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08
무림맹주 주일비가 물었다.
“기소협 혼자 사마연합을 저지하겠단 말이오?”
독불장군은 없다는 의미에서 혼자란 말에 악센트가 붙은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기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광오할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그가 보여준 실력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현현각주에게 무림맹이 그동안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던가.
그런데 기수는 그런 현현각주를 제압했다.
더구나, 중간에는 천마교가 자랑하는 마녀 혈천제와 현현각주를 동시에 상대하기까지 했다. 혈천제는 지금 혈매궁 여인들에게 쫓겨 도망간 상태.
기수와 혈매궁이라면 사마연합 저지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것 같았다.
주일비는 잠시 사람들의 표정을 살핀 후 말했다.
“우리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의논하도록 하고 일단 전열을 재정비합시다.”
시간을 두고 대응책을 생각하려는 의도였다.
기수가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따로 가볼 곳이 있습니다.”
무림맹주의 명령에 따르는 모양새는 무조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암중활약이 아닌 공개적으로 모습 드러내기를 본인의 의지로 선택했으니, 이제부터는 매사를 주도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무림맹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맹주라고 해도 그 안에 얽혀 있는 9파 1방 4문 5가 사이의 역학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각 명숙들의 배분과 체면도 신경 써줘야 했다.
무림맹과 사마연합의 싸움을 말리고 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림맹이라는 복잡한 조직 안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답이 없는 것이다.
‘그래! 완전히 독자 노선으로 가는 게 바른 선택이었어. 아!… 아무리 생각해도 난 천재란 말야. 후후….’
주일비는 자꾸 엇나가는 기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붉힐 상황은 아니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따로 어디를 간단 말입니까?”
“일단 사매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후 곧장 난주로 갈 계획입니다.”
“난주요?”
“화양문의 장원을 되찾으려면 적이 방비하기 전에 치는 게 가장 빠르고 유리한 길 아니겠습니까?”
“아! 그럴 계획이군요.”
주일비는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듣도 보도 못한 청년 고수가 삐딱하게 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난주 화양문을 되찾겠다고 하니 일단 같은 편이란 사실은 확인한 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현재 무림맹 군웅들의 상태는 거의 탈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우리도 곧 따라가겠습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에게 맹주로서 반 하대를 하던 주일비지만 어느 사이엔가 말투가 바뀌고 있었다.
혈매궁이 독자노선을 걷더라도 같은 편이라면 나쁠 것 없다 판단하고 인정해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 것이다.
기수는 사람들에게 포권을 한 후 사매들이 버려두고 간 사인교 쪽으로 갔다.
혹시라도 암천제를 알아본 무림맹 사람들이 해코지를 할까봐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들 앞에 서서 사매들을 기다리는 동안, 기수는 자기를 향한 무림맹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볼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 놔!… 유명해지는 건 피곤한데…’
괜히 나섰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도를 해치우는 데는 아무래도 숨어 지내는 편이 더 유리한 것이다.
그러나 목표는 달랑 3명만 남은 상태. 꼭꼭 숨어 있는 그들을 끌어내는 미끼 역할을 자신이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수많은 사람 목숨이 암중인의 야망 때문에 희생되는데, 그냥 모른 척 하고 있기는 싫었다.
갑자기 없던 정의감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지 사람 목숨이 아까웠다.
길 가다가 집 없는 고양이가 추위에 떠는 모습을 봐도 구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어쩌면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고대 중원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헛되이 죽어가는 건 불쌍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자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이제 보니까 진짜 강하구나.”
“하핫! 내가 좀….”
뒤를 돌아보니 자영과 암천제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기수가 현현각주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질려버린 것이다.
무림맹 군웅들과 달리 천마교 입장에선 기수가 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손에서 불을 뿜지 않나, 몸에서 빛을 내며 강기 덩어리가 되어 돌진하지 않나.
다시 싸우라고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너희 교주와 얘기가 잘 되면 우리는 같은 편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암천제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감정이 잔뜩 실린 목소리였다.
기수는 무림맹이 사마연합을 미워하는 만큼 천마교 역시 무림맹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작을 누가 했건, 잘잘못이 어느 쪽에 있건, 일단 동료가 죽으면 서로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들의 싸움을 말리겠다고 장담했으니…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그때 파공음과 함께 사매들이 돌아왔다.
다들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고, 혈천제는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속으로 안심했다.
사실, 혈천제는 천마교의 대표적인 마녀라 싸우는 도중에 죽여 버린다고 해도 자기가 제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죽는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탁지연이 보고할 때 표정관리는 확실하게 했다.
“미안해. 궁주. 놓쳤어.”
“뭐라고? 여덟 명이 고작 한 사람을 놓쳤단 말야?”
공주가 끼어들어서 한 마디 했다.
“그 년이 어찌나 잽싸게 도망치는지… 도저히 잡을 수 없었어.”
“이런 답답한… 나중에 한귀비는 어떻게 잡으려고?”
“미, 미안해. 우리 수련이 좀 부족했나 봐.”
공주는 돌아오는 내내 그년과 어떤 사이냐고 따질 계획이었지만 놓친 데 대해 추궁을 받고 보니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기수는 적당한 선에서 압박을 멈추고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지금 곧바로 난주로 달려가서 화양문을 되찾을 거니까 다들 기식을 조절해.”
공주가 물었다.
“무림맹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야?”
“아니. 우리는 따로 행동한다.”
기수는 자신의 계획을 얘기해주었다.
탁지연은 잘 생각했다고 말했지만, 공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드러내면 한귀비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 아닐까?”
“아냐. 놈들의 계획을 분쇄하면 숨으라고 해도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 그것도 한귀비가 아닌 그들의 진짜 배후가 말야.”
확신에 찬 어조에 공주도 결국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혼자 결정해서 다 저질러버렸으니 달리 어찌해 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매들이 기식을 조절하며 출정 준비에 한창일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기수는 그들의 선두에 화양문 문주 양호중. 그리고 좌우로 아들 양화린과 딸 양여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양여옥 때문에 괜히 마음이 켕겼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는 아는 체를 하지 않았고, 문주 양호중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기소협. 그대가 이 정도 고수일 줄은 정말 몰랐소.”
“부끄럽습니다.”
“아니오. 게다가 우리 화양문을 되찾는 일에 앞장서 준다니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소.”
“무림동도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아버지 앞이라서 그런지 양여옥은 시선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슬쩍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날 지운 건가?’
딱 한 번 잠자리를 했을 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수가 중원무림에 와서 느낀 점은, 중국 사람들이 절대로 유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필종부니 일부종사니 하는 것은 조선의 얘기일 뿐이었다. 시대가 같더라도 중국인의 사고방식은 달랐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녀들이 자기한테서 떨어지지 않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양여옥이 아는 척 할까봐 걱정하다가 아는 척 하지 않는다고 섭섭해지는 심정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양호중이 말했다.
“기소협 혼자 보낼 수 없어서 내가 함께 가려고 이렇게 왔소.”
“조금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기수는 그의 기식이 매끄럽지 못함을 즉시 알아차렸다.
아들딸과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호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 마시오. 정말 쉬어야 될 문도들은 남겨두고 경공이 가능한 사람만 골라서 데리고 왔으니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일행 전체의 속도를 현저히 늦출 게 분명했고, 난주에 도착한 이후에도 전력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도움은커녕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양호중이 다시 말했다.
“난주의 지리, 장원의 구조를 우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의 목소리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기수는 자기 집을 되찾기 위해 쉬지도 않고 나서는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저희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소, 기소협.”
양호중은 미소를 지었다.
자기네는 힘이 없는 걸 뻔히 아는데, 말로라도 자신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얘기해주니까 고마웠다. 예전에 자기 장원에 머물 때도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딸아 봤다.
든든한 사위 맞고 싶은 욕심이 난 것이다.
그러나 양여옥은 그런 아버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땅만 보고 있었다.
기수는 화양문 문도들의 상태를 둘러본 후 가마 손잡이를 잡고 말했다.
“자! 앞장서 주십시오.”
양호중은 손이 노는 제자가 둘이나 있는데 궁주가 직접 사인교를 들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거기 태운 사람들은 누구요?”
처음엔 혈매궁 궁주가 직접 사인교를 들어야 할 정도로 귀한 신분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몸은 밧줄에 묶여 있었다.
“아! 이들은 암천제와 그 동생입니다.”
“허억! 마교 삼천제 중의 암천제란 말이오?”
양호중뿐만 아니라 양화린과 양여옥도 깜짝 놀랐고, 문도들 중엔 무기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기수가 잠시 가마를 놓고 손짓으로 그들을 안심시킨 후 말했다.
“이들 두 사람은 제가 잡은 포로입니다. 점혈되어 있으니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해치지도 말아주십시오. 나중에 천마교 교주를 만나는 카드로 쓸 거니까 그때까지는 귀빈대접을 해줄 겁니다.”
양화중 등은 카드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대충 문맥으로 알아들었다.
“암천제라니… 도대체 기소협 그대는….”
양화중이 중얼거리자 기수는 ‘멸천제는 누가 죽였게요? 알아맞춰보세욧! 효효효!…’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혈매궁 궁주로서의 체면 때문이었다.
“자! 가 볼까요?”
기수는 양호중 일행이 앞장서도록 했다.
길을 잘 알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속도에 맞춰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동안 공주가 다가와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 저 빨간 머리하고도 했지?”
“무, 무슨 소리야? 생사람 잡지 마. 그리고 했지가 뭐냐? 했지가? 네 신분과 체통을 좀 생각해라.”
“아냐. 저 애가 널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되나. 그냥 찔러보는 건가.
기수는 대답하지 않고 앞만 보며 그냥 달렸다.
공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재는 도대체 왜 저렇게 생긴 거야? 머리카락도 빨갛고, 눈썹도 빨갛고…. 그럼 몸의 털이 다 빨간 건가?”
기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신분과 체통!”
공주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너는 알지? 응? 응? 얘기해 봐.”
“그런 일 없었다니까!”
“결국 다 탄로 날 일인데 뭘 자꾸 숨기려고 그래?”
탄로 나면 그때 얘기해도 되는데 왜 미리 말해서 한 대 맞겠는가. 바본가?
기수는 끝끝내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매들을 둘러보니 다들 양여옥을 살피고 있었다.
특히 추매와 동매는 양여옥의 라인을 핥듯이 탐색하느라 주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공주가 8인 파티로 원칙을 넓힌 후 가장 좋아한 게 바로 그녀들이었다.
그동안 여섯 명 사이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라인과 피부색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저들 둘이라면 양여옥의 진입을 환영할 것도 같은데…’
그러나 나머지 여섯 명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더구나 대상자가 양여옥 한 명만도 아니지 않은가.
당운영, 백서린, 호운혜, 사하….
‘아! 그러고 보니 아직 당사자인 양여옥의 마음도 확인을 못했지…’
기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문제는 나중에 천리에 따라 흘러가도록 맡겨두기로 하고, 당장은 화양문 되찾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한 번 쉬면서 짧게나마 운기조식 할 시간을 가지자 진행속도는 조금 더 빨라졌다. 그리고 확실히 길을 아는 사람들과 동행해서 그런지 사마연합 잔당과 마주치지 않으면서 난주 경내로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멀리 화양문의 장원이 보이자 양호중과 화양문 문도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긴 시간 쫓겨 돌아다니다가 이제 돌아와서 집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 것이다.
기수는 장원 주변을 살펴보았다.
상당수의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분위기는 의외로 평온했다.
현현각주와 혈천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역시 서둘러 오길 잘했군.’
기수는 수신호로 사람들을 가까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