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83
기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와중에 소년의 얼굴을 봤다.
처음엔 순박한 시골 목동으로 보였지만, 지금의 표정과 눈빛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파천강기로 골통을 부숴버릴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것.
현재의 몸 상태로선 놈이 입술을 오므리며 내공 모으는 모습을 보면서도 반격할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회전시켰다.
뭔가를 피하는 동작.
그러나 심장을 노리고 날아온 물체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겨드랑이에 긴 상처를 입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사하가 자신의 검을 던진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기수의 허리를 받쳐주었다.
“내가 구해줄게!”
기수는 정말 그녀에게 신세지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 덕분에 균형을 잡고 보니 반격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급히 파천강기를 끌어올려 몸을 일으키는 소년을 향해 연달아 발출했다. 아무리 어려도 무림맹을 패퇴시킨 음종의 고수니까 살려둘 수 없었다.
거의 AK-47의 바나나 탄창 하나를 전부 비워버리는 것 같은 파공음이 났다.
그런데 동시에 괴상한 소리도 들려왔다. 소년이 돌고래 소리 같기도 하고, 뾰족한 물건으로 철판을 긁는 것 같기도 한 소름끼치는 굉음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십 발의 파천강기가 소년의 요혈에 모두 적중했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서기만 했을 뿐, 상처를 전혀 입지 않은 것이다.
기수는 충격을 받았다.
‘어, 어째서 파천강기가 통하지 않은 거지? 설마…. 방금 전 그 괴상한 비명 같은 걸로 파천강기를 막았단 말인가?… 내 발칸포를 소리로 막았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은 놀란 눈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비록 막아내긴 했지만, 기수의 공격에 겁을 먹은 듯 한 표정이었다.
그는 입술을 쭉 내밀더니 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즉시 거기에 응답하는 휘파람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사하가 기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놈이 동료를 부르고 있어!”
기수는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사실, 자기 나이의 절반도 안 될 것 같은 상대를 놔두고 도망치는 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하지만 자신의 필살기인 파천강기가 통하지 않는 몸이라면 싸움을 계속 이어나가 봤자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정체불명의 공격에 동료까지 가세한다면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상황
결국 기수는 사하와 함께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소년은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는 않은 듯 했다.
둔덕을 내려온 두 사람은 휘파람 신호를 피해 밤길을 달렸다.
그러나 적의 추격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마연합 병력은 일대에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기수는 손짓으로 그녀를 멈추게 한 후 말했다.
“나한테 잠시만 시간을 줘.”
“뭐 하려고?”
“운기조식.”
기수는 바닥에 주저앉아 곧바로 운기를 시작했고, 사하는 기수의 검을 대신 잡아 뽑아들고는 그의 주변을 지켰다.
내공을 한 바퀴 돌려 본 기수는 다행히 몸에 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귀가 문제였다.
찌잉~ 하는 이명이 멈추지 않았다.
‘아! 맞다. 사람 몸의 균형을 감지하는 기관이 바로 귀지?’
기수는 자기가 휘청거렸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귀 안의 구조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음공이 단지 청각만 자극하는 게 아니라 평형감각까지 손상시킨 게 분명했다.
기수는 짧지만 밀도 높은 3개 단전 동시 운기조식으로 몸의 상태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니까 확실히 현기증도 사라졌고, 이명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됐어! 이제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있어.”
사하는 무슨 운기조식을 그렇게 빨리 하냐는 시선으로 기수를 봤다.
기수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돼.”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너보다 내 경공이 훨씬 위야.”
“훨씬 까지는 아니지 않나?”
“후후…. 이건 어디까지나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마.”
그리고 기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꺄악! 무, 무슨 짓이야.”
“꽉 잡아.”
기수는 곧바로 선풍비를 시전했다.
남자에게 안겼다는 사실에 당황한 사하는 곧바로 경공의 속도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기수의 목을 양팔로 꼭 끌어안았다.
기수는 더욱 속도를 올렸고, 오래지 않아 휘파람 소리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다음에도 기수는 사하를 내려놓지 않았다.
자기 품에 안겨 목을 꽉 붙들고, 눈을 꼭 감은 모습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사하가 감았던 두 눈 중 한 쪽만 살짝 뜨고 상황을 살피다가 기수와 시선이 마주치자 급히 다시 눈을 감았다.
기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다른 충동은 참기 어려웠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댄 것이다.
“으음….”
사하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기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뭐야? 이러기를 기다렸던 거야?’
기수는 열정은 가득하지만 테크닉 적으로는 서툰 그녀에게 키스의 기본을 가르쳐주는 기분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진도를 나갔다.
따지고 보면 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첫 접촉이라 그런지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입맞춤이 멈춘 후 사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지?”
“사랑의 확인?”
“너. 나 사랑해?”
“그런 것 같은데? 넌 어때?”
사하는 대답 대신 기수의 목을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기수는 그녀의 이마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기수 역시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하가 가쁜 숨을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우,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왜? 어때서?”
“난… 난 이러면 안 돼.”
그녀는 갑자기 기수를 밀어내고 제 발로 섰다.
기수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실망했다.
방금 전에 보여준 그 뜨거운 열정은 뭐란 말인가?
그러나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미안해. 내가 해선 안 될 짓을….”
사하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네가 미안할 일은 아냐. 난 단지…”
기수는 그녀에게 얘기 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머뭇거리다가 화제를 바꿔버렸다.
“그나저나 사부님에게서 받은 검을 잃어버렸네. 어쩌면 좋지?”
기수는 턱짓으로 그녀가 든 남궁현의 검을 가리켰다.
“그걸 네가 가져. 날이 아주 예리하고 강도와 탄력의 조화도 훌륭하더라.”
“하지만… 이건 꽤 좋은 검 같은데…”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검 한 자루쯤이야 뭐.”
사하는 생긋 웃더니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좋아! 이젠 이게 내 검이다.”
기수에게 겁 집을 받아 자기 허리에 차고 몇 번 뽑았다, 넣었다, 휘둘러보았다 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기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멈춘 곳은 가운데 시냇물이 흐르는 좁은 협곡이었는데, 좌우의 언덕 때문에 낮이 되어도 시선을 피하기는 쉬울 것 같았다.
한참 뛰어 목이 마르던 기수는 손을 씻고 시냇물을 떠서 마셔보았다.
상류라 그런지 물맛이 깨끗하고 시원했다.
내친 김에 얼굴까지 씻은 기수는 협곡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고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자리를 찾아서 북극성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까지 계속 북쪽으로 달려온 거네.’
그렇다면 집결 예정지와는 오히려 더 멀어진 셈이었다.
돌아가서 그 얘기를 하자 사하가 말했다.
“멀어진 만큼 안전하게 우회할 수 있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집결지야 장안 쪽으로만 가도 소문을 듣고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
사하가 기수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수법은 뭐야?”
“무슨 수법?”
“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뻗으니까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상대가 뒤로 쭉 밀려났잖아. 그거 혹시 비룡검문의 숨겨둔 절초 같은 거야?”
“아! 그러니까…. 그게, 그런 셈이지.”
기수가 머뭇거리며 곤란해 하자 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더 이상 묻지 않을게.”
“숨기려는 건 아니고….”
“알았다니까. 난 그냥…. 서로 손도 안 대고 미는 거 보고 신기해서…”
기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그래! 그놈이 먼저 나를 밀었지. 음공이라면 공기를 매개체로 삼는 거니까… 나를 민 게 바람이었다고 봐야 되나?’
만약 상대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파천강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실체가 없는 것을 유형의 무기로 만들어 원거리에서 발출하는 방식. 하나는 공기, 하나는 강기를 사용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음종의 무공과 파천강기는 상성이 안 맞는 것 아닐까?’
억울했다. 파천강기는 상대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는데, 자기는 음종의 충격파에 균형을 잃었으니 완전히 비대칭 전력이었다.
사하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
“아냐. 별 생각 없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 자신의 안색이 굳어있음을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패배감이 유쾌할 리 없었다.
아무 것도 못 해보고 속수무책.
사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당했을 상황.
겨우 파천강기를 발사했지만 성과 없이 도망쳐 오기 바빴으니 속이 상하고 화도 났다.
‘더구나 소년이라니….’
낯선 사람과 싸움이 붙었을 때 우선 주민증부터 까고 보는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어린애한테 당한 것이 더욱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사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번엔 귀마개를 하고 바짝 접근해서 검으로 찔러버려.”
그녀 나름의 해법이었다.
기수는 잠시 멍했다. 사하가 정답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맞아! 그 녀석. 사하가 던진 검에는 쉽게 상처를 입었지.’
파천강기에 내성이 있다고 해서 금강불괴는 아닌 것이다.
4미터 이내까지 접근한다면 유성추로, 2미터 이내까지 접근한다면 검으로, 손이 닿을 정도까지 접근한다면 직접 접촉을 통한 단정홍 투사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거리에서의 접근이 문제인데, 귀마개를 하면 공기 압력이 귓속을 압박하는 것도 현격히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쉬운 해결방법이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놈. 누굴까?”
사하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너를 곤란하게 할 정도였으니까 음종 현현각의 각주겠지.”
“그렇게 어린 애가 어떻게 각주를 해?”
“무림엔 얼굴 모양만 보고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하긴….”
일월신교의 혈지왕이 생각났다.
소년의 소름 끼치는 미소를 떠올려 보니 어쩌면 그 아이 역시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주민번호는 나보다 빠르겠군.’
살짝 위안이 되었다.
사하가 살짝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설마 그곳으로 되돌아갈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일단 음종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수집해야 되겠어. 아무 것도 모르고 접근했다가 죽을 뻔 했는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되잖아.”
“그래. 잘 생각했어. 무림맹엔 나이든 명숙들이 많으니까 분명 그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있을 거야.”
기수는 일단 무림맹과 합류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정했다. 사도도 아니면서 사도보다 강한 적을 만났는데 서둘러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협곡 안의 적당한 곳을 찾아 사하가 누울 곳을 마련해주었다.
“오늘을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
밤이 깊어지자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좌우의 암벽이 가려준다고 해도 밤에 불을 피우면 아주 먼 곳에서도 눈에 띌 것이기 때문이다.
기수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사하는 선뜻 받지 않았다.
“이걸 날 주면 너는 어쩌려고?”
“운기조식 하면 별로 춥지 않아. 내 걱정 말고 너나 잘 두르고 자.”
머나먼 남쪽 섬나라에서 왔으니까 추위엔 약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몸에 옷을 잘 덮어주고 운기조식에 들어간 기수는 오래지 않아 눈을 떴다.
그녀가 계속 뒤척였기 때문이다.
온몸을 한껏 웅크리고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기수는 자신의 체온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가가 그녀 뒤에 바짝 달라붙어 누운 뒤 팔을 감아주었다.
사하가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난로 놀이. 어서 자.”
사하는 기수를 밀어내지 않았다.
따듯한 체온, 그리고 황홀한 흥분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