았던 손을 떼었다.
“소리 나는 쪽을 찾을 수 있다고?”
“그래. 저쪽이야. 진기 운용 없이 무방비로, 어쩌면 달빛을 보고 자기 흥에 취해서 부는 것 같아.”
일전에 순우광과 조치성이 잡으러 갔을 때는 소리 방향이 계속 바뀌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소리는 뚜렷하게 한 쪽에서 들려왔다.
이곳의 무림맹 병력이 모두 철수한 것을 알고 방심한 상태인 것 같았다.
기수가 말했다.
“놈을 잡자!”
최면을 건 당사자니까 징잡이들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컸다.
사하도 즉시 검을 쥐며 응했다.
“좋아.”
두 사람은 은밀한 움직임으로 피리를 찾아갔다.
오래지 않아 그리 높지 않은 둔덕 바위 위에 검은 그림자를 찾을 수 있었다.
두 손으로 피리를 들고 있었는데, 징잡이들에 비하면 체격이 작아 보였다.
손짓으로 목표를 확인한 두 사람은 좀 더 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그러나 20여 미터 앞에 이르러 피리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홱! 뒤를 돌아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기수는 선풍비를 시전하여 상대와의 간격을 좁혔다.
‘이 정도 간격이면 네놈이 도망칠 곳은 없다!’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상대의 놀란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기수는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아직 애잖아?’
많아야 12살, 13살 정도인 소년이었다.
기수는 잔백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음종 현현각의 술사가 아닌 근처에 사는 목동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옷차림도 징잡이들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람으로 가득하던 소년의 눈빛이 돌변한다 싶더니 갑자기 쿵! 하는 격렬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기수를 너댓 걸음이나 뒤로 밀어냈다.
“뭐, 뭐지?…”
기수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소년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마치 공중에서 누가 밀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져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손발을 썼다면 자기가 모르고 당했을 리가 없었다.
소년은 양손을 자기 얼굴 좌우로 마치 절대값 기호처럼 세우더니 기합을 내질렀다.
순간, 기수는 한 번 더 휘청거렸다.
양쪽 귀에서 찌잉~! 하는 이명이 울리면서 갑자기 균형 감각이 모두 흐트러져 양 다리가 모두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기수는 상대를 향해 파천강기를 날리려 했다.
그러나 몸 전체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서 조준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제껏 수많은 고수들과 싸워봤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의지는 있는데 몸이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