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96
방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이나 되었다.
기수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권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모두 다 아는 얼굴이었다.
특히 청성파 도사 소검평이 눈에 띄었다.
그는 예전 수로맹에 있을 때 만나보고 처음인데, 수염 형태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와 표정에도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았다.
아미파 능소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여러 번 찾아주셨는데 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던 제가 미안합니다.”
능소화는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졌고, 얼굴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오랜 전쟁이 그녀의 미모엔 안 좋게 작용한 것이다.
그래도 바탕의 아름다움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말했다.
“한 때 신주오룡이란 이름으로 외람되이 불리던 다섯 사람이 있었어요.”
“알고 있습니다. 합당한 이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능소화는 가볍게 미소 지은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현현각의 습격 때 장문인을 도와 싸우다가 소림의 현범, 무당의 진운, 곤륜의 방옥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세 명 중 마음에 드는 사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자리한 십절금왕문의 소문주 백무련과 백서린 남매, 모용세가의 소가주 모용인, 사해문의 호문평과 호운혜 남매, 화양문의 양여옥 등도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먼저 죽은 전우, 그것도 무공으로나 인품으로나 훌륭했던 그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능소화가 잠시 지난 후 다시 말했다.
“다섯 중 둘만 남았는데, 화산의 나도성 소협은 지난번에 떠난 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 혼자 남은 지금 신주오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마침, 그동안 뿔뿔이 흩어져 배치되어 있던 용봉련 영웅들이 이곳 함양에서는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기에 다시 모임을 가졌으면 합니다.”
기수는 그런 모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꼈다.
본진과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단 편성을 마친 지금 굳이 엘리트끼리 따로 모이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정도 무림의 잘 나가는 문파 자제들끼리 친목을 다져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중요한 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적이 코앞에 주둔하고 있는데 모임은…”
기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하자 호운혜가 끼어들었다.
“아직 소식을 못 들으셨군요. 적은 퇴각했어요.”
“퇴각?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정오 무렵부터 전령들이 바쁘게 오가면서 확인했어요.”
기수는 믿을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그들이 왜 퇴각했단 말인가.
청성파의 소검평이 말했다.
“동창이 이토록 신속하게 관군을 동원할 줄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장안이 코앞이니 조정에서도 수수방관할 수는 없는 일 아니었겠습니까.”
기수는 약간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무림맹 사람들 대부분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가는 만큼, 자신도 음종을 깨부수는 일에 열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력을 철수해 버렸다니….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물러갈 리가 없습니다. 놈들은 분명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맹주님이 적의 동향을 탐지하도록 척후대를 따로 편성했습니다. 제갈세가가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니까요.”
기수는 신임 맹주 주일비에게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시간 여유가 생긴 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행류를 좀 더 완벽하게 가다듬을 수 있겠군.’
호운혜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용봉련의 련주로 누가 적합할까 생각해봤어요.”
기수는 여덟 명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설마…..”
“양호법께서 우리 용봉련의 대표가 되어주세요.”
설마 했던 그 말이 능소화의 입에서 나왔다.
기수는 곧바로 거절했다.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문의 명성으로나, 일신의 무공으로나,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능소화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난주 전투에서 비룡검문과 양호법이 펼친 활약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기수는 물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명문가 자제들 모임에 얼굴 마담 되려고 한 일은 아니었다.
“여러분의 호의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본래 출신이 천하고, 배운 게 없는 몸인 데다가, 풍채는 한심하고, 성격은 편협하며, 행동은 노둔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여러 용과 봉이 모인 자리에 낄 수 있겠습니까?”
자기 비하를 최대한 많이 집어넣었음에도 통하지 않았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양호법이 그런 분이었다면 백공자, 모용공자, 호소저가 적극적으로 추천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수는 세 사람 쪽을 봤다. 모두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를 련주로 추천했다고?’
호운혜의 의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이 갈리니까 가까이 있을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모용인의 경우엔 한 번 져준 이후로 자기에게 호감을 품은 게 느껴졌고, 백무련은 자기를 가까이 둬야 감시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어쨌거나 용봉련의 핵심이랄 수 있는 4문 5가 사람들이 추천을 했다고 하니까 살짝 마음이 움직였다.
거기에 능소화가 집요하게 요구하자 결국 기수는 태도를 바꾸었다.
“전 비룡검문에 매인 몸입니다. 문주님께 먼저 여쭤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시지요.”
8명이 우르르 일어나서 기수를 끌다시피 하고 진백 앞으로 갔다.
진백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기수는 등 떠밀려서 용봉련의 련주가 되고 말았다.
용봉련 소속 청년 무림인들은 이미 무림맹주에게 허락을 받아 건물까지 확보해둔 상태였다. 기수는 그곳으로 함께 가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수장이 되었다.
젊다고 다 받아주는 모임이 아니다 보니 인원은 많지 않았다.
련주인 양십일과 그를 따라 함께 가입한 순우광, 조치성이 가장 처진다 싶을 정도로 다들 쟁쟁한 문파의 소가주, 소문주, 수제자들이라 내뿜는 기도도 범상치 않았다.
그들과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것은 의외로 기수를 즐겁게 했다.
다들 기본 학식과 교양이 갖춰졌으면서도 젊은 무림인답게 고지식하지는 않아서 그냥 모여서 누군가 떠드는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리고 청춘남녀가 모인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할도
연회가 밤늦도록 이어지는 바람에 기수는 새벽이 되어서야 운기조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고 나니까 몸이 가벼웠다.
기수는 아침 일찍 무림맹주 집무실을 찾아가 자기가 련주 된 것을 알렸다.
주일비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축하해주었다.
“감축드립니다! 정도 무림의 큰 복입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몇 마디 덕담을 더 듣고 집무실을 나온 기수는 곧장 합가촌으로 갔다.
낡은 집에선 합비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합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합비는 식탁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그릇과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제자가 해주는 밥 좀 먹어보자! 이 나이에 내가 물 길어오고, 장작 패서 직접 밥 지어 먹어야 되겠냐?”
“내일은 일찍 오도록 하겠습니다.”
제자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제자가 아니라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사과하고 말았다.
혀를 끌끌 차던 합비가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오늘은 각오해라! 네놈을 반드시 토하게 만들 테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하고 진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뭔가가 명치를 쿡! 찌르는 바람에 서너 걸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으윽! 이, 이건 뭡니까?”
“크크크…. 적이 꼭 금류만 쓰란 법 있느냐!”
그리고는 곧바로 폐를 압박하는 공격이 이어졌다.
명치에 한 방 맞은 다음이라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기수는 5분도 버티지 못하고 호흡곤란과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졌고, 어젯밤 맛있게 챙겨 먹은 안주와 술을 모두 토하고 말았다.
합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잉!… 거긴 네가 다 치워라.”
기수는 삽을 들고 나와 상황을 정리한 후 잠시 기혈을 가라앉혔다.
“어르신. 어째서 오늘은 어제만도 못한 걸까요?”
“어제는 처음이니까 살살 했지. 오늘부터가 진짜야.”
기수는 그 말에 의기소침해졌다.
합비의 말이 이어졌다.
“그 키다리 멀대 놈이 아직 살아 있다면 방금 것 정도는 막아내야 접근이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준비 되는 대로 다시 시작하자고.”
“알겠습니다.”
기수는 다시 각오를 다졌다.
‘방패만 완성하면 나머지 부분에선 내가 이길 거야. 이 고비만 넘기면 돼.’
기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한 뒤 진기를 끌어올렸다.
“한 번 더 부탁합니다!”
“그래. 마음 자세가 아주 좋구나. 크크크…. 간다!”
합비의 강렬한 강기 공격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기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화류의 강기 운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처음엔 울렁거림과 압박감을 이기기 어려웠지만, 공격이 강해지니까 절박해져서인지 집중력도 올라갔다.
한참 뒤 합비가 손을 내리고 말했다.
“점심 먹고 다시 하자.”
기수도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지난 줄 알았는데 이제야 겨우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기수는 시키지 않아도 주방으로 들어가 불을 피우고 밥을 했다. 요리 실력이 부족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반찬이 오로지 소금뿐이라서 탄로 날 일은 없었다.
오후에도 훈련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기수는 합비의 공격이 강할수록 성취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이후 계속해서 좀 더 강하게 몰아붙여주기를 청했다.
한계를 넘기지 못해 무너질 때도 있었지만 점점 강기 운용이 능숙해졌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자 합비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자.”
“예. 어르신.”
“하하!… 너 진짜 독한 놈이구나. 그걸 다 견뎌낼 줄은 몰랐다.”
“어르신도 진기 소모가 심하셨을 텐데.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파천강기를 운용해봤기 때문에 합비가 아무 말 안 해도 속으로는 꽤 힘들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합비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야, 약속을 한 거니까. 크크크….”
“저녁 지을 준비를 하겠습니다.”
“됐다! 네놈이 지은 밥은 너무 되서 못 먹겠더라. 난 한 사나흘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넌 그동안 몸을 추스르고 혼자 연습하고 있거라.”
“떠나신다고요?”
“너도 며칠 쉬는 게 몸에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여긴 나 없는 동안 마음대로 써도 된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네가 지내는 장원보다는 수행하기 편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장은 쉬고 싶은 마음뿐이라 휴식이 반가웠다.
그날 비룡검문의 숙소로 돌아온 기수는 정신없이 서너 시간 쯤 잔 뒤에 일어나 운기조식으로 몸을 재정비했다.
‘어라? 이상한데….’
진기의 흐름이 전에 비해 상당히 두터워진 느낌이 들었다.
기수는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합비의 계속된 공격이 일종의 추궁과혈처럼 작용하고, 거기다 자신의 집중력이 더해져서 내공증진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잠들 때만 해도 온몸 안 아픈 곳이 없고, 머리는 어지럽고, 뱃속은 메슥거렸지만 운기조식을 마치고 나니까 온몸에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합비에게 다시 한 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물로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기수는 개운한 기분으로 용봉련이 모이는 객청 쪽으로 갔다.
걷는 동안, 자기와 마주치는 무림맹 사람들, 특히 젊은 남녀의 표정이 바뀐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전엔 단순한 경외심뿐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노력이 느껴졌다. 용봉련에 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직접 찾아와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나 안 불러?”
“아! 사하…”
그녀가 길목에서 기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봉련 련주가 되었다며? 그런데 왜 연락이 없었어? 혹시 우리 보타문은 거기 낄 자격이 없다는 거야?”
“아냐.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지금부터 나도 거기 소속이다. 불만 없지?”
“없어. 전혀….”
두 사람은 웃으며 함께 객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실내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하게 굳었다.
먼저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호운혜와 백서린, 능소화 세 사람이 기수와 함께 들어온 여인을 보고 대화를 딱 멈춘 것이다.
기수는 아차! 싶었다.
호운혜와 사하가 곧바로 살기를 피워 올렸기 때문이다.
“저 잡….”
“저 개….”
두 여인은 동시에 상대에게 욕을 퍼부으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객청 안에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하는 그 순간 민첩하게 처신했다.
능소화와 백서린을 향해 먼저 인사를 한 것이다.
“반가워요. 저는 남해 보타문의 사하라고 해요. 아미파의 능소저, 십절금왕문의 백소저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활달한 성격의 사하가 밝게 웃으며 인사하자 능소화와 백서린도 환한 미소로 그녀를 환영했다.
“반가워요. 보타문의 명성은 저희들도 익히 들었어요.”
“사소저도 용봉련에 가입하셔야죠.”
사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는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련주님이 특별히 찾아와서 권하시는 바람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호호호!….”
“자격이 안 되다니요. 너무 겸손한 것도 실례랍니다.”
“그런가요? 호호호!….”
기수는 사하가 금방 적응하는 걸 보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호운혜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자 등줄기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