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64
◈ 564화. 우물 안의 존재 (2)
“제 목숨에 걸고 맹세하지요. 저는 이 손으로 인간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아르카나 대륙도, 이 세계에서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안으로 당신들의 세계를 엿본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토파즈 홀엔 어떠한 반응도 없었으니까.
“또한 그러한 저도 과오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무고하지 않은 비겁한 방관자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기에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이번에도 토파즈 홀은 감응하지 않았다.
책상 아래에서.
뱅그릿의 갈피를 잃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린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벨리에 님이 바르바토스를 자신에게 넘겨 보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바르바토스를 바라본다.
“악마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족속이죠.”
“믿으실 수 없다면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
슥.
바르바토스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마치 자신의 두 손을 가져가라는 듯.
평상시였다면 기만으로 여겼을 테지만, 어째서일까.
‘……젠장.’
바르바토스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능력이 얼마나 원망스러운 것인지를. 질문을 받는 제 입장에서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뱅그릿 선임, 당신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능력 부족이라.
그 말에 뱅그릿은 과거를 떠올렸다.
악마 숭배자의 꼬임에 넘어갔던 과거를.
아니, 비단 과거만이 아니었다. 능력이 부족한 탓에 이 수석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건 여전했으니까. 파이몬이 출현했던 제주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바르바토스가 말을 잇는다.
“설령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긍지’가 있었다면.”
“……!”
“저는 십좌들의 결정에 반대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타고나기를 악마이자 십좌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긍지를 품기엔 그릇부터가 잘못되었지요.”
악마의 입으로 ‘긍지’를 언급하는 바르바토스.
뱅그릿의 머릿속이 더더욱 혼란스러워지던 때였다.
바르바토스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그러니 저를 이 수석님께 안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악마가 이 수석님과 마주하기를 원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수석님이야말로 악마의 천적이셨다.
마왕도, 거악도, 십좌도 그 어떤 악마도.
이 수석님 앞에서는 그 위세를 떨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속지 마라, 뱅그릿.’
흔들렸지만, 주먹을 굳게 쥐었다. 상대는 십좌였다. 일반적인 악마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악마답지 않다고 느껴져도, 결국 악마일 뿐이다.
자신을 타이르던 순간이었다.
다시금 그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저 역시 ‘긍지’를 깨닫고 싶습니다.”
“!”
긍지.
긍지를 깨닫기 전의 자신? 마탑의 선임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려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짓을 골라 하던 자신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지만…….
‘이 수석님께 뇌물을 바칠 생각도 했었지.’
그래서일까, 뱅그릿은 스스로 되물었다.
‘내게 바르바토스를 검증할 자격이 있을까?’
더불어 이 수석님의 긍지는 그런 자신조차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긍지.
그건 뱅그릿의 혼란한 머릿속에 드리운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수석님이시라면.’
설령 악마라고 한들.
십좌라고 한들.
바르바토스에게도 긍지를 일깨우실 수 있지 않으실까?
아니라고 해도 내게 바르바토스를 판단할 자격은 없는 게 아닐까?
결국, 고민하던 뱅그릿이 입을 열었다.
“다음 검증으로 가도 좋습니다.”
바르바토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뱅그릿 선임.”
뱅그릿은 마지막으로 천장을 살폈다.
역시나 토파즈는 빛나지 않았다.
바르바토스의 발언이 진실하였다는 뜻이었다.
‘인간에게 감사할 줄 아는 악마라니.’
등 뒤로 바르바토스가 지나쳐간다.
스쳐 가는 순간에도 바르바토스에게선 위협이 풍기지 않았다.
뱅그릿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분해.’
바르바토스가 어떤 악마의 권능도 사용하지 않고 사전검증을 통과했다는 뜻이었다. 끼익,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뱅그릿은 그제야 고뇌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어쩌면 통과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복잡한 생각들.
그 바람에 미처 묻지는 못했다만, 바르바토스에겐 갱생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저런 태도라면 마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에 협력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악마에게 터무니없는 기대를 하는 게 아니느냐고.
뱅그릿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긍지를 깨닫게 된다면 혹시 모르잖아?”
긍지.
그래, 긍지는.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자신도 변화시켰었으니까.
‘보자, 이 수석님의 검증까지 앞으로 남은 건.’
마르셀로 탑주님은 사전검증에 참여하지 않으셨으니까.
대략…….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리던 뱅그릿이 흠칫하고 말았다.
“잠깐만.”
문득.
자신의 뒷방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뱅그릿이 흠칫한 이유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불합격입니다, 바르바토스!”
……아뿔싸, 벤쉬 선임님!!
*
아르카나 대륙.
제국의 수도.
안토니움.
“흐아암, 내쉬 경~”
슬슬 어린 황자님의 집중력이 바닥날 시간이었다.
황후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황자 저하를 꾸짖으셨겠지만.
‘그동안 열심히 노력하셨으니까.’
내쉬는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무엇이 궁금하셔서 그리 저를 부르십니까, 저하?”
“실은 내쉬 경에게 궁금한 게 아닙니다.”
“네?”
내쉬는 흠칫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황궁 최고의 마법사였다.
과거였다면 제국 최고를 들먹였겠지만, 이제 그럴 순 없었다.
안토니움에 순혈의 마도 일족, 황혼의 후예들이 정착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내쉬가 괜히 찔려서는 황자에게 되물었다.
“저하, 설마 이 내쉬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물론, 제가 황혼의 후예들보다 마력 친화력에선 밀릴 수 있어도 마법에 관한 이론적 지식만큼은……!”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던 바라고 하더라도.
고작 한마디 말로 주도권을 가져온 어린 황자.
그에게 차기 황제의 자질은 충분한 듯싶었다.
“황혼의 후예? 이론? 친화력? 어렵습니다아, 내쉬 경.”
“이런 제가 착각을 했군요.”
내쉬가 우려하는 바를 깨닫기에.
황자는 너무 어렸으니까.
황자가 칭얼거렸다.
“내가 궁금한 건 그날의 일입니다, 내쉬 경.”
“그날의 일이라면……?”
“저의 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신 그날이요.”
“……!”
폐하가 눈을 감던 날이라.
‘그런가.’
저하께서도 그날의 전말을 궁금해하실 나이가 되신 것이었다. 내쉬는 호들갑을 자제하고는 무게를 잡았다.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황후님께 전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 또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황자가 깃털펜을 끄적이다가 답했다.
“제가 궁금한 건 그날의 ‘불꽃’입니다, 내쉬 경.”
“……불꽃?”
“제국을 위험에서 구해냈다던 불꽃이요!”
불꽃.
그 정체를 내쉬가 모를 수 있으랴.
내쉬가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제 형님에 관해 궁금하신 거였군요?”
“그렇습니다, 내쉬 경!”
“확실히.”
과연, 황자 저하께서도.
우리 벤쉬 형님을 동경하실 나이가 되신 건가.
내쉬가 어느 때보다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쉬 형님께선 저와 다르게 대단하시죠!”
그 한마디로 시작된 동생의 형님 자랑!
내쉬는 가문에서부터 자자했던 벤쉬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렇게 마탑 선임에 오르신 것도 모자라서는! 우리 제국의 구원자이신 이호열 수석님을 이을 차기 수석 마법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하시니까요.”
“우와. 생각보다 더 대단하시네요.”
“그렇습니다. 후후.”
내쉬가 괜히 어깨를 으쓱이던 때였다.
황자가 이번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쉬 경…….”
“또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저하?”
“다름이 아니라 저도 내쉬 경의 형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언젠가는요! 그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감사 인사.
그 말에 내쉬는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황자 저하셨다.
‘벌써부터 제국을 책임지려고 하시다니.’
기특한 마음이 들어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무엄하게 그럴 순 없겠지.
그리고 황자 저하께는 송구한 일이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저하.”
“예?”
“그게 그…….”
내쉬가 말꼬리를 흐리는 일은 많지 않았다. 흔치 않은 반응이 황자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황자가 집요하게 캐묻자 내쉬는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가 된 입장으로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내쉬가 말을 잇는다.
“벤쉬 형님께선……. 예부터 조금 눈치가 없으십니다.”
“눈치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시는 분이라. 본심은 그게 아니더라도 타인은 형님의 직언에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요.”
그러시단 말이지?
그 말에 황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황후,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렸다.
-“황제란 막중한 책임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황자가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령 제게 어떤 말씀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내쉬 경. 벤쉬 경께서는 이호열 경과 더불어 제국을 구원하신 불꽃이시지 않습니까?”
“저하…….”
내쉬는 마음이 뭉클해지면서도 편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다른 건 몰라도 형님께서는 한결같으신 분이셨다.
그렇다.
상대방이 누구든.
어떤 태도를, 저자세를 보이든.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면.
홍염처럼 몰아붙여 불사르시는 분이셨으니까.
*
바르바토스가 되묻는다.
“구체적인 사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벤쉬가 입꼬리를 올린다.
“흐음.”
그 얼굴에서 마도 명문, 윌리엄가의 기품이 흘러나온다. 한마디로 재수가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서 깔아보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는 의미다.
“아직도 토파즈 홀의 규율을 숙지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바르바토스. 사전검증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선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 선언해야만 하거늘.”
바르바토스는 잠깐 고개를 떨궜다.
“문제점이라. 제 답변에 문제가 있었군요?”
벤쉬가 ‘누군가’의 말을 대충 바꿔서 인용했다.
“나는 그대와 대화하지 않는다. 질문자는 나다. 이 토파즈 홀에서 질문을 건넬 수 있는 건 오직 나, 벤쉬 윌리엄뿐이란 말이다.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인 그대가 아니란 뜻이다,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가 답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으시군요. 그러나 제 답변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습니다. 이 순간, 벤쉬 윌리엄 선임의 태도는 불필요한 트집 잡기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벤쉬가 코웃음을 쳤다.
“당돌한 태도로군.”
“칭찬이십니까?”
“그대는 이게 칭찬 같은가? 비꼬는 건데.”
“…….”
처음으로 바르바토스의 말문이 막혔다.
물론,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 벤쉬였다.
동생, 내쉬의 말대로 벤쉬는 눈치가 없었으니까.
“마계의 농담 수준은 잘 알겠군.”
“토파즈 홀의 규율에 따라 행동해 주시지요.”
“마탑의 선임인 나더러 규율을 언급하다니. 누가 보면 이 자리가 마탑이 아니라 악마탑인 줄 알겠군, 그래?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 아주 꼴 보기 싫어. 역시, 그대에겐 불합격이 옳다.”
“…….”
침묵.
바르바토스는 생각했다.
벤쉬 윌리엄, 이 사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다고.
‘허나, 토파즈 홀의 규율에 따라.’
벤쉬와의 사전검증은 무효로 되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된다면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고, 십좌 이호열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바르바토스는 침묵한 채 토파즈 홀을 살폈다.
토파즈.
지혜의 광물.
사전검증이 올바르지 않게 흘러갈 때에 토파즈는 고유의 빛을 경고처럼 쏟아낸다. 그 규율을 간과한 채 토파즈 홀 사전검증을 통과할 순 없는 일.
그런 의미에서 바르바토스는 여유로웠다.
“이 사전검증의 귀책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반짝.
홀을 장식한 토파즈가 이내.
찬란한 황색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니까.
벤쉬가 답했다.
“그렇군.”
오직 진실만을 답한 바르바토스에게.
벤쉬는 쓸데없는 트집을 잡았다.
토파즈 홀이 간과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벤쉬가 바라던 바였다.
“그러니 나는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
“이의를, 당신이요?”
“그렇다.”
벤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대가 통과한 모든 판결에 대한 이의를.”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자신의 동료, 선임 마법사들이 바르바토스를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억지스럽고 집요한 사고방식이 꿰뚫어본 것이었다.
“그대는 답했다, 바르바토스.”
바르바토스의 얄팍한 속임수를.
“부디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달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하는 잘못이 무엇이지?”
‘잘못’이 무엇이느냐에 따라서.
바르바토스의 선언은 완전히 달라진다.
벤쉬는 간과하지 않은 것이었다.
“더는 비겁한 방관자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했던가?”
“…….”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행동은 더없이 옳군. 이 순간 그대는 홀로 적진으로 진격해 적장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악마들에게 있어선 영웅과도 같은 행보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벤쉬가 바르바토스에게 덧붙였다.
“답하라, 바르바토스.”
제주도에서의 부상으로 당분간 마법을 발현할 수 없다고 했거늘.
어째서인가.
벤쉬의 뒤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참고로 나는 그대의 기만에 몹시 화가 난 상태다.”
“…….”
그러기도 잠깐.
곧 대답이 돌아왔다.
바르바토스가 아닌.
텔레파시 너머.
“예? 그냥 통과시키라니요……?!”
이 수석님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