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93
일행의 이동속도는 느렸다.
먼저 도착해봤자 한귀비를 놀라게 할 뿐이라는 생각에 장안까지 최대한 천천히 가기로 한 것이다.
한귀비 입장에선 무림맹을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몸 상태가 완전해질 때까지는 안전한 곳에 숨어 지낼 가능성이 컸다.
기수는 그 기간을 감안하여 장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물론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한귀비가 훨씬 일찍 도착할 수도 있고, 어쩌면 아예 그쪽으로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편지는 사득공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은 힘을 키우는 게 급선무였다.
기수는 매일 일정시간을 할애해서 오행류와 운룡비결의 조합을 연구했다.
뿐만 아니라 몽둥이 들고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사매들의 진전을 체크했다.
그리고 음양대법은 예고한 대로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졌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기수도 남자인이지라 자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사매들의 협공은 사람을 헬렐레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래서 1:1 단독으로 친밀하고 심도 있게 만남을 가졌다.
한 사람 당 소요시간은 30분 내외.
그래도 상대가 8명이나 되다 보니 4시간은 꼬박 걸렸다.
기수는 보통 사람들이 잠자는 8시간을 대법으로 보내고, 나머지 4시간 동안은 운기조식으로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해소함과 동시에 얻은 내공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생활은 8명과 함께 하면서 침상에는 1:1로 오르는 패턴도 나름 흥취가 있었다.
한 명씩 집중탐구하면서 매력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이랄까.
여인들도 오랜만에 나눔 없이 자기 혼자 기수를 온전히 차지하고 사랑한다는 느낌이 좋은 모양이었다. 음양대법의 집중도가 확실히 높아졌다.
9명은 행복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조백호는 시종일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9명은 여자고, 자기 혼자 남자(비록 환관이라고 해도)니까 따로 떼어놓고 9명끼리만 어울리는 걸 탓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불만은 공주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강시토벌의 공을 차지할 기회가 있었지만 역적토벌에 집중하기 위해 공주를 따라왔다.
강시를 제작의 주범, 요종의 전인도 장군부에 넘겼다.
그런데 공주는 한귀비를 놓쳤다는 말만 하고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지도와 패철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기는 하루 온종일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9명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마치 친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잘 어울렸다.
공주는 분명 혈매궁의 여섯 여인을 싫어했다.
옆에서 보기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함께 깔깔거리고 있었다.
동창의 숙적인 혈매궁과 그렇게 지낸다는 게 조백호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어느 날. 아침을 먹은 뒤.
조백호는 2층으로 올라가려는 기수를 잡았다.
“양씨. 나하고 얘기 좀 합시다.”
기수는 그를 따라갔다.
조백호는 객잔 뒷마당에서 기수에게 물었다.
“도대체 한귀비는 언제 잡으러 갈 거요?”
“글쎄요….”
“글쎄라니. 양씨가 마마와 가장 친하지 않소? 동창 병력 다 돌려보내고 나와 길잡이 두 명만 남기더니 무슨 유람이라도 나온 것처럼 객잔 한 번 잡으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 된 거요?”
기수는 조백호를 측은하게 여겼다.
공주를 만나 고생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장안까지 한 달 정도 일정을 잡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백호님도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십시오.”
“한 달? 아! 미치겠구나…. 당장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혈매궁 마녀들과 앞으로 한 달이나 더 동행해야 한단 말인가?”
조백호는 기수를 궁녀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혈매궁 궁주였다.
‘동창 입장에선 물론 그렇게 보이겠지만 내 앞에서 입 밖에 내면 안 되지.’
측은하게 여기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는 안 될 일이었다.
조백호와 헤어진 기수는 이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시장으로 가서 남자 옷을 샀다.
그리고 자기 방에서 갈아입은 후 가발을 벗고 예전에 활동하던 수로맹 수채의 채주 범장의 얼굴로 바꾸었다.
“후후…. 역시 남자가 편해.”
그는 두건을 쓰고 창문으로 뛰어내려 조백호의 거처 쪽으로 접근했다.
창을 통해 슬쩍 엿들어 보니 부하들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괴롭히고 있었다.
스트레스 풀 상대가 길잡이로 남은 두 명의 번장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환관은 주색잡기 중에서 색이 안 되네.’
환관은 재물을 몹시 밝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쩌면 방출하지 못하는 에너지가 물욕으로 집중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두 명의 번장이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 울분과 짜증이 가득했다.
기수는 단지 그 앞에 서있었을 뿐인데 번장 중 한 명이 노려보며 말했다.
“뭘 봐? 이 새끼야.”
기수는 어이가 없었다.
번장은 동창의 계급 중에서 번자 바로 위의 직책.
일반병은 아니고 하사관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관직이 아닌 동창의 수하일 뿐이기 때문에 무슨 권력 같은 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난 당신과 초면인데 왜 욕을 하시오?”
기수는 일단 선량항 시민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욕 좀 하면 안 되냐?”
그때 옆에 있던 다른 번장이 말했다.
“저 놈 저거 생긴 게 꼭 현상수배 붙은 강도 같은데?”
두 번장은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기수의 좌우를 에워쌌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체격에 몸놀림도 날랬다.
물론 기수의 상대는 아니었다.
한 놈이 손을 뻗어 잡으려 하자 기수는 그의 눈두덩에 쨉을 날렸다.
“어이쿠!…”
덤벼들던 번장은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두 번째 번장이 날렵하게 발차기를 했다.
기수는 피하지 않고 주먹으로 놈의 발목을 쳤다.
“으악!….”
그는 차던 발이 튕겨져 나오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졌다.
두 사람이 연거푸 비명을 지르자 조백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번장 한 명이 말했다.
“저 놈이 아무래도 토포령이 내려진 강도 같아서 잡으려고 했는데 기습적으로 먼저 손을 썼습니다.”
기수는 피식 웃었다.
동창은 면접 볼 때 말 만들어내는 능력을 테스트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백호는 두 번장에게 턱짓을 했다.
“못난 꼴 보이지 말고 어서 잡아라!”
자기가 나설 레벨이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기수가 그를 도발했다.
“어이! 네가 이 두 놈의 우두머리냐?”
“그렇다면?”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
조백호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나더러 사과하라고?”
“그래. 만약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 세 놈을 흠씬 두들겨 패 준 후 주머니를 몽땅 털고 옷을 홀랑 벗겨 알몸으로 길거리에 내쫓아주마.”
조백호는 시정잡배 따위가 감히 동창의 백호인 자신을 몰라보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살심이 동함을 느꼈다.
“오냐! 그래. 실력이 있다면 어디 덤벼 봐라!”
“잠깐만! 신발 좀 제대로 신고 나서 하자.”
기수는 자세를 낮춘 후 손으로 땅바닥을 훑은 후 느닷없이 조백호의 얼굴로 돌멩이를 던졌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장터의 건달패거리 스타일 싸움이었다.
조백호는 코웃음을 치며 날아오는 돌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쳐냈다.
바로 그 순간, 기수의 왼손에 쥐고 있던 모래와 흙들이 얼굴로 날아왔다.
조백호의 안색이 굳었다.
모래나 흙을 맞고 다치지는 않겠지만 시야가 순간적으로 차단된 것이다.
그리고 복부에 통증이 느껴졌다.
기수가 돌 던지고, 모래 뿌리는 데 이은 연계동작으로 발차기를 성공시킨 것이다.
“크하하하!…. 약오르지?”
공격을 성공시킨 기수는 곧바로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엉덩방아 찧은 조백호를 두 번장이 황급히 부축하여 일으켰다.
“백호님. 괜찮으십니까?”
조백호는 그들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고 혼자 일어섰다.
“누가 나를 그렇게 부르라더냐?”
“죄, 죄송합니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백호의 신형이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기수를 쫓아가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화풀이 삼아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불의에 한 대 맞고 보니 자존심에 상처까지 입었다.
이젠 죽이더라도 절대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었다.
기수는 일찌감치 달아났지만 조백호의 경공이 워낙 빠르다 보니 성밖으로 나가자마자 따라잡혔다.
물론 일부러 그 정도에서 잡힐 정도로만 경공을 펼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대치하게 된 곳은 가축시장.
소와 말, 염소와 양, 돼지와 닭이 여기저기서 거래되고 있었다.
기수는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하핫! 이 동네엔 초행이라 길을 잘 몰라서 따라잡히고 말았네.”
“넌 오늘 내 손에 죽었다.”
“하하하!… 이봐. 경공을 보니까 꽤 고수인 모양인데 우리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각자의 길로 가면 어떨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난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너도 객지를 떠도는 몸 같은데 어디 다치고 아프면 서럽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하자.”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라. 기필코 네놈을 죽일 것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대치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말과 염소들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구경을 했다.
조백호는 그들에게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더 모이기 전에 끝내야겠다 생각하고 먼저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기수도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뻑! 소리와 함께 주먹과 주먹이 정면충돌했다.
“끄아악!….”
조백호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부여잡고 물러섰다.
손가락뼈가 부러진 것이다.
기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뭐가 이렇게 약해? 계집애도 아니고.”
조백호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상대는 건달패거리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알고 보니 무서운 고수였다.
적어도 자신 정도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팔도 못 쓰게 되었는데 그만 하지?”
“웃기지 마라. 너 정도는 한 손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다.”
기수는 씩 웃었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제대로 싸워주마.”
그의 입에서 ‘잡아 죽일 혈매궁 마녀.’란 말이 나왔을 때부터 그냥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기수가 한 걸음 물러서며 손짓을 하자 조백호가 다시 달려들었다.
중지 뼈가 부러졌지만 팔을 전부 못 쓰는 건 아니었다.
오른팔로는 방어에 전념하고 왼손은 본격적인 장법을 펼쳐냈다.
기수는 그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다.
특별한 초식이 있는 게 아니라 장터의 싸움꾼처럼 마구잡이로 양손을 휘저어대는데 거기에 조백호의 공격이 모두 막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농부들이라 두 사람의 빠른 공방을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팔과 팔이 얽히는 소리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싸움이란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조백호는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상대의 요혈을 찍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계속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상대는 매번 아슬아슬하게 최악의 상황을 비껴갔다.
‘운이 엄청나게 좋은 놈이군.’
그때, 아래쪽에서 뭔가가 불쑥 날아올랐다.
기수가 발끝으로 차올린 그것은 조백호로서는 도저히 피할 각도가 나오지 않는 절묘한 공격이었다.
꼼짝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아프지가 않았다.
돌멩이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맞은 자리에 충격이 거의 없었다.
대신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말똥이었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구경꾼들이 웃었고 기수도 한 마디 했다.
“배고프냐? 좀 쉬었다 할까? 소똥도 먹을래?”
그 말에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조백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순간, 기수의 눈이 빛났다.
발끝으로 먼저 달려드는 무릎을 찍어 균형을 무너뜨리고 금나수로 조백호의 팔을 비틀어 꺾어버렸다.
“으아악!…..”
오른손 손가락에 이어 왼팔 어깨가 탈구된 조백호는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절묘하게도 소똥무더기 위였다.
기수가 그의 등을 발로 밟은 후 말했다.
“역시 그걸 좋아할 줄 알았다.”
좌우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조백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쓰러지는 사이에 점혈을 당해 몸의 절반이 마비된 것이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올드보이다. 새끼야.”
기수는 조백호의 뒤통수를 잡아 바닥에 퍽! 소리가 나게 처박은 후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서 말했다.
“사람이란 말야.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리면 안 되는 거야. 그 입으로 소똥이 들어갈 수도 있거든.”
“어푸!… 어푸!…”
기수는 일 각 정도면 풀리도록 약하게 조백호의 나머지 혈을 누른 후 객잔으로 돌아와 궁녀 모습으로 복귀하고 입었던 옷은 모두 버렸다.
‘좀 심했나?’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부족했다는 느낌도 있었다.
공주를 돕고 동창과 협조해야 하는 동시에 혈매궁 궁주이기도 하니까 아무래도 좀 애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