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63
기수가 여장을 한 것은 공주의 입장을 생각해서였다.
처음엔 놀라던 공주도 화장을 해주고는 재미있다며 깔깔 거렸다.
거울을 보니 그럭저럭 봐 줄만은 한데 아무래도 남자의 자존감이 손상당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공주가 지우고 다른 화장을 한다면 달려들고 아투사까지 옆에서 거들고 나서니까 기수는 더 이상 도화지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아서 화장해도 별 보람이 없는 투박한 골격으로 바꾸었다.
그제야 겨우 공주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치마를 입는 데서도 또 사나이의 자존감이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사도.
그 처치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장을 하고라도 자기가 꼭 가야만 했다.
경양궁으로 들어선 공주는 거침없이 한귀비의 처소로 들어갔다.
궁녀들이 깜짝 놀라 물었다.
“고, 공주마마!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한귀비는 어디 있느냐? 썩 나오라고 해라!”
공주와 두 궁녀가 검과 칼을 차고 살기등등하게 들어서다 보니 분위기는 금방 어수선해졌다.
그 와중에도 일부 궁녀는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며 방어진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기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궁녀들 허리띠를 조심해. 연검이야.”
공주와 아투사가 동시에 기수를 돌아봤다.
얼굴을 바꾸면서 목소리도 여성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낯설었던 것이다.
공주는 몸을 한 차례 떤 후 궁녀들을 향해 말했다.
“당장 한귀비를 불러오라고 했는데, 네년들은 무엇이기에 감히 길을 막고 서있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그러나 10명 정도 되는 궁녀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았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공주 일행을 노려봤다.
공주는 화가 났다.
설마하니 궁녀들이 자기한테 이런 불손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오냐! 너희들이 이걸 원한다면 기꺼이 주마.”
기수는 그녀의 표정이 자기를 밟을 때와 비슷해진 것을 발견하고 궁녀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바로 그때. 한귀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리 소란스러우냐?”
그녀는 검을 든 공주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지만 곧 안색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공주마마.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한귀비. 나와 함께 가줘야겠어요.”
“어디를 말입니까?”
“동창에서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 해요.”
한귀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한 차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물었다.
“동창에서 절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건 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동창의 일인데 공주마마가 나선 이유는 더 더욱 모르겠군요. 검까지 뽑아들고.”
한귀비가 여유 만만하게 나오자 공주는 발을 굴렀다.
“흥! 네 정체를 모를 줄 아느냐?”
한귀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 정체가 뭔데요?”
“역모에 가담한 자객!”
한귀비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공주마마 이제 보니 참 재미있는 분이네요.”
“흥!… 태연한 척 연기해도 소용없다!”
“황상께서 이 광경을 보시면 뭐라실지 정말 궁금하네요. 호호호!…”
한귀비가 계속 웃어넘기자 공주 쪽이 당황했다.
당장 오늘밤이라도 암살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다급한 마음에 달려오긴 했지만 황상이 총애하는 귀비를 역모와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주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검을 뽑은 이상 오늘의 일이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한귀비를 제압하고 볼 일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만욱이 거느린 환관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담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금군도 출동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금남의 구역인 궁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상태였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구경하던 궁녀들은 모두 자기들 거처로 숨어버렸고, 마당엔 한귀비와 그녀를 호위하는 10명의 궁녀. 그리고 공주 일행과 동창의 창주 만욱이 거느린 30여명의 환관이 대치하고 마주섰다.
한귀비는 만욱을 보고 오히려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만태감님. 오랜만이네요.”
“예. 귀비마마.”
“만태감님도 공주마마의 놀이에 동참하러 오신 건가요?”
만욱은 대답을 못하고 공주만 바라봤다.
증거를 보여준다고 했으니 어서 제시하라는 표정이었다.
공주는 입맛을 다셨다.
동창은 부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지, 자기 수하라고 볼 수는 없었다.
황상에게 충성하는 입장에서 명백한 근거 없이 귀비와 공주 중 한쪽 편을 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기수가 한 걸음 나섰다.
그는 한귀비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청탑산의 사범이 너에 대해 모두 말했다. 주군을 도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한귀비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이제까지 여유 만만하던 미소는 싹 사라지고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너, 너는 누구냐?”
기수는 그녀가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염정구심술 동조를 시도했다. 상대가 고수일 경우 제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읽기만 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기수는 상단전으로 염정구심술을 운용하면서 대답했다.
“나는 공주마마를 모시는 궁녀다! 그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너희 일당의 음모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번에 돌아왔다.”
한귀비는 공주와 만욱을 번갈아 쳐다봤다.
만욱은 한귀비의 반응을 보고 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턱짓을 하자 동창 소속 환관들이 한귀비와 궁녀들을 포위하는 대형으로 서서히 벌려 섰다.
한귀비는 기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두근거림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다.
“이제 보니까, 너….”
기수는 씩 웃었다.
“이제야 알았느냐?”
한귀비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이제야 앞뒤가 맞는구나. 그동안 우리를 괴롭힌 배후에 공주가 있었단 말이지?”
“그건…”
기수는 해명을 하려고 했다.
괜히 자기와 사도들 싸움에 공주를 끼워 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사람들 많은 데서 말을 많이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귀비를 죽여 버리면 모두 해결될 일이었다.
공주와 동창 입장에선 한귀비를 잡아 심문하고 싶겠지만, 기수의 계획은 달랐다.
사도는 기회 있을 때 무조건 죽여야 했다.
한귀비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퇴로를 찾는 게 분명했다.
공주가 호통을 쳤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러자 한귀비가 기수 쪽을 한 번 노려본 후 대답했다.
“도망치기는 누가 도망친다고 그래요? 저 궁녀가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왜 나를 계속 못살게 구는 거죠?”
시간을 끌어보려는 수작이란 건 알겠는데, 기수의 한두 마디가 한귀비의 역모 가담을 입증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수가 말했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네가 태화각과 주고받은 서찰들을 이미 증거로 다 확보해놓고 있으니까.”
한귀비는 눈을 부릅떴다.
“네, 네가 어떻게 태화각에 대해 알고 있느냐?”
물론 기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염정구심술 동조를 통해서 그녀가 지금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그거라는 사실을 읽었기에 찔러본 것이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고. 이제 순순히 포승을 받아라.”
한귀비는 주예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주마마. 대단하시군요. 그동안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러더니 느닷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의 긴 소매 안에서 십여 개의 암기가 한꺼번에 공주를 향해 날아갔다.
공주는 깜짝 놀랐지만 이미 검을 뽑아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암기들을 모두 튕겨낼 수 있었다.
“흥! 이따위 수작이 통할 줄 알았느냐?”
그러나 한귀비의 목표는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는 기수를 더 중요한 적으로 봤다.
“내 오늘 기필코 네년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동료들을 해친 숙적이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으니 반드시 죽여서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기수도 검을 뽑아 그녀를 찔러 들어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난 년 아니다. 이년아.”
쩡! 쩡!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기수의 검은 한귀비의 팔에 막혔다.
소매 안, 그녀의 팔뚝엔 긴 금속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기수는 이를 악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귀비의 무공은 무시무시했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멸천제 수준, 어쩌면 그 이상인 것으로 느껴졌다.
뒤로 서너 걸음 밀리면서 반격을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데 한귀비의 눈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녀가 단검을 뽑아들어 기수의 얼굴을 찔렀다.
기수는 검으로 그 단검을 쳐냈다.
그러나 쨍!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검이 두 동강나고 말았다.
기수는 계속 뚫고 들어오는 단검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굴려야 했다.
그때 아투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드!”
기수는 그게 그녀가 찾는 단검의 이름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한귀비의 손에 들린 단검의 자루에 보석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장검을 간단히 부러뜨린 그 단검이 바로 카드였던 것이다.
공주와 아투사, 그리고 만욱은 기수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들어 그를 구하려 했지만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한귀비의 궁녀들이 일제히 싸움에 가세했기 때문에 우선 그들을 제압해야 했다.
한귀비는 단검으로 기수를 내리찍었다.
순간 기수의 양손에서 파천강기 수십 발이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파파파파팍!…..
한귀비는 양손을 십자모양으로 교차한 채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 기수는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한귀비의 긴 소매는 걸레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팔엔 상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으음….”
기수는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 멸천제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황궁에 침투시킬 정도면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골랐겠지만 기습적으로 발출한 파천강기를 맞고도 말짱한 것은 의외였다.
기수는 세 단전 모두에 의식을 집중했다.
‘긴 싸움이 되겠군.’
마음 같아서는 역용술에 낭비되는 진기도 전부 되돌리고 싶었지만 공주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교차했던 팔을 푼 한귀비는 냉소를 지으며 너덜거리는 소매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장식과 가발도 떼어내고 치렁치렁 늘어진 목걸이와 허리띠도 단검으로 끊어버렸다.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미였다.
그녀를 둘러싼 기도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를 만드는 걸 느끼며 기수도 정신을 집중하여 단정홍과 화류의 호신강기, 그리고 분광권을 각각 준비했다.
한귀비는 곧장 달려들어 기수를 찌르려고 하다가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기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공을 가했다.
“뭘 머뭇거리고 있느냐! 승부를 가리자!”
순간, 확! 하는 폭음과 함께 허공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한귀비는 그 갑작스런 변화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로 기수의 두 손이 수백, 수천 개의 그림자를 만들며 파고들었다.
한귀비는 단검의 날카로움을 내세워 버텨보려 했지만 계속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한 순간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기수와 손이 맞닿는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다급성을 터뜨렸다.
“아앗!”
“으윽!…”
동시에 뒤로 물러서서 간격을 벌린 두 사람은 저리는 팔을 흔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서로에게 단정홍을 먹인 것이다.
한귀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이 수법을 알고 있지?”
“주군이 내게 가르쳐줬다.”
“흥! 거짓말 마라! 그분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다.”
“무슨 소리야? 내게 꽤 친절하게 대해주셨는데…”
기수가 있지도 않은 일을 떠벌리는 것은 잠시의 틈을 이용해 염정구심술을 펼쳐 주군이란 자의 정체를 파헤치고 싶어서였다.
과연 한귀비의 머릿속에 주군이란 자의 영상이 떠올랐다.
청탑산에서 사범의 생각을 읽었을 때 봤던 바로 그 얼굴.
그러나 이번엔 입고 있는 옷이 달랐다.
금장식이 가득한 비단옷. 앉아 있는 의자나 탁자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엄청난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 읽기는 아쉽게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궁녀들의 방해를 뚫고 공주와 만욱이 한귀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수는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2대1의 싸움은 순식간에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공주의 무공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지만 동창의 창주 만욱의 실력은 처음 보는 거라 은근히 호기심이 동했다.
나이 들고 왜소한 환관이 상승 무공을 펼쳐내는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기수 입장에선 약간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만욱의 무공은 지난 두 천호 진유룡과 곽염을 약간 상회했다. 그 정도면 일반적인 무림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절세고수 반열에 들 수 있겠지만, 사도 한귀비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기수는 진기를 끌어 올린 후 즉시 싸움에 가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