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447
기수의 표정을 살피던 수로맹주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우리 쾌속선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예? 제가요?”
기수의 반색하는 얼굴을 보고 수로맹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혈매궁이 원하는 바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혈매궁은 우리 수로맹의 은인인데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더니 품속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걸 받으십시오.”
기수는 황색 옥패를 살펴보았다.
여자들 콤팩트 정도의 직경과 두께였는데, 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인지 용인지 애매한 몬스터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이게 뭡니까?”
“장강 어디에서든 우리 배를 만나면 이걸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배는 물론 병력까지 최선을 다해 궁주님을 도울 것입니다.”
“병력까지요?”
기수로서는 기대치 않았던 호의였다.
자리를 함께 한 채주들 중에도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이 많았다.
맹주의 신표를 외인에게 내어주는 것은 초유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수로맹주 역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쾌속선을 쓰게 해주는 것은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혈매궁의 이름값을 고려하면 그 정도에서 멈출 이유가 없었다.
특히, 제갈세가의 위협에 다시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최대한 빨리 모셔오려면 배만 빌려줄 게 아니라 사공들까지 항상 곁에 두어야 했다.
그런 저의에서 병력까지 마음대로 쓰라고 호기롭게 말한 것이다.
기수는 신표를 선뜻 품에 넣지 못하고 말했다.
“제가 이걸 받아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우리 수로맹이 혈매국에게 입은 은혜와 비교하면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부디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차마 맹주님의 성의를 저버릴 수가 없군요.”
기수는 못 이기는 척 신표를 집어넣었다.
원하던 바를 쉽게 얻어서 기분이 좋았다.
‘역시 좋은 일을 하면 보답이 있단 말야.’
청탑산 병력에서 60명을 줄인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더불어 수로맹의 탈퇴를 도왔으니 제갈세가의 힘을 크게 깎은 것이고, 이제 녹림72채도 흔들릴 게 분명했다.
기수가 맨 처음 죽인 사도가 바로 녹림72채 소속의 천외존자였다.
녹림의 채주들 사이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수로맹이 빠지는 걸 보고도 머물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면 내가 천외존자, 유씨 자매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이 두 세력 모두 빠져나올 생각도 못했겠지?’
자신의 과거 행적이 현재에 영향을 비치는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군이란 자와 제갈세가 입장에선 엄청 열 받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수는 적의 세력 중 하나를 빼와서 자기편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기뻐 잔에 가득 술을 따라 수로맹주에게 권했다.
“수로맹과 혈매궁이 역도 처단하는 일에 힘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로맹주는 기민하게 전략 방향을 결정했다.
술잔을 비우고 기수에게도 잔을 권하며 말했다.
“우리 수로맹이 그동안 잘못된 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갈세가에 속아서 그랬던 것일 뿐, 조정을 배신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제 전모를 알게 되었으니 황상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장하십니다!”
수적이 충성을 맹세하는 게 어울리지 않아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강에서 통행세 거두고 강도질 하는 걸 그냥 직업 중 하나라고 본다면, 제국에 대한 충성심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관군과 적대적이라는 사실이 주씨 일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겠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수와 수로맹주, 그리고 다른 채주들은 좋은 분위기에서 연회를 이어갔다.
그 즈음. 탁지연도 연회에 참석했다.
그녀와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육대기를 제외하고는 수로맹의 부채주급들이었다.
이번 청탑산 고수들의 침입 때 혈매궁이 구해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만큼 그들이 은인 강달을 대하는 태도는 극진했다.
수로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한 기수와의 약속에 따라 탁지연 역시 그들에게 웃는 낯을 보이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술이 어느 정도 돌자 동정 6채의 부채주인 관로가 말했다.
“강채주님! 시커먼 남자들끼리만 술을 마시려니 심심하시죠?”
그러더니 양손을 귀 옆으로 들어 올려 손뼉을 짝! 짝!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이십여 명의 미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부채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탁자를 두드리며 난리를 피웠다.
딱 한 사람. 육대기만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그는 강달의 성적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관로는 한 술 더 떴다.
“어떻습니까? 동정호 주변 기루에서 예쁘다는 애들은 전부 다 뽑아왔습니다.”
탁지연이 뭐라 대답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만 짓고 있자 관로는 기녀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야! 너희들 좌우로 펼쳐 서서 각자 가장 예쁜 모습을 강채주님에게 보여드려.”
기녀들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저마다 교태를 부리며 탁지연에게 눈웃음을 쳤다.
탁지연은 기가 막혔다.
예쁜 애들로만 뽑아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했지만 궁주라면 모를까,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탁지연이 헛기침만 하자 육대기가 나섰다.
“이, 이봐. 관 부채주. 대장부들끼리 술 마시는데 계집이 웬 말인가? 어서 내보내게!”
관로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육채주님도 꽤나 밝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 강채주님. 어서 골라보십시오. 두 명, 아니 마음에 들면 열 명을 골라도 됩니다. 힘에 자신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자 부채주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탁지연은 자기보다 더 안절부절 못하는 육대기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로 포권을 한 후 말했다.
“오늘은 내가 술이 과해서 이만 돌아가봐야겠습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그리고는 즉시 연회장을 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객사로 갔다.
실례이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괜히 기녀들이 달라붙어 몸이라도 만지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녀들 손을 금나수로 꺾어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그녀가 나가버리자 연회장에 남은 부채주들은 난리가 났다.
강달이 갑자기 가버린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부채주들은 육대기에 시선을 모으고 물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우리가 무슨 실수를 한 겁니까?”
육대기는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강채주님은 여자를 안 좋아 하십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녀를 싫어하는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육대기로서는 대답하기 난처했다.
“어쨌거나 강채주님은 여자라면 질색을 하니까, 앞으로 그분과 있을 때는 절대로 여자를 들이면 안 됩니다.”
관로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돈은 돈대로 쓰고 욕만 먹게 생겼으니…”
그러자 육대기가 말했다.
“누가 욕을 한단 말이오? 자! 강채주님이 없으면 다음은 내가 고를 차례겠지요?”
연회장 안의 분위기가 금방 다시 뜨거워졌다.
강채주가 나가 버린 것은 아쉽지만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육대기가 기녀 중 한 명을 자기 옆에 끌어다 앉힘으로 해서 연회장엔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혼자 돌아온 탁지연은 사매들 모두 연공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지금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내력의 양이 엄청났다.
괜히 역용과 남자 목소리 만드느라 진기를 낭비할 게 아니라 그것들을 진원지기에 녹여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음양대법의 효율이 갑자기 상승한 것은 기수가 목욕물을 스스로 데우면서부터였던 것 같았다.
사매들 모두 말은 안 하지만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속도가 진기 늘어나는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수가 없을 때도 실전 비무를 하자고 서로 조를 짤 정도였으니 무공을 익히는 사람 입장에선 행복한 비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탁지연은 일단 빈 객청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운기조식 하기 전에 형(形)을 한 번 수련하면 여러모로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운기조식을 방해하는 일이 생겼다.
귀빈용 객사를 지키는 수로맹 졸개가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한 후 말했다.
“강채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절대 접근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는데도 알리러 온 것을 보면 직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 찾아온 게 분명했다.
탁지연은 손님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타강채 부채주 손중이었다.
채주 손통의 외아들로, 아까 연회장에서 함께 어울렸던 사내였다.
“손 부채주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손중은 수적 졸개를 손짓으로 쫓은 후 탁지연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 그, 그녀들은 남녀가 유별해서 저쪽 안채에서 따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기 편하겠습니다.”
탁지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손중을 쳐다봤다.
무슨 중요한 얘기이기에 이렇게 따로 찾아와서 말하는가 싶었다. 손중은 좌우를 한 번 더 둘러본 후 사내 치고는 붉은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른 후 입을 열었다.
“아까 육채주님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여자를 싫어하신다고요.”
“아! 그, 그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헉!”
탁지연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겨우 여자들을 피해서 도망쳐 왔는데 별 이상한 게 달라붙고 있네!’
마음 같아서는 미소 짓고 있는 손중의 면상에 주먹 한 방을 먹여주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성별이 같은 상대와 즐거움을 주고받는 게 익숙한 편이기는 했다.
그런 기질을 타고나서도 아니고, 애당초 원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궁주는 한 명인데 사매는 많다보니 어쩔 수 없이 대기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내는데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와 여자 사이의 일.
손중과는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 부채주.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여자를 싫어한다는 게 그런 뜻 아니었습니까? 육채주가 굉장히 거북한 태도로 돌려서 말하던데…”
“그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겁니다.”
손중은 어이없다는 투로 웃었다.
“하하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남자가 객지 생활하면서 아내를 위해 다른 여자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요?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탁지연은 사실 남자의 심리에 대해 정통한 편은 아니었다.
기수의 눈빛이나 목소리만 듣고도 속마음을 짐작하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한 사람에 특화된 거고, 세상 남자들이 다 똑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남자들은 다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는 건가?’
그건 뭔가 반칙이고, 여자들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난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나가 주십시오.”
정색하고 말하자 손중은 한 발 물러섰다.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주십시오.”
“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손중이 끈끈하게 웃었다.
“강채주님도 아시잖습니까? 우리가 상대 찾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되는 겁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밤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오지 마십시오!”
그러나 손중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탁지연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그때 객청 문이 열리며 사매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 굉장하다! 남자가 와서 고백하다니…”
“탁매의 매력은 비교무쌍이구나. 여자로 있어도 남자가 반하고, 남자로 있어도 남자가 반하니…”
객청에서 웬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다가와서 들은 것이다.
탁지연은 빽 소리를 질렀다.
“놀리지 마!”
“호호호!… 어때서 그래? 재미있잖아.”
공주의 웃음에 이어 춘매가 손가락을 딱! 튕긴 후 말했다.
“더 재미있으려면, 내일 저 남자 찾아와서 몰래 만나는 걸 궁주한테 들키는 거야. 궁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지 않아?”
탁지연은 춘매를 와락 밀었다.
그러자 춘매는 아무 저항 없이 밀리며 엄살을 피웠다.
“엄마야!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막 때리네. 설마… 날 강간하려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얏!”
“무서워! 나한테 막 소리를 지르고 있어. 괜히 얻어맞지 않으려면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할 것 같아.”
“그만두지 못해?”
“에잇! 강간을 당하느니 내가 해버릴 테다!”
그리고 춘매는 오히려 탁지연을 덮쳤다.
다른 사매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고 빙 둘러서서 춘매를 응원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마침 기수가 연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입이 좌우로 찢어졌다.
“흐흐흐…. 여자 레슬링이란 말이지? 좋다! 난 춘매한테 은자 하나 건닷!”
탁지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궁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서 말려줘!”
그러나 기수는 사매들 옆에 나란히 서서 응원을 시작했다.