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92
기수는 공주와 사매들에게 말했다.
“나 잠시 쉬어야겠어. 시간을 좀 줘.”
그리고 조용한 자리를 찾아 바위에 걸터앉은 후 신을 불렀다.
[기다리라고 했다고 삐진 건 아니죠?]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정확히가 맞는 표현일 겁니다… 어쨌거나 한귀비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인간세상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신이면 누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전에 얘기했지만, 그렇게 하면 너의 위치도 노출 돼.]
기수는 잠시 생각했다.
‘이젠 저쪽에 3명밖에 안 남았으니까 그래도 상관없지 않나?’
그러나 은혈대법 활성화 상태의 한귀비는 현재 자신의 능력으로 좀 버거운 느낌이 있었다. 찾는다 해도 잡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둘에게 자기 행적을 드러내서 뭐 좋을 일이 있겠는가.
만약 적의 수를 하나 더 줄여서 둘만 남게 된다면 그땐 써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은혈대법이 풀린 쌍대째 놈을 찾아내서 쉽게 처단하고 나면 어차피 돛대와 1:1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일단은 어떻게든 제 힘으로 찾아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들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라도 연구를 하면 혹시 감지 범위를 넓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마신과 나 사이에 약간의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파장이 비슷해서 동조가 이루어진다고나 할까.]
[무슨 연관인데요?]
[우린… 형제거든.]
[하핫… 형제라… 하핫…..]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얘기였다.
[너. 괜찮은 거냐?]
[형젠데 한 명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다른 하나는 마신이란 겁니까?]
[뭐 일단 우리 둘은 그렇지.]
[설마… 또 다른 형제도 있나요?]
[몇 명 더 있지.]
기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이 형입니까?]
[굳이 태어난 순서를 따지자면 그가 형이지. 우리가 살아온 세월 중에 그 차이는 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말야.]
[어쨌거나 형이 똥 싸지르고 다니는 걸 동생이 어쩌지 못해서 인간에게 힘을 빌린다… 뭐 그런 얘기군요.]
[표현이 좀 그렇군…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 지구에 애착이 가서 차마 그럴 수 없었던 겁니까?]
[장소보다는 생명이 가여워서…]
기수는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당신이 혹시 성서나 코란에 적혀있는 그 신인가요?]
[그건 아니다. 내 구역은 원래 지구가 아니었거든. 적도 부근의 섬나라에서 잠시 지낸 적은 있지만 말야.]
기수는 자기가 현대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날을 기억했다.
지하철에서 받은 검정 비닐봉지. 그 안에 있던 괴상한 물건.
만약 그 형상이 이 신의 외모라면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나오는 하나님보다는 악마 쪽에 가까운 겉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는 짓으로 봐서 나쁜 마음은 없는 것 같으니까 그냥 좋게 생각해주기로 했다.
[신마다 구역이 따로 있습니까?]
[뭐, 일단… 그런 식으로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런데 왜 남의 구역으로 넘어오셨나요?]
[그를 따라다니다가 이 시간, 이 공간까지 오게 되었지. 그 역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거든…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형제니까.]
[그런데 형은 사도를 12명이나 만드는데 당신은 고작 나 혼자입니까?]
[대신 시대를 초월해서 가장 우수한 재원을 데리고 왔잖아.]
[어흠!…. 그건 인정합니다.]
[사도를 찾는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군.]
[알고 계시는군요.]
[어쨌거나 대단해. 12대 1에서 3:1까지 만들다니… 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야 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아홉을 제거했다고 해도, 나머지 셋을 모두 처치하지 못하면 결국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니까요.]
[목숨도 잃게 되지.]
기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는 거지.]
[눈을 번쩍 뜨면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나거나 하는 게 아니고요?]
[미안하다.]
[으으…..]
[대신 여기서 얻은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갈 수 있으니까 대단하지 않은가?]
[현대로 가서도 몸에서 불을 만들고, 기공 발칸포를 쏘고, 염정구심술로 사람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조종도 할 수 있단 말이죠?]
[당연하지.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네가 얻은 것은 네 안에 있을 것이다. 반대로 네가 무언가를 잃으면 시공과 상관없이 사라질 것이고.]
그 정도라면 목숨을 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정력 관련 능력이 고스란히 유지된다면 얼마나 살맛나겠는가.
[그런데… 내가 잃을 게 뭐가 있습니까?]
[우선 목숨. 그리고 인간성. 뭐 그 정도겠지.]
[하핫! 제 인간성이야 원래 무결점인데…]
[사람의 성격이란 행동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지. 타인의 머리를 밟아 부수는 일을 경험했다면 그 행동은 오랜 시간 무의식에 남아 삶에 영향을 미치거든.]
[하지만 여기선 이곳 상황에 맞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네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보상해주십시오.]
잽싸게 딜을 들어갔지만 신은 슬쩍 사이드스텝을 밟았다.
[한귀비를 대신 찾아줄 수는 없다.]
[그녀를 이길 무공을 배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미 충분한 걸로 아는데.]
[그런가요?]
[그렇다.]
[아!…. 그렇군요.]
말장난 같은 대화 끝에 기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행류를 절반도 못 익히지 못했지만 공주에게 운룡비결을 배우면서 그것이 모든 류와 교집합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라 어디까지가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지금 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확인해준 것이다.
기수는 충만한 자신감을 느꼈다.
‘그래. 난 바른 길을 찾아냈어!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신이 작별인사를 고했다.
[계속 수고해주기 바란다.]
[멀리 안 나갑니다.]
[그나저나… 그 여장은 좀….]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십시오.]
왠지 키득거리는 것 같은 신을 보낸 후, 기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여기서 얻는 능력도 그대로…죽음도 그대로… 그래. 그게 공평한 거지.’
이곳에서 선택한 가치관이 현대에 가서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결국엔 잘 될 거라 믿었다.
기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공주와 사매들도 일제히 일어나 다가왔다.
다들 갈 길을 몰라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기수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다들 기운 내! 우리는 실패한 게 아냐. 강시를 만들어 강남 일대를 뒤집어 엎었던 놈을 잡았잖아. 게다가 그 역시 역모의 일환이었음을 밝혀냈고.”
공주가 힘없이 대꾸했다.
“하지만 한귀비 찾을 방법이 없어졌잖아.”
“코앞에서 놓친 게 좀 아깝기는 해.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은 없어. 결국 불리한 상황에 놓인 건 그쪽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돼.”
“우리가 할 일이 뭔데?”
“실력을 키우는 것.”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한귀비의 문제는 그녀가 단검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혈매궁과 공주까지 일곱 명이나 달라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놓쳤다는 데 있었다.
하다못해 시간만 좀 더 끌 수 있었어도 기수와 아투사가 가세하여 충분히 잡았을 것이다.
설매가 볼을 붉히며 물었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음양대법 시작하는 거야?”
“하핫! 그건 뭐 당연한 애기고… 단순하게 내공증진만 할 게 아니라 뭔가 이론적인 연구를 병행할 필요가 있어.”
“무슨 이론?”
“적에게 일양심법과 은혈대법이라는 확고한 조합이 있는데 반해 우리는 제각각이야.”
공주가 제안했다.
“우리도 전부 은혈대법을 익히는 건 어때? 그러면 한귀비가 빨간 눈동자로 변했을 때 우리도 똑같이 대법을 펼치면 되잖아?”
“글쎄… 그건 나도 실험해봤는데… 아무래도 은혈대법은 일양심법에 특화된 것 같아.”
“무슨 뜻이야?”
“다른 심법으로 하면 효율은 떨어지고, 주화입마 확률은 높아질 것 같다는 거지.”
공주는 입맛을 다셨다.
뭔가 잘 안 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심법을 새로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수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것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걸로도 가능하다고 믿어. 우선 각자 자신의 기초를 충실히 하면서 새로 가르쳐 준 무공들 중 자기한테 잘 맞는 걸 찾아서 열심히 익혀.”
공주는 마음이 조급했다.
“하지만 한귀비는 이번에 은혈대법을 풀고 나면 꽤 긴 시간 무방비 상태가 될 거야. 지금이라도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바보라면 한 방향으로 계속 도망쳤겠지. 하지만 설령 그랬다고 해도 찾기는 쉽지 않을 거야.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왜냐하면 적은 한귀비 한 명만이 아니거든.”
공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한귀비만큼 혹은 그 이상 강한 적이 최소한 2명 더 있어. 그리고 내가 청탑산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별도로 군대를 만들어서 숨겨두고 있어.”
“군대라고?”
“정확한 인원은 몰라. 하지만 상당 수준… 그러니까 조백호 정도의 고수를 대규모로 훈련시켰다고 추정할 수 있어.”
“그 정도라면 심각한데….”
“그러니까 지금 한귀비 잡겠다고 천하를 뒤지고 다닐 상황이 아니란 얘기지. 힘을 키워두지 않으면 한귀비 배후에 있는 진짜 흉수와 그가 준비한 사병들에게 속절없이 당할 수도 있어.”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 말을 듣고 보니까 자기가 좀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큰 그림을 보고 전략을 구상하는 기수가 믿음직스러웠다.
‘아! 역시… 내 남자야.’
기수는 공주의 눈이 하트 모양으로 바뀌자 부담감이 느껴져서 시선을 돌렸다.
“어디 조용한 장소를 잡아 폐관수련이라도 하는 게 가장 좋겠는데…”
탁지연이 말했다.
“소항산 산채가 제격이지.”
혈매궁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긴 너무 멀잖아?”
“뭐, 어차피 한귀비 쫓기는 포기하고 내실을 다지기로 한 거잖아?”
“그래도 일단 서쪽으로 계속 갈 생각이야.”
“왜?”
기수는 사득공 품에서 나온 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본 후 말했다.
“두 사람은 우리가 쫓는다는 사실을 모를 때 장안 방향으로 가고 있었어. 어쩌면 장안이 아니라 그 서쪽에 주둔한 무림맹 본진 쪽이었을지도 모르지.”
“거기에 누가 있는데?”
“무림맹이 아니라 그들을 포위한 사마연합군 쪽에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을 거야.”
탁지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누구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어?”
“사마연합을 결성한 주도세력은 제갈세가야. 처음엔 삼황맹을 이용하여 정사양도를 몰살시키려했지만 그게 실패로 돌아가자 유연하고 발 빠르게 사마연합을 결성했지.”
“그럼 제갈세가도 역모에 관련되었다고 보는 거야?”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사실.
사도들이 역모를 주도하고 있으니, 삼단논법으로 쉽게 추론이 가능했다.
“여기 마지막에 적은 수결은 아마 청(靑)자일 거야.”
탁지연이 손뼉을 쳤다.
“제갈청! 제갈세가 가주 이름이 제갈청이잖아?”
공주는 갑자기 의욕에 불타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장안으로 가자! 한귀비도 늦건, 이르건 분명히 그곳으로 갈 테니까.”
기수가 대답했다.
“내 생각이 바로 그거야. 가는 도중 모든 객잔을 폐관수련 장소로 만들 수 있으니까 장소는 큰 문제가 안 될 거야.”
객잔에서 폐관수련 한다니까 공주와 아투사, 그리고 사매들 낯빛이 동시에 상기되었다. 기수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음양대법 위주가 아냐. 각자 자신의 특기를 하나 이상 개발해야 돼. 대법은 최소한만 할 거야.”
사매들은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는 그녀들에게 개인 연공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사실 대법을 최소화하겠다는 건 자기 자신의 연공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운룡비결을 베이스로 오행류 연구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다.
일행은 싸온 건량을 먹고 물이나 술을 마시면서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한 시진 정도 지나 조백호와 동창 무리가 도착하자 공주는 그를 불러 지시했다.
“저기에 이번 강시사건의 주동자가 있으니까 시신을 장군부에 인계해라. 옆에 따로 꺼내둔 종이 봉지도 함께. 그리고 부하들은 전부 해산시켜.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조백호는 시체를 동창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혼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았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사득공의 몸에선 강시의 체액 같은 것이 스며 나오니까 직접 만지지 말고. 종이 봉지는 자극을 가하면 터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아!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안까지의 지리에 밝은 부하를 한두 명 뽑아 먼저 가면서 객잔을 잡도록 해줬으면 좋겠는데.”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지시를 내린 공주는 현장 정리를 동창에 맡기고 기수 일행과 함께 쉴 곳을 찾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