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97
엉겁결에 앉게 되었지만, 기수는 용봉련의 련주 자리를 나쁘지 않게 생각했다.
혈매궁의 궁주라는 자리는 사실, 밤에만 열심히 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다. 동창 출신이라 조직생활에 대한 기본이 몸에 밴 사매들, 그리고 새롭게 가세한 후 팀의 리더가 되어버린 똑똑한 탁지연. 그들이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문파나 조직은 사정이 좀 달랐다.
기수는 진백을 옆에서 보면서, 그리고 자신이 호법이란 직책을 맡아 비룡검문 제자들을 이끌면서 뭔가 새로 배우는 게 있었다.
아랫사람을 다루는 법이랄까.
마냥 좋게만 대해줘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엄해서도 안 되는, 뭔가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새 무복을 사주는 것만 해도, 두 번쯤 반복 되니까 세 번째 옷을 은근히 바라는 제자도 있었다.
처음엔 호의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기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거저 생긴 것에 감사하면서 또 생기면 좋고, 아니면 마는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조직이 커지면 그 안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차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새 옷 바라는 제자가 나쁜 놈도 아니었다.
할 때는 또 하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보듬어주면서 함께 가야 했다.
훈련을 시킬 때도 누구는 충분하고, 누구는 모자란데 그 각각에 대해 다른 규칙을 적용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100명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기수가 느끼고 배운 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용봉련의 련주는 그런 면에서 한 단계 더 높은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룡검문에선 호법과 제자 사이에 상하 관계가 확실해서 명령을 내리면 싫어도 따르지만, 용봉련의 련주는 그 정도까지의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저마다 왕자처럼, 공주처럼 떠받들려 자라온 명문가 자제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커 온 유명 문파의 수제자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런 그들과 역학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막 재미를 붙이려는 판인데, 취임 이틀째 되는 날 바로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호운혜와 사하.
기수는 화합을 바라지만, 둘은 절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사이.
‘아! 이런 게 2년차 징크스인가?’
2년과 이틀의 차이는 크지만 어쨌거나 뭔가 심하게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치적으로야 자기를 사하와 떼어놓기 위해 련주 추천에 적극적이었던 호운혜 편을 들어줘야 맞겠지만, 마음은 사하에게 쏠리고 있었다.
노려봐도 기수가 딴청만 피우자 호운혜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녀는 대화에 끼어들어 자기가 화제를 주도하면서 능소화, 백서린과의 오랜 친분을 과시했다.
사하는 알 리가 없는 중원 무림맹 시절의 얘기들을 계속 꺼내는 것이었다.
사하는 호운혜를 노려봤지만 끝내 버티면서 치고 들어갈 기회를 기다렸다.
기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기에 마음속으로 사하를 응원하면서 눈으로는 백서린의 허리에서 힙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감상했다.
‘햐! 몸매는 진짜….’
언니과 풍만하고 농염하다면, 백서린은 슬림하면서도 올록볼록의 비율이 충분히 대비되고 있어서 오히려 더 끌렸다.
예전에 한 번 잔 사이지만, 그동안 하도 많은 여자…. 하도 많은 시간이 흘러서 기억이 좀 흐릿했다. 그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으헉! 저 가슴골 봐라! 저거…. 호운혜도 긴장해야 하겠는 걸.’
그때 한 여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예….”
기수가 돌아보니 사천당가의 당운영이었다.
기수 입장에선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그녀였다.
물론 당운영은 기수를 전혀 몰라봤다.
“련주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전 사천당가의 운영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당운영이 기수에게 말했다.
“제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기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약을 먹게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었다.
“이번 현현각과의 대결에서 우리 당가의 독을 쓰게 해주세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지난번 전투에서 제 숙부님과 숙모님이 그들 손에 돌아가셨어요.”
“저런….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좋은 분들이었는데…”
“제 숙부님을 아시나요?”
“아! 그건 아니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당운영은 다행히 더 따지지 않았다.
“어제 참석하지 못한 것도 두 분의 장례문제 때문이었어요. 저를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두분의 복수를 꼭 제 손으로 하고 싶어요. 하지만 맹주님은 독공을 하자는 제 제안을 받아주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련주님이 건의를 좀 해주세요.”
“그, 글쎄요….”
무림맹이 아무리 위기에 몰렸다고 해도 독을 써서 사마연합을 제압하는 건 그림이 좀 아닐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은 동창이 관군을 잔뜩 거느리고 응원 나와서 적이 퇴각까지 한 상황 아닌가.
당운영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당가의 독이라면 적의 음공 못지 않게 광범위한 지역에 한꺼번에 타격을 주어 놈들을 몰살을 시킬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건의할 수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야 그 방법이 가장 통쾌한 복수이겠지만, 무림맹이 독살 당한 시체 수백, 수천 구 앞에서 감염을 걱정해야 하겠는가.
“사천에서 다른 분이 오지는 않습니까?”
“오기로 했지만 전 지금 당장 복수를 원해요!”
기수는 그녀를 달랬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당소저의 복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려주십시오. 사마연합이 전부 퇴각했으니 그들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당운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절망하는 모습이었다.
기수는 마음이 짠했다.
‘위로 좀 해줄까?’
사실,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둘만 아는 암호 같은 게 있었다.
씨발년. 그 단어만 말하면 당운영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어떻건 정체를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녀를 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갈등이 일었지만 그 망설임은 금방 억누를 수 있었다.
사하와 호운혜의 대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 나도 참 운도 없지.’
한 때 동침했던 여인들이 전보다 더욱 성숙한 미모를 자랑하며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본색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정말 억울했다.
‘그래도 참아야 돼.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사하 한 명으로 족해.’
그러고 보면 호운혜는 본래 얼굴을 안 보고도 집착을 하는 거니까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 지내는 동안은 절대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자고 결심한 기수는 모임이 진행되는 내내 호운혜의 독기 어린 시선을 피하느라 애를 먹다가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모임이 파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 용봉련이 다시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은 하늘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이렇게 술과 음식을 나눠 먹고 축하하는 것은 하루나 이틀로 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림인 아닙니까? 그래 제가 감히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기수를 봤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사냥을 가고자 하니 동조하는 분은 진시까지 이 자리로 모여 주십시오.”
능소화가 물었다.
“무엇을 잡겠다는 거죠?”
기수가 씩 웃은 후 대답했다.
“사마연합 놈들입니다.”
좌중이 술렁거렸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당운영이었다.
“좋아요! 우리가 가서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요!”
능소화는 약간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끼리 단독행동을 해도 될까요?”
기수가 대답했다.
“맹주님께 허락은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적이 도망치고 숨은 상황이니까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적이 있음직한 곳을 수색해서 동태를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공격도 가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당운영 외에도 이번 현현각과 사마연합의 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문파는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피해가 크지 않은 문파 출신이라고 해도 젊은 혈기에 일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은 따분한 일이었다.
기왕 용봉련이 재집결했으니까 뭔가 주도적인 활동으로 세인의 주목을 끄는 게 그들의 요구에도 부합된다 할 수 있었다.
기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즐겼다.
안에 문제가 있을 때 주의를 외부로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호운혜와 사하의 신경전을 아슬아슬, 불안한 심경으로 지켜보느니 밖으로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훨씬 나은 일일 것이었다.
‘난 도대체 왜 이렇게 똑똑한 거지?’
기수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사람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들 호기롭게 외치며 하나로 똘똘 뭉친 것 같은데, 그러는 중에도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기수는 뭔가 감이 왔다.
‘내일 정말로 모이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될 것 같군.’
뭔가 핑계 댈 거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소림방장을 죽인 무서운 고수와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지금은 분위기에 취해서 다들 떠들어대지만 잠자리에 누우면 공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컸다.
평소의 기수라면, ‘싫은 사람은 관두고, 갈 사람만 가면 되지.’ 라고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용봉련 련주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출석률을 높일 수 있을까?’
나온 사람보다 안 나온 사람이 더 많게 되면 팀의 단합에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모처럼 기획한 사마외도 사냥이 안 하느니만 못했다는 평을 받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련주의 지도력이 약화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제로 집합시키거나 협박을 할 수도 없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기수는 손짓으로 모두를 조용하게 만든 후 말했다.
“한 가지 미리 얘기해둘 게 있습니다.”
모두 기수에게 집중했다.
“내일의 출정은 몹시 어렵고 힘든, 그리고 어쩌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몇몇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경공에 자신 없는 사람은 나오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짐만 될지도 모르니까요.”
겁먹었던 표정이 오기로 바뀌고 있었다.
기수는 속으로 웃었다.
내일 안 나오면 스스로 경공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자! 내일 봅시다! 오늘은 다들 일찍 잠자리에 드십시오.”
기수는 자리를 파했다.
그리고 자신의 숙소로 가서 밤새 운기조식을 한 후 날이 밝자마자 무림맹주 집무실로 가서 접견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용봉련의 출정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가 용건을 얘기하자 주일비는 조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적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지 못했으니 위험해질 수도 있소.”
“그걸 저희들이 돕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척후병보다는 저희 용봉련 동료들이 좀 더 넓은 범위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도라면 감사를 드려야지요.”
주일비는 그동안 무림맹이 파악한 배치상황을 기수에게 자세히 보여주었다.
무림맹 본진과 사신단, 척후병, 감시초소의 위치는 물론 동창이 동원한 관군의 배치상태와 이제까지 파악한 사마연합의 퇴각경로들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기수는 지도를 머릿속에 잘 외워두었다.
주일비는 기수에게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용봉련에서 척후를 도와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적과 전투를 벌여 사상자가 생기거나 포로로 잡힌다면 우리 측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기수도 오행류가 완성되기 전에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부탁합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일비에게 인사를 하고 나와 용봉련 모임장소로 간 기수는 깜짝 놀랐다.
어제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거의 다 나왔기 때문이다.
출석률이 거의 90%는 될 것 같았다. 대단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이 정도로 단순하다니…’
하긴, 그게 무림인다운, 청년다운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수는 편의상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자신과 아미의 능소화, 그리고 장백천문의 단운비가 각각 일단을 지휘하도록 했다.
그리고 각자 보유한 물과 건량의 양등을 확인한 후 장원 밖으로 나갔다.
기수는 새로 만든 장검과 20자루 단검 꽂은 조끼, 그리고 유성추까지 갖춘 무거운 차림으로 선두에 섰다.
우선 맹주 집무실에서 봤던 지도를 근거로 방향을 잡았고, 기감을 최대한 끌어 올려 전방의 상황을 살폈다.
밀집한 적과 준비 없이 마주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방에 집중하던 기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다들 엄청 진지한 얼굴로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기수는 용봉련 식구들이 명문가 자제 혹은 유명 문파의 수제자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선풍비를 시전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좀 빨랐던 것이다.
‘뭐야. 그새 내공이 또 증진된 건가?’
합비한테 두들겨 맞고, 구르고, 토한 게 헛고생은 아닌 듯 했다.
그 상태로 전방에만 집중하면서 달리다 보니, 자기는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련주가 경공실력을 테스트 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기수가 속도를 늦추고 걸음을 멈추자 각자의 능력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모두가 합류했다.
“자!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갑시다.”
여기저기서 물통 마개를 여는 사람이 보였다.
기수는 그들에게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기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엔 원망이 아닌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역시 무림인들 사이에선 말보다 실력을 한 번 보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